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D’où Venons Nous?
우리는 무엇인가? Que Sommes Nous?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Où Allons Nous?
이 세 가지 진지한 질문을 한꺼번에 던진 사람이 있다.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다. 그는 이 질문을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을 배경으로 한 자신의 걸작에 제목으로 붙였다. 고갱은 마흔이 넘은 중년의 나이에 머나먼 폴리네시아로 떠나 이국적인 풍광과 토착민들의 삶을 그렸다.
화가의 삶과 이 작품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워낙 다양한 평가와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나는 다만 이 작품의 제목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했다. 원시주의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그림도 물론 훌륭하지만, 제목은 그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를 계속해서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철학자들이나 던질 법한 질문을 나는 한 화가로부터 듣고 있었다. 어느새 세상의 중심 옴파로스Omphalos로 날아가, 누군지 모를 이에게 눈덩이처럼 커진 물음을 되묻는다. 신탁oracle이라도 기다리는 심정으로.
‘왜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이것은 어쩌면 모든 철학 중에서 가장 심오한 존재론적 질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연유로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우리는 왜 태어났으며, 그리 길지도 않은 인생을 힘겹게 살다가 결국은 죽어 사라져야 하는 걸까?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목적이 있는 존재일까, 아니면 어쩌다 우연히 생긴 존재에 불과할까? 바쁜 일상을 정신없이 보내는 동안에는 전혀 와 닿지 않는 질문들이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쯤 존재의 본질을 깊이 사유해볼 때가 누구에게나 문득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많은 사상과 철학이 역사 속에서 피고 졌다. 우리의 존재를 고민하다 보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넓은 세상과 우주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 광활한 우주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났을까?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가 보기에 이 질문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신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이 질문을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거꾸로 활용했다. 반면 무신론자였던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우주가 그냥 우연히 존재할 뿐 어떤 의미도 없다고 보았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 우주의 탄생 시점이 있을지 없을지를 모두 가정해보았다. 그는 두 입장이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결코 알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에게도 세계의 존재는 이성과 논리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이처럼 위대한 지성들에게조차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난공불락의 문제였다. 우주의 탄생에 대한 이 궁극의 질문은 ‘코스모고니cosmogony’, 즉 ‘우주생성론’이라 불린다. 빅뱅이론the Big Bang theory이 탄생한 이후에는 철학뿐 아니라 현대 우주론에서도 다양한 수학적·물리학적 방식으로 변용해서 논증하고 탐색하는 문제가 되었다.
신학자나 종교인들의 대답은 이보다 더 간명할 거라 여기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아는 바와 달리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도 완전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은 아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도 ‘무’는 생소한 개념이었는데, 신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창세기」 첫 장에 따르면 신은 “땅과 물이 혼돈tohu하고 공허bohu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가운데” 천지를 창조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기보다는 무질서chaos에서 질서cosmos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빅뱅이론과 창조론은 서로 닮은 점이 있다.
우주와 세계의 존재에 관한 의문, 그리고 어쩌면 이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를 인간과 생명에 관한 질문, 이 두 가지 물음은 세상의 모든 학문이 답하고자 하는 궁극의 목표일 것이다. 생명이란 어떤 존재일까? 생명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우리는 과연 여기에 올바로 답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 생명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상반된 관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두 관점의 중요한 차이는 무엇인지, 어느 쪽이 더 그럴듯해 보이는지 함께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의 차이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은 무엇이 다를까? 어찌 보면 굉장히 쉬운 질문일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젖먹이 아기도 생물과 무생물을 쉽게 구분해낸다. 아기들은 장난감처럼 생명이 없는 물체라면 얼마든지 물어뜯고 부수곤 한다. 하지만 생명체를 보면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은 여러 방면에서 인간보다 뛰어나지만,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일에는 의외로 아직은 서투르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치와와의 얼굴과 머핀을 구분하는 것이나, 털복숭이 개와 대걸레를 구별하는 것 등은 AI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똑똑한 AI가 별 것 아닌 간단한 차이를 알아채지 못해 쩔쩔맨다니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온다.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오랜 옛날 자연과 가까이 살았던 원시인들은 생명이 있는 것에는 ‘정령’ 같은 것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땅과 숲, 강물을 포함해 자연의 모든 만물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물활론적hylozoic 자연관’이라 한다. 하지만 생명이 아닌 것에도 정령이 있다고 여긴 것으로 보아 이 관점이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래도 살아 있는 것에서 무언가가 떠나면 곧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생명 속에 있는 그 무언가를 ‘숨’ 또는 ‘생기’라고 불렀다.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BC 585~525는 이를 만물의 근원이라 여겨 ‘아에르ἀήρ, air’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와 갈레노스Claudius Galenus, 129~199는 생명에게 운동 능력을 부여해주는 따뜻한 공기라는 의미로 ‘프네우마πνεύμα, Pneuma’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동물의 생성에 관하여De Generatione Animalium』를 보면, 그는 동물이 지니는 프네우마의 양과 질, 온도 등에 따라 동물의 종류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동물의 신체기관도 그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르게 만들어질 수 있다고 여겼다. 히포크라테스 이후 고대의 가장 중요한 의학자 갈레노스는 숨을 쉴 때 생명의 기원인 프네우마가 폐로 들어와 혈액과 섞인 후 신진대사를 조절한다고 믿었다. ‘프네우마’는 오늘날 그 의미가 조금 달라졌지만 ‘호흡breath’이나 ‘폐lung’를 뜻하는 접두어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폐렴’을 뜻하는 의학용어 ‘pneumonia’도 우리가 잘 아는 하나의 예일 것이다.
프네우마의 개념은 스토아 철학Stoicism에까지 이어졌다. 스토아 학파는 우주만물은 물론이고 신마저도 물질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생명을 이루는 물질에는 프네우마가 깃들어 있다고 믿기도 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믿음을 가졌으니 어느 정도 모순성을 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훗날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를 ‘영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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