1장
오후 11시 59분
습하고 흐린 여름의 고요 속, 베냐민의 귀에 저 위 숲속을 달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린다. 언덕 위를 본다. 경찰차 한 대가 녹음을 뚫고 별장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트랙터 도로를 느릿느릿 달린다. 완전히 깜깜해지는 일은 없을 6월의 백야, 외따로 떨어져 자리한 별장이 그곳에 있다. 단순하게 생긴 목조주택은 비율이 특이하고 어울리지 않게 층고가 높았다. 하얗게 칠한 창틀과 문틀의 페인트가 벗겨져 내렸고, 남쪽을 면한 외벽은 햇빛에 바랬다. 지붕을 이은 기와들도 한데 붙어버려서 선사시대 생물의 피부 같다. 바람 한 점 없는 공기에 어느 정도 한기가 돈다. 유리창 아래쪽에 안개가 스미고 있다. 2층 창문 한군데서 노란 불빛이 딱 하나 새어 나온다.
언덕을 내려가면 잔잔하게 빛을 발하는 호수가 있고 기슭엔 자작나무가 빙 둘러서 있다. 그리고 여름밤이면 소년들이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사우나가 있다. 사우나를 마치면 소년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처럼 양팔을 옆으로 뻗은 채 뾰족한 바위 위를 비틀비틀 걸어가 물에 들어가곤 했다. “물이 참 시원하구나!” 한번은 아버지가 풍덩 뛰어들며 그렇게 외쳤고, 그 외침은 호수 건너편까지 퍼져나갔다. 그 후에 뒤따른 침묵은 오로지 여기, 다른 어떤 곳과도 동떨어진 이곳에만 존재했다. 때로 베냐민은 그 침묵이 무서웠지만, 어떤 때는 온 세상이 그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기슭을 따라 한참 나아가면 보트 창고가 나왔다. 목재가 썩어가고 구조물 전체가 물을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한 창고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헛간이 있었다. 대들보에는 흰개미가 쏠아놓은 구멍이 수도 없이 뚫려 있고, 시멘트 바닥에는 70년은 묵은 것처럼 짐승 배설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헛간과 집 사이 작은 잔디밭에서 소년들은 축구를 하고 놀았다. 땅이 살짝 비탈져 있어 호수를 등지고 공을 차는 쪽은 오르막을 향하는 힘든 싸움을 펼쳐야 했다.
작은 풀밭 위에는 조그만 건물이 몇 개 있다. 오래전과 마찬가지로 외롭디 외로운,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 먼 곳에 서서 바라보면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아주 드물게 호수 너머 자갈길로 차 한 대가 지나가며 기어를 낮게 설정한 엔진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는 한다. 건조한 여름날이면 차가 지나간 뒤 곧바로 숲에서 먼지구름이 이는 게 보인다. 하지만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이곳을 그들은 떠나는 법이 없었고,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한번은 사냥꾼을 본 적이 있었다. 소년들이 숲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흰머리에 초록 옷을 입은 남자가 20미터쯤 떨어진 전나무 숲속을 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검지를 입술에 대더니 나무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무슨 영문이었는지는 영영 설명할 길이 없다. 사냥꾼은 아주 가까이에서, 그러나 조금도 닿지 않고 하늘을 가로질러 간 알 수 없는 별똥별이었던 셈이다. 그 뒤로 소년들은 사냥꾼을 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베냐민은 때때로 그 일이 진짜 있었던 일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해가 저물고 두 시간이 지났다. 경찰차는 머뭇거리듯 트랙터 도로를 따라온다. 운전하는 사람은 초조한 시선을 후드 바로 앞에 고정하고 언덕을 내려오며 지나치는 길에 있는 것들을 눈여겨본다. 운전대에 몸을 바짝 붙이고 고개를 들어도 나무 우듬지가 보이지 않는다. 집보다 더 높이 자라난 상록수들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소년들이 어렸을 때도 거대했던 그 나무들은 이제 키가 30미터, 40미터는 족히 되었다. 소년들의 아버지는 땅이 비옥한 게 자기 덕이기라도 한 것처럼 뿌듯해했다. 6월 초에는 순무 싹을 심어놓고, 불과 몇 주 뒤 아이들을 텃밭으로 끌고 나와 땅 위에 한 줄로 얼굴을 내민 빨간 점들을 구경시켜 주곤 했다. 그러나 별장을 둘러싼 비옥한 땅은 믿음직하지 못하다. 곳곳에 완전히 생명력을 잃은 흙이 있어서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심어준 사과나무는 아직도 오래전 심은 그 자리에 있지만,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사과가 열리지도 않는다. 돌멩이가 하나도 없고 새까맣고 묵직한 흙이 있는 자리도 있다. 그것은 풀이 나는 곳 바로 아래가 암반이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닭을 가둘 울타리를 치려고 부지깽이로 땅을 팔 때, 비를 맞아 묵직해진 잔디 아래로 부드럽게 흙이 누그러질 때도 있었지만, 조금만 파도 깡 하는 소리가 날 때도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암반의 저항력 때문에 손을 파르르 떨면서 고함을 쳤다.
경찰관이 차에서 내린다. 어깨에 달린 장비에서 뭐라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나지만 그는 훈련된 몸놀림으로 재빨리 볼륨을 낮춘다. 덩치가 큰 남자다. 허리에 차고 있는, 움푹 패어 있고 광택 없는 검은 장비들 때문에 어쩐지 지쳐 보인다. 장비의 무게가 그를 땅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다.
키 큰 나무들을 배경으로 푸른 불빛이 어른거린다. 이 불빛은 어쩐지 특별하다. 호수 너머 산이 푸른빛으로 물든다. 경찰차가 뿜어내는 푸른빛은 캔버스에 그대로 담아도 될 것 같은 빛깔이다.
경찰관이 집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멈춰 선다. 문득 망설여지기라도 하는 듯 잠시 현장을 살펴본다. 남자 세 명이 별장 현관문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에 나란히 앉아 있다. 서로를 안고 울고 있다. 정장에 넥타이까지 갖춘 차림이다. 그 옆, 잔디 위에 유골단지가 놓여 있다. 경찰관의 눈이 세 남자 중 한 명과 마주치자 그가 일어선다. 나머지 두 남자는 여전히 서로 부둥켜안고 앉아 있다. 피투성이에 심하게 두들겨 맞은 모습이기에 경찰관 역시 앰뷸런스를 부른 이유를 알 수 있다.
“베냐민입니다. 신고 전화를 건 사람이 접니다.”
경찰관은 주머니를 뒤져 수첩을 찾는다. 이 이야기가 종이 한 장에 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방금 자신이 수십 년간 이어진 이야기의 결말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을 경찰관은 모른다. 오래전 이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온 세 형제의 이야기라는 것도,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무엇도 단일한 사건이 아니며 별개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도 모른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무게는 어마어마하고, 당연하게도 사건의 대부분은 이미 일어났다. 여기 돌계단 위에서 펼쳐지는 세 형제의 눈물과 부어오른 얼굴, 피의 이야기는 그저 수면에 남은 마지막 파문이자 돌이 떨어진 자리에서 가장 먼 곳에 일렁이는 잔주름일 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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