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 해설
이반 일리치의 『H2O와 망각의 강』을 처음 읽었을 때 떠오르는 느낌은 경탄이었다. 아니, 감동이라는 게 맞겠다. 글의 빼어남에 대해 놀라고 감탄하기에 앞서 어떤 슬픔이 가슴 깊이 밀려오는 느낌이었으니까. 우리가 잃어버린 찬란하고도 따뜻했던 과거 세계와 지나간 삶에 대한 어떤 비애. 옮긴이가 한 걸음 앞서 맛본 감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독자들도 이 짧은 책을 역사적 사실과 논리로 촘촘히 짜인 글로만 읽지 않기를 바란다. 책 내용은 ‘물’의 역사적 변천과 근대의 액체 ‘H2O’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잃어버린 우리들의 옛 삶에 대한 아름다운 회상과 놀라운 발견의 이야기로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그렇게 읽다보면 독자들도 책의 마지막 쪽에 이르러서는 아마도 처음 펼칠 때의 몇 배 이야기를 읽은 느낌일 것이다.
일리치를 읽을 때마다 그의 광대무변한 지식에 놀라곤 한다. 역사 이전의 신화적 세계에서부터 로마 무명 학자의 연구, 중세 시골의 어떤 풍습, 동서양의 갖가지 문화, 그리고 철학, 역사, 인류학, 사회학의 어느 한 분야로 가둘 수 없는 앎의 폭에 자주 놀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의 폭보다 깊이일 것이다. 그는 언제나 사물과 인간의 핵심을 꿰뚫어 말한다. 그의 책에서 미셸 푸코가 지적한 처벌에서 돌봄으로 바뀐 근대 통치성의 원리를 읽는다든지, 최근 인류학의 흐름인 타자 또는 객체 중심의 전회를 읽는다든지, 공산주의communism를 넘어선 공유주의commonism의 사상―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주창한―을 읽는다든지 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아가 자연의 무제한적 이용이 단지 환경의 보복만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공동체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현대 생태학의 기본 원리쯤은 그의 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환경보호’와 같은 몰정치적 표현보다는 정치적 생태주의, 즉 기술과 성장의 자율적 규제 아래서만 가능한 문화적 생태주의의 복원을 일찌감치 말했다. 소비의 부산물을 줄여야 한다는 환경운동가들의 좁은 시야를 넘어 ‘소비’ 또는 ‘필요’라는 근대적 발명품 자체가 생태 위기는 물론이고 인간을 젖먹이 소비자로 불구화disabling한다는 성찰이 일리치의 생태주의이다. 그의 주저 대부분이 나온 1980년대에 이미 이런 이야기들을 깊이 있게 논했다는 점에서 일리치는 ‘21세기의 예언자’로 부를 만하다.
이반 일리치의 근본 개념들
이 책의 주제를 언급하기에 앞서 일리치의 사상 전반을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리치의 책들은 주제와 주장이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하나의 책으로 시야를 좁히면 그의 생각을 오해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희소성scarcity, 필요needs, 자급자족subsistence 등은 일리치 사상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다. 비非시장주의 대안 경제학자인 칼 폴라니Karl Polanyi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은 그는 오늘날의 빈곤과 불평등, 폭력, 인간성 상실, 환경 파탄의 원인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oeconomicus의 탄생에서 찾는다.
시장에서 부여된 교환가치가 모든 재화의 사용가치를 대신하는 시장경제가 성립된 이후, 근대 경제학은 희소한 가치를 둘러싼 인간의 경쟁은 필연적이고 인간은 처음부터 필요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는 허구의 이념을 창조했고, 시장제도만이 그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강변해 왔다. 그러나 폴라니가 밝힌 대로 시장경제 이전에도 사람들의 살림살이와 필요는 자급자족 경제를 통해 충족되었고, 인간은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삶을 영위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단지 근대 자본주의가 낳은 기이한 변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subsistence’는 흔히 ‘생계’나 ‘자급자족’으로 번역되곤 하지만 원래는 ‘자립’의 의미였다. 일리치는 다른 책에서 ‘자립적 관계’relatio subsistens라는 스콜라철학의 용어를 특별히 언급한 적이 있다허택 옮김, 『젠더』, 264쪽.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중세의 스콜라철학으로 이어지는 전통에서 자립적인 것은 또한 실체적인 것이기도 했다.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성질인 속성attribute과 비교하여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실체substance라 했는데, 그런 점에서 자립적 실체는 하나로 묶어도 좋은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실체’가 지금은 자주 ‘실질’의 뜻과 혼동되어 마치 ‘형식’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도 사실이다. 폴라니는 자급자족경제를 공식경제formal economy에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거니와, 여기서의 ‘formal’을 ‘실질’과 반대되는 의미로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폴라니는 비공식경제informal economy와 대비되는 공식화된 시장경제의 의미로 이 단어를 썼고, 역사적으로 인간의 경제 형태에는 ‘자급자족경제’와 ‘공식경제’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자급자족’은 시장의 한 요소로 함몰되지 않는 자립적 인간 활동의 물질적 측면을 가리키므로 더없이 중요한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의 공동체적 관계 안에 단단히 묻혀 있는embedded 경제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와 문화적 맥락에서 뽑혀나간disembedding 시장경제가 성립하면서 교환가치―그것의 표현물이 곧 상품이다―가 인간 삶에 ‘근본적 독점’radical monopoly을 행사하는 체제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상품이 아니면 필요를 충족할 수 없는 이 근본적 독점 체제를 극복하고 자립적 삶을 회복해야 한다는 일리치의 주장은 제도 비판으로 이어진다.
학교, 의료, 교통 등의 근대 제도는 인간의 자율적 활동을 상품 교환의 체제 안에 묶어두기 위해 발명된 것들이다. 학교가 아니면 배울 수 없고, 병은 병원에서만 고칠 수 있으며, 차가 없으면 이동할 수 없다는 믿음은 인간의 자율적 활동을 돈을 내고 구입해야 할 ‘필요’로 바꾸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제도적 상품 체제는 그것을 설계 운영하는 전문가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체제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끊임없이 필요를 고안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강화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더욱 더 불구화한다는 것이다. 이 결론에서 우리는 일리치의 관심이 그저 현대 문명을 비판하거나 정치적 변혁을 꾀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관심은 무엇보다 인간의 실존적 자율성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일리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인간을 스스로 성화될 수 있는 영성의 존재로 믿은 사람이다. 신이 베푼 인간의 자유와 자기실현의 소명을 되찾아야 한다는 믿음, 그것이 일리치 사상의 근본일 것이다.
일리치, 그의 사상적 궤적
일리치의 저작들을 발표순으로 일별하면 1980년대 중후반쯤에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196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그는 사회비판의 전사였다. 근대 산업사회가 불러온 인간성과 공동체의 파괴, 끝없는 경제 성장의 이념으로 인한 불평등과 생태 문제, 인간의 자율을 압살하는 제도주의, 모든 문화적 다양성을 지우는 근대적 획일성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데 그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깨달음의 혁명』에서부터 『학교 없는 사회』 『의료의 한계』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공생공락의 도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역사적 탐구를 통해 근대 경제의 허구적 기초와 젠더 불평등의 기원을 밝혀낸 『그림자 노동』 『젠더』 등이 그런 저서들이다. 이 모든 것은 에리히 프롬이 일리치에 대해 평한 한 마디 말, ‘인본주의적 래디컬리즘’humanist radicalism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일리치는 래디컬 곧 ‘뿌리’로 돌아가 인간의 자율적 삶을 해치는 모든 것을 폭로하고자 했다.
그러나 1980년대를 거치며 일리치는 그가 겨냥한 현대의 제도와 경제체제가 흔들리기는커녕 더욱 강화되는 것을 보며 꽤나 깊은 절망에 시달린 듯하다. 나중에 일리치는 “우리가 창조된 모습에서 점점 멀어져 가공된 현실에서 살고 있고 (…) 무력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이 무력함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사라져 버린 것을 애도하며,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단념해야 한다”고 고백한다.데이비드 케일리,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276쪽 바로 이즈음에 그의 관심은 제도 비판에서 현대를 만든 관념으로 옮겨간다. 현대의 도구 대신 도구가 가진 의미에 대해, 물리적 사실 대신 그 사실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관심을 돌린 것이다. 그것은 이전의 관심을 포기했다기보다 더욱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 현대의 문제를 파헤쳐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한 관심이 시작된 1980년대 중반의 저서가 이 책 『H2O와 망각의 강』이다. 『ABC: 민중 지성의 알파벳화』1988와 『텍스트의 포도밭에서』1993도 같은 관심의 연장선에 있는 저서라 할 수 있다.
근대적 액체 H2O의 기원
『H2O와 망각의 강』에서 일리치가 시종일관 유지하는 문제의식은 근대적 사고에 감춰져 있는 ‘획일화’의 논리이다. 모든 가치를 화폐로 환산하는 근대 경제학의 철학적 의식에는 등가 교환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고, 또 이 개념에는 모든 물리적 대상은 동일하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물리적 가치가 동일하지 않으면 교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 보드리야르가 화폐, 지식, 기호를 실체적 기반에서 떠나 유통에서 가치를 획득하는 대상으로 규정한 바 있거니와그는 이런 모방적 대상이 원본을 앞서는 현상을 현대의 특징으로 본다, 일리치 역시 표준화하여 널리 소통시킨 모어母語와 화폐교환 경제를 근대적 사고를 탄생시킨 맹아로 지적한다일리치, 『그림자 노동』 참조. 모든 것을 모든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교환의 이념은 인간의 고유하고 구체적인 활동마저 교환가능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그런 사례의 일부가 이 책에서 다루는 물, 공간, 냄새와 같은 ‘질료’들이다.
일리치는 이 책에서 인간의 문화와 역사를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보편적’ 질료는 없었다고 한다. 인간이 내용과 형식을 부여해야만 질료가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론적 주장이 아니라, 인간과 질료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를 제한함으로써 하나의 공통된 삶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역사주의의 주장에 가깝다. 또는 후설과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스스로 생활세계Lebenswelt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주장이기도 하다. 그런 생활세계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 아니라 야생의 열려 있는 영역, 신의 영역에 속한다는 생각이 인류의 오랜 생태적 지혜이기도 했다.본문 32쪽 주7 그러므로 일리치는 질료들에 부여된 문화적 의미와 상상력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잃어버린 삶을 재발견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일리치는 이 책에서는 그 작업을 고대의 공간과 물에서 시작한다.
고대의 공간은 안과 밖의 경계를 긋는 작업에 의해서만 탄생할 수 있었고, 물 역시 하늘과 땅 혹은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이원적 원리를 가진 질료였다고 한다. 경계를 그음으로써 공간은 친밀하거나 낯선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얻었고, 물도 이승과 저승의 경계 짓기를 통해 죽은 이에게서 씻어낸 기억을 므네모시네의 샘으로부터 전해주거나 영혼의 정결함을 일깨우는 이중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씻어내고 되살리는 기능이 물의 본래적 이중성이며, 후일 그것은 씻어내는 청결cleanness의 역할과 일깨우는 정화purification의 역할로 표현되었다는 얘기다. 요컨대 고대인들은 이런 차이를 사물에 고유하게 내재된 특성으로 강렬하게 의식하였고, 이런 이원성 또는 차이성을 인간의 문화와 삶의 근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가 지어낸 교환―이 책에서는 ‘순환’―의 이념은 이 모든 차이를 문질러 지우고, 균질화되고 획일화된 공간과 물의 관념을 주입한다. 물이 독성과 냄새를 제거하는 H2O라는 화학물질로 전락하고 공간이 균질화된 데카르트적 동일 공간으로 바뀌면서 인간의 감각체계도 달라진다. 과거 사람들은 냄새로 공간의 특징을 지각하고 반응했는데, 근대의 냄새는 시신과 분뇨가 뿜어내는 냄새이자 신분을 드러내는 혐오와 수치심의 표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획일성의 세계 vs. 차이와 우연의 세계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 과자의 냄새에서 유년의 기억으로 빠져들듯이, 지금도 우리는 시각의 기억보다는 냄새를 통해 어릴 적 아련한 어머니의 살 냄새와 김이 피어오르는 저녁 밥상을 또렷이 기억한다. 개인마다 또는 각 문화마다 독특하게 형성되어 있는 이런 기억의 고유성과 상상력은, 공간적 차이를 밀어버리는 불도저와 변기의 물을 호수의 물로 재활용하는 현대 문명의 균질화 논리에 의해 문질러지고 평평하게 다져져 버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변기 물과 호수물의 차이도, 아름답게 지저귀는 시냇물과 도시의 인공적 콘크리트에 갇힌 분수의 차이도, ‘자연의 불과 핵발전소의 끝없이 타오르는 불의 차이’박경미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문화마다 달리 표현되는 젠더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성sex이라는 생식기의 차이로만 남녀를 구분하는 사고, 친밀함과 낯섦의 차이도 없이 모든 인간을 동등한 원자적 개인으로 치환하는 사고는 결국 거짓 평등의 신화를 낳았고, 소유권으로만 개인을 평등하게 대하는 세계, 그리하여 거꾸로 소유의 차이로 인간을 차별화하는 기이한 세상을 만들고 만 것이다.
이 책에서 일리치는 미국 댈러스 시의 타운레이크 조성을 둘러싼 논란에서 출발하여, 이 논란의 근저에 숨어있는 현대적 관념의 연원을 고대, 중세를 거쳐 근대로 이어지는 공간과 물의 상징을 통해 들춰낸다. 중요한 점은 이 탐색을 통해 ‘과거의 거울에 비춘’ 현대의 특징이 적나라하게 폭로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생한 삶의 현실이 기술적 관리와 조작을 통해 획일화되고 경제적 합리성에 굴복한 것이야말로 현대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런 균질화의 폭력 아래서 인간은 다양하고 풍요로운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음은 물론이요, 신이 자연을 통해 베푼 자율적 삶의 가능성과 성화의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일리치의 논점에서 꼭 짚어야 할 부분이 하나 있다. 그가 말하는 차이와 다양성의 복원은 현대에서 말하는 다양성의 존중이나 가치의 평등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떠받드는 다양성의 이념은 모든 것을 개인적 가치로 치환하는 자유주의적 다양성의 또 다른 버전일 수 있다. 바로 교환의 이념에 따라 동질화된 가치들의 거짓 등가성 말이다. 일리치가 말하는 다원성diversity이란 단순한 가치의 복수성plurality이 아니라, 공동의 역사적, 문화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고유성singularity이다. 이 유일무이한 특징들은 당연히 교환할 수도 대체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예컨대 각각의 문화들이 공간과 물을 다루는 방식은 그 문화에 밀착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젠더의 경우에 더 잘 드러난다. 모든 문화는 기계적으로 이분화된 성性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고 비대칭적인 젠더 관계 위에 존립한다. 젠더 간의 불평등이 아닌 비대칭성, 그리고 대립성이 아닌 상보성의 내용은 문화마다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각 문화의 젠더는 그 문화의 자율적 생존 조건에 의해 제약받을 수밖에 없고, 다시 그 문화의 조건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젠더가 아니라 성이다. 생식기를 기준으로 남녀를 구분하는 사회는 역사적으로 현대 말고는 없었다는 것이다.
맺는 말
마지막으로,『H2O와 망각의 강』을 옮기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일리치의 글은 비유와 상징, 그리고 축약된 표현들이 가득하여 정확한 논지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몇 번을 거듭해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다국어 능통자로 언어적 천재라 할 만한 일리치도 그의 ‘모어’를 묻는 질문에 가장 사랑하는 언어는 라틴어, 편한 언어는 독일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어는 ‘그만의 영어’라고 할 만한 기묘한 특징이 있다. 옮긴이에게 그런 특징까지 살릴 능력은 없어서 아쉽다. 그래서 자구와 문장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최대한 우리말로 읽기 쉽게 적극적인 개입을 했다. 번역상의 문제가 있다면 모두 이런 과정에서 나왔을 것이다. 부디 이 책이 독자들에게 우리 세상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빈다.
2020년 7월 8일 수요일
안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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