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몽初夢
─『여자계』 제2호 1918.3.
탄실김명순의 아명이자 대표 필명이는 간밤에 감아서 아직 마르지 않은 검은 머리를 요 위에 풀어헤치고 무슨 신산스러운 꿈을 꾸었는지 휘― 한숨을 짓는다. 오전 한 점 종소리에 왼편으로 몸을 뒤척일 때 비단이불 소리가 바삭바삭하고 백설 같은 요 위에는 검은 파도가 일어나며, 탄실이는 두 번째 탄식을 한다. 탄실이는 혼자 중얼거린다. 잠꼬대는 아니다. 아아 금년에도 나의 고생은 계속되겠구나. 시방 꾼 꿈은 참 이상도 하다. 꼭 구약전서에 쓰인 옛 유태인의 신몽神夢 같구나.
내가 걷던 곳은 꼭 ○○ 같은데, 비 오고 바람 부는 낮에 나는 맨발로 홀로 어디인지 한정 없이 열심히 달아날 때에 벽력霹靂 소리는 굉장하였다. 몸이 한 줌만큼 줄어든 것을 의식할 때에 공중에서 전진하라고 호명하는 까닭에 나는 하릴없이 자꾸만 달아났었다. 한참 만에 날이 개고 좋은 음악 소리가 요요히 들리더니, 어떤 젊은 사람이 나를 안개가 보얗게 일어나는, 좌우에 타원형의 댑싸리 나무가 초록으로 늘어서 있는 예술의 길로 인도하여주었다. 나는 그때에야 비로소 휘 차가운 숨을 다― 내쉬고 비에 젖은 옷을 벗고 절색絶色, 빼어나게 아름다운 색으로 칠한 집으로 들어가 가벼운 옷을 새로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아서 〈춘春의 축祝〉이라는 곡을 연주하였다.
탄실이는 말을 마치고 다시 한숨지으며 영채映彩, 영화로운 빛깔 있는 고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린 듯이 움직이지도 않는 탄실의 귀에는 다만 램프의 기름 잦는 소리가 미묘하게 들릴 뿐이다.
봄 네거리에 서서
─『생명의 과실』 1925
다시 봄이 돌아왔다.
‘어린이의 관머리시체의 머리가 놓이는 관의 위쪽에 선 어머니의 마음같이’ 무겁게 땅 밑으로 주저앉고 싶어 하던 하늘이 맑은 웃음을 띠고 곱게 개었다.
땅 위에 쌓였던 눈이 흔적도 없이 녹아든다. 네 길거리를 지나는 바람이 이 골목으로 드나 저 골목으로 드나 날빛을 빨아마시는 나무 가지가지에 부딪칠 때는 필경 봄을 고하려니 하고 생각된다.
봄이다, 봄이다. 내 마음속에 무엇이 속살거린다. 참으로 봄인가보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나뭇가지들에도 봄이 왔다는 생각을 아니 가질 수 없는 봄인가보다. 또 무엇이 이렇게 대답한다.
무거운 마음과 가벼운 마음이 봄을 이야기하는, 내 마음 속 맨 밑을 굽어본다.
어찌하였느냐 아이야 어찌하였느냐 아이야 왜 눈물 같은 것을 아주 씻지 못하느냐?
내 입술이 저절로 내 몸 위에서 부르짖는다.
하나 무거운 무거운 내 마음속 맨 밑은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아아 내 입술은 탄식한다.
― 너는 봄을 모르는구나, 불쌍한 아이야. 너는 지금까지 봄을 못 보았구나.
― 울음을 그쳐라. 엊저녁에 네 운명의 신이 꿈 가운데에서는 바뀌지 않았더냐. 너는 지금부터 천천한 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지 않으냐.
― 봄이나 봄이다 아직 늙지 않은 아이야, 뛰고 놀아라. 네 눈은 아직 빛나고 네 뺨은 아직 붉지 않느냐. 지나는 일 초…… 일 분…… 들이다. 네게 빛이 보이는 듯싶지 않으냐.
탄식이 위로로 변하여 제 자신을 위로한다. 하나 내 마음 속 맨 밑은 그까짓 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없이, 울음을 그칠 줄을 모른다.
가볍게 들뜨려던 마음과 무섭게 가라앉으려던 마음이 엉클어져서 운다. 세상에는 봄이 왔으되 네게는 깨일 줄 모르는 겨울이다. 세상은 봄옷을 입되 너는 겨울의 누더기를 벗지 못한다.
긴― 겨울 무거운 누더기는 얼마나 지루한 것이랴. 하물며 세상이 다― 화려한 장식을 한 봄 네거리에 서서야 얼마나 쓰라릴 것이냐.
화려할 소녀의 시대를 능욕과 학대에 빼앗기고 너는 지난 십 년간 얼마나 아프게 울어왔더냐. 길을 지나는 낯익은 얼굴들이 다 네게 무엇을 말하느냐.
가슴을 두들기며 몇 밤을 새워가며, 길거리를 지나는, 가장 낯익어 보이는 사람에게 네 마음을 풀어 보인대야 알고 싶을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나 가슴속 깊이 박힌 네 설움이 쉽게 옮겨질 것이냐……. 온―몸과 온 마음이 한데 엉클어져서 울음을 그칠 줄 모르고 운다.
― 슬픈 사람에게는 사랑도 없고 희망도 없다. 다만 설움, 그것만 있을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가 모든 잃어버린 과거를 갖다준대야 지금에 이르러 기꺼워할 것이 아니고, 더군다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고 귀밑에 속삭여준대야 귀찮을 뿐이고 기꺼워할 것이 아니다.
어떤 친구가, 쓸쓸한 얼굴로,
“누가 먼저 나를 사랑한다면 나도 하리라. 그러지 않고 나는 용기가 없다” 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 아아 얼마나, 생각 없이 자기를 더럽히는 말이냐. 그때 웃으면서 그 친구에게 한 말이 다시 생각난다.
“친구여, 저편에서, 공연히 친구를 보지도 않고, 사랑을 해준다면, 친구는 얼마나 귀찮고 모욕을 느낄 것인가. 친구여, 그런 맘을 버리고 노동을 해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울어보라.”
참으로 그밖에는 하는 수가 없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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