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의 포베다
벨라와 빅토르는 시인이다. 1924년생으로 둘은 동갑이지만 빅토르가 벨라보다 먼저 고리키 문학대학에 입학했다. 평범한 의사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를 둔 벨라는 모스크바의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편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녀는 임시로 기술대학에 등록한 뒤, 문학대학 편입을 신청했다. 반면 당 간부를 아버지로 둔데다가 대조국전쟁 부상병이라는 이력을 가진 빅토르는 제대하자마자 문학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재학중이던 스물두 살에 그는 벌써 첫 시집 『승리자의 봄』을 펴내 큰 주목을 받았다. 그 시집에는 제3근위전차군 소속의 전차병으로 드네프르강 전투에 참여했다가 오른팔에 부상을 입고 후송된 그의 개인적 체험이 녹아있었다. 그 시절의 분위기에 맞게 애국심으로 가득한 시집이었고, 벨라도 질투인지 감동인지 모를 소감을 일기장에 남겼다. 둘은 문학대학 선후배 사이로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은 존경의 마음과 소유의 욕망이 뒤엉킨 것이라 처음부터 폭발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열기와 빛은 점차 사라지리라는 예감이 있었다.
그 예감은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오테펠оттепель, 해빙’, 그러니까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의 물결이 조금씩 밀려오면서 점점 더 또렷해지다가 삼 년 뒤 흐루쇼프 서기장이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비밀 연설을 하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대학가에서는 「지마역驛」을 썼다가 개인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고리키 문학대학에서 퇴학당한 예브게니 옙투셴코나 건축대학 졸업생이자 파스테르나크의 숭배자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 같은 젊은 시인들의 낭송회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빅토르도 그 해빙의 물결을 타고 자유의 바람을 맘껏 즐기며 온갖 기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그중에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탄 뒤, “블라디보스토크로!”라고 외치는 짓도 있었다. 그러면 누군가는 “인민의 적이 되는 게 어때?”라고 되묻기도 했다.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시베리아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소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빅토르에게는 “인민의 적이라면 악의 제국이자 파탄이 난 지상 지옥 미국으로 쫓겨나야지, 왜 아름다운 어머니의 땅 시베리아로 가겠소?”라고 능갈칠 여유까지도 생겼다. 그는 스탈린의 얼음 동상이 녹아내린 물웅덩이에서 물장난을 하는 아이와도 같았다.
그러다가 빅토르는 자신보다 더 미친 택시기사 알렉산드르를 만났다. 카자크의 피가 섞인 그는 자기 조상들처럼 시베리아를 정복할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몇 달에 걸쳐 자동차 여행을 준비했다. 그들은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수십 장의 허가증을 얻기 위해 육십여 곳이 넘는 관공서를 드나들었다. 빅토르의 몽상이 알렉산드르의 실행력을 만나 대륙 간 탄도 미사일처럼 날아올랐다. 그리하여 그들은 작가동맹에서 얻은 석 달짜리 공무 여행 증명서와 소수민족들의 언어와 민요 등을 채집할 테이프 레코더와 여행 과정을 촬영할 카메라맨, 그리고 가즈GAZ에서 전천후 주행이 가능한 차종으로 새로 생산한, 누적 거리 4262킬로미터의 하얀색 M-72 사륜구동 승용차를 구했다. 그 차에는 ‘포베다победа, 승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들은 축제 분위기 속에서 모스크바를 떠나기 위해 꽃향기가 흩날리고 깃발들이 펄럭일 노동절을 출발일로 택했다.
벨라에게 북한의 조선작가동맹에서 초청 연락이 온 건 그보다 훨씬 더 전의 일이었지만 빅토르를 찾아가 그 일에 대해 얘기한 건 1957년 4월 중순이었다. 그녀가 6월에 비행기 편으로 자신보다 먼저 극동에 가게 됐다는 사실을 안 그는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선? 작가동맹? 그런 곳에도 동맹씩이나 할 작가가 있는 모양이지?”
“그런 곳이라니? 무슨 뜻이지?”
빅토르의 말에 벨라가 반문했다.
“말한 그대로야. 며칠 전에도 한 북조선 학생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거든. 지난 전쟁에서 미국의 맥아더가 매일 B-29로 전략폭격을 감행해 그 나라는 석기시대의 폐허로 돌아갔다던데? 그 친구도 낙동강이라는 곳에서 부상을 당했다고 하더군. 표현이 재미있어. 먼저 작은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고, 그다음에 말벌들이 몰려와 독침을 쏘았다는 거지.”
벨라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작은 벌이니 말벌이니, 그게 다 무슨 소리야?”
“프로펠러 정찰기가 먼저 오고, 그다음에 폭격기가 몰려왔다는 뜻이야. 독일군도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어.”
빅토르가 설명했다.
“그게 시네. 독침을 쏘는 말벌이 하늘을 가득 뒤덮은 풍경. 그 나라에 적어도 시인이 한 명은 있는 셈이내.”
“그 친구의 꿈은 시인이 아니라 영화감독이야. 북조선의 미하일 칼라토조프를 꿈꾸고 있지.”
영화 〈학이 난다〉를 만든 미하일 칼라토조프는 소련에서는 처음으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의 흑백 화면 구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시적이었다.
“미래의 칼라토조프를 꿈꾸는 청년이 있는 나라라면 절대로 폐허일 수 없지.”
벨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벨라의 고향은 스탈린그라드였다. 지난 대조국전쟁에서 히틀러의 나치군에 맞서 스탈린그라드의 남녀가 맹렬한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지키려고 그토록 안간힘을 쓴 이유가 무조건 사수하라는 스탈린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도시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청춘과 꿈을 묻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 청춘과 꿈의 이야기가 있기에 어떤 폐허도 가뭇없이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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