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인 가구,
‘혼자’를 둘러싼 클리셰 너머
2018년 겨울, 나는 내가 태어난 지역의 사무소로 발령 났다. 통계청이 분류하는 ‘직장 때문에 혼자 사는 1인 가구’에 합류하게 된 거다.
태어난 지역이라 해도 서울에서 산 지 25년이 지났으니 모든 기반이 서울에 있어 기껍지는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은 다 혼자니 달라질 건 없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낯선 도시, 어떤 온기도 없는 6평 오피스텔에 돌아와 혼자 밥을 먹고 잠자리에 드는 일은 때때로 놀랄 만큼 생경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만 특별히 경험하는 상황이 아니다. 내 동생은 십수 년째 결혼 결심이 서지 않아 혼자 살고 있고, 내 오빠는 잦은 이직 끝에 자리 잡은 곳이 타 지역이라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 주말에만 만난다. 한 다리 건너 내 작은아버지는 암 투병 중인데도 혼자 살기를 고집해 13평 아파트를 떠나지 않고, 작은어머니는 그런 남편의 집에 정기적으로 반찬을 넣어주러 간다. 내 친구 중에도 혼자 사는 이들이 제법 있다.
주거와 생계를 함께하는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구’. 2005년 이전까지는 혼자서 주거와 생계를 책임지는 이들을 ‘단독 가구’라 했고, 이후부터는 혼자서 살림하는 이들을 ‘1인 가구’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1인 가구는 한국의 가장 흔한 주거 형태로, 보편적인 삶의 방식a way of life이다.
나는 각기 다른 조건을 가진 스무 명의 혼자 사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안녕’을 물었다. 집단으로 만나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 한 사람의 내밀한 처지와 고민에 집중했다. 성별, 나이, 주거 형태, 혼인 여부, 가정 형편, 성 정체성, 건강 상태 등이 제각각인 스무 명을 ‘한 사람’씩 만났고, 그의 생활 세계로서의 미시사微視史에 주목했다.
졸업 후 직장을 잡기 시작하거나 이미 잡은 30대, 그리고 혼인 관계의 변화에 따라 다시 1인 가구가 된 40~50대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만났다. 한국에서 1인 가구 증가율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20~30대와 70대 이상의 노인층이지만, 사회적 고립과 고독사라는 카테고리만 놓고 보면 40대 중후반부터 50대의 1인 가구 추세가 더 가파르고, 여자보다 남자 비율이 높다. 이들은 성별을 불문하고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었다고 간주될 ‘중년’임에도 여전히 취업난에 시달리며 높은 스트레스에 노출돼 있었는데, 질병이라도 있다면 차별이 더해져 사적·공적 관계 안에서 고립감과 단절감을 경험할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미디어나 기존 연구들에서는 비혼(을 결심한 이들)과 젊은 연령층이 직업이나 학업에 따라 1인 가구가 되는 것은 ‘자발적’ 선택이고, 이혼이나 가족 갈등으로 1인 가구로 흘러 들어가면 ‘비자발적’ 선택이라고 분석하는 모양이지만, 현실에서 개인들의 ‘선택’은 뒤섞여 있고 경계도 모호하다. ‘혼자’는 자발적인 혼자와 비자발적인 혼자로 딱 나뉘지도 않는다. 1인 가구로 살다 중도에 포기하고 싶어도 다시 가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이혼으로 가까스로 결혼 제도를 깨고 나와 기꺼이 1인 가구가 되는 이도 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은 통계나 데이터에 나타나지 않는다.
사회 제도라는 게 얼마나 철저히 3~4인 가구에 부합하도록 설계되어 있는지 ‘혼자들’은 혼자가 되고서야 깨닫는다. 정치인들은 평소에는 ‘1인 가구’를 의식하지 못하다가, 혹은 의식하지 않다가 선거철이 다가오면 ‘아차, 유권자!’ 한다. 때문에, 혼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제도권의 보호와 승인 바깥에 머물기 일쑤다. 제도만인가? 혼자는 혼자라서 홀가분해 보일 때는 부러운 대상이지만, 혼자라 ‘하자’ 있어 보일 때는 문제 많은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어떤 혼자들은 너무도 분명한 이유로 고통받는다.
성 소수자 권리증진 단체의 상근 활동가인 30대 선영 씨. 그녀는 방이 3개나 되는 전셋집에 살지만, 엄마는 잊을 만하면 이제 그만 ‘자취생활’을 접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다그친다.
퇴근하고 돌아와 ‘혼술’로 하루를 정리하는 게 일상의 낙인 50대 광서 씨. 광서 씨 집에 정수기 필터를 교환하러 오는 이는 매번 빠짐없이 묻는다. 왜 계속 혼자냐고. 처음에는 선선히 응하던 그도 요즘은 듣기 싫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하고 만다. 반찬가게 주인, 세탁소 주인도 친해지면 광서 씨에게 훈수를 두었다. “남자는 나이 들어 혼자 살면 보기 안 좋아요. 추레해 보여서.”
아무 때고 훅훅 치고 들어오는 언어와 시선의 폭력. 받는 처지에서는 일일이 대거리할 수 없으니 외면해보기도 하지만, 오래 참다 보면 좌절감에 휩싸여 화병을 얻을지도 모른다. 많은 경우 혼자 살며 겪어야 하는 불합리한 반응과 차별은 ‘혼자는~ 이럴 것이다’라는 틀에 박힌 생각, ‘클리셰’에서 비롯되는 것 같았다. 혼자라서 외로움을 느끼는 게 아니라, 혼자는 어떠할 것이라는 뭇사람들의 예단과 편견, 혼자라고 괴롭히는 문화 때문에 고통받는다.
2018년 초, 영국이 외로움 담당 장관을 임명했다는 뉴스가 한동안 화제였다. 국가가 자국민의 외로움에 관심을 가지고 정책으로 다루겠다고? 영국도 ‘외로움’이 골치긴 골치인 모양인데 어떻게 다루겠다는 건지, 어떤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건지 궁금했다. 1장에서는 국가가 외로움을 다루려는 이유와 내용 그리고 영국의 방식을 우리 사회에도 적용해볼 수 있을지 살펴보았다.
혼자 산다는 건 자기 안의 ‘낙타’와 모래사막을 걷는 일인지도 모른다. 낙타가 사막을 걷는 일은 자연스럽지만, 그 모습이 힘들어 보인다면 보는 사람의 상태가 반영됐기 때문이 아닐까?
2장에는 ‘혼자들’이 하는 진짜 걱정을 담았다. ‘1인 가구 = 외로움’이라는 단순한 등식은 말 그대로 클리셰일 뿐, 현실에서 1인 가구들은 훨씬 다양한 감정적·현실적 애로사항을 겪고 있었다. 1인 가구에 대한 클리셰가 고착된 사회에서는 혼자 살기 때문에 더 불안한 게 아니라, 네가 사는 방식이 잘못됐다고 겁주고 무시하고 못되게 구는 사람들 때문에 불안하다. 또 이런 사회에서 혼자들은 현재의 삶과 미래에 대해 가족과 사는 이들보다 걱정을 훨씬 많이 한다. 일례로 ‘홀로사死’에 대한 준비는 사는 동안의 ‘나’와 내가 사라진 이후의 ‘그들’을 위한 깊은 고려인 것이다.
3장에서는 혼자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취약함과 여러 패턴의 인간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혼자는 혼자 살며 생활의 각角을 잡는 사람들이다. 혼자는 혼자 있을 때의 자신의 취약함을 제법 잘 알고 있었다. 뭇사람들이 걱정해주는 외로움도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4장에는 국가가 1인 가구를 걱정하고 정책을 세우고자 한다면, 자주 바뀌는 감정외로움이 아니라 1인 가구의 ‘처지’에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이때 처지는 대개 ‘불안한 거처’인데, 저출생과 결혼 기피는 ‘집 없음’에서 출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장에서는 누구나 혼자인 시대, 누가 보호자인지 물었다. 당장 병원에 입원만 하려 해도 보호자 대동을 요구받고, 이때 보호자는 법적 가족으로 한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혼자 살며 맞닥뜨리는 문제 속에는 보호자가 절실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다면 혈연이나 혼인 관계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가족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는 반응이 더딜 뿐 이런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 흐름에 대해서 살펴본다.
나는 내가 만난 스무 명의 화자들의 이야기를 가공하지 않고 실었는데, 그건 모든 이야기가 그들의 일상에서 비롯된 ‘생활력’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엿본 그들의 생활 자체가 이 책이 던지려는 질문이다.
“한 인간의 삶이 충분히 구체적으로 묘사될 경우, 그 속에서 보편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낭만주의 문학가들의 믿음을 이어간다”는 켄지 요시노의 바람에 나도 기대본다.
자기 삶의 양식을 기꺼이 드러내 보여주신 책 안의 화자님들께 온 마음을 담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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