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997년 6월 27일 아침, 나는 캐나다 매니토바 주 위니펙의 중산층 지역에 있는 아담하고 별 특징 없는 데이비드 라이머의 집을 처음 찾아갔다. 언뜻 보기에는 뉴욕의 기자는 물론이고, 전 세계 과학자와 의사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만한 사람이 살고 있을 만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집이었다. 잘 가꾼 잔디밭에는 어린이용 자전거가 누워 있었다. 집 앞길에는 8년 된 중고 도요타 자동차가 서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 한쪽 구석에 직접 만든 나무 장식장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결혼사진과 졸업사진, 도자기 인형, 가족 여행에서 사온 기념품과 같은 일반적인 가족의 상징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풍스런 모조 커피테이블과 낡고 편안한 의자와 소파도 있었다. 그 소파에 이 집 주인인 강단 있는 청년이 청재킷에 여기저기 쓸린 작업용 부츠를 신고 앉아 있었다.
서른한 살인 데이비드 라이머는 나이보다 열 살은 젊어 보였다. 수염이라고는 턱 선을 따라 듬성듬성 난 금색 몇 가닥뿐이고, 튀어나온 광대뼈와 뾰족한 턱이 유난히 매끈하기 때문이었다. 이 밖의 다른 모습은 평범했다. 고등학교 교육까지 받은 공장 노동자, 주말이면 아버지와 함께 근처 강가에서 낚시를 하거나 뒷마당에서 부인, 아이들과 함께 바비큐 파티를 벌이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 그는 세련된 맛은 없지만, 어설프게나마 자동차 엔진을 직접 고치는 재주가 있고, 직장생활의 애환, 4만 달러가 안 되는 연봉으로 세 아이를 키우는 고충 등을 이야기하는 붙임성 있는 남자였다.
내가 위니펙을 찾은 이유는 데이비드 라이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였지만, 주된 관심사는 그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린 시절에 대해 묻자마자 그의 태도가 당장 180도 달라졌다. 얼굴 위의 미소와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장난기가 사라졌다. 작고 곧은 콧잔등 위로 미간을 찌푸렸고, 눈을 심하게 깜빡거렸으며, 결투신청을 받은 사람처럼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굵직하고 r 발음을 많이 굴리던 바리톤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달라졌고 고집스럽고 공격적인 억양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고통과 분노의 표현이었으며, 거기에는 남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 감정을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애원이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그런 감정들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데이비드는 열다섯 번째 생일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라는 대명사를 쓰지 않고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당신’이라는 대명사로 거리를 두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남의 이야기였다.
“세뇌당한 거나 다름없어요.” 그는 줄담배의 첫 불을 붙이며 이렇게 말했다. “최면으로 과거를 모두 지울 수만 있다면 뭘 줘도 아깝지 않겠어요. 일종의 고문이었거든요. 정신적인 상처에 비하면 육체적인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죠. 게다가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또 어떻고요.”
그는 30년 전, 생후 8개월에 포경수술을 받다 잘못 돼서 성기를 통째로 잃은 사건을 언급했다.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벌어지자 그의 부모는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홉킨스병원의 유명한 성性 전문가에게 아들을 데리고 갔고, 성전환수술을 받으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결과 데이비드는 젖먹이일 때 거세와 그 밖의 생식기 수술을 받았고, 이후 12년 동안 여자라는 인식이 자리 잡도록 사회적, 정신적 교육과 함께 호르몬 치료까지 받았다. 그의 사례는 전무후무한 성공담으로 의학계에 보고됐고, 그는 현대 의학사상 가장 유명한 환자가 되었다(실명이 공개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의학계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그가 정상적으로 태어나서 영아기에 처음으로 성전환수술을 받은 남자아이였을 뿐 아니라, 통계학적으로 확률이 희박한 사건이라 특별한 의미가 부여됐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란성쌍둥이였던 것이다. 유일한 형제였던 그의 남동생은 이 실험의 맞춤 대조군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페니스와 고환에 아무 문제없이 남자로 성장한 복제인간이었던 셈이다. 의학계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이들 쌍둥이는 남자와 여자로 별 탈 없이 자랐고, 이는 성이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결정된다는 확고한 증거가 되었다. 의학 및 사회학 교재에 이들의 사례를 싣는 개정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 선례에 따라 생식기에 손상이 있거나 그것이 비정상적인 신생아는 성전환수술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치료법이 되었다. 게다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생물학적이 아니라 문화적인 데서 비롯된다는 근거로 이 사례가 제시되면서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 이른바 ‘쌍둥이케이스’라고 불린 이 실험은 산파 역할을 했던 임상심리학자 존 머니 박사의 40년 연구사상 최대 업적이었고, 덕분에 그는 1997년에 “금세기 최고의 성 전문가”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6월의 그날, 내 앞에 앉아 있었던 젊은 남자의 존재 자체가 쌍둥이케이스의 실패를 입증하는 증거였다. 그해 봄, 하와이대학교의 생물학자인 밀턴 다이아몬드 박사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빅토리아의 정신과의사인 키스 시그먼드슨 박사는 의학 전문지 <소아청소년 의학 아카이브>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데이비드가 애초부터 강제로 부여된 여성이라는 성별에 어떤 식으로 반발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열네 살 때 유전자와 염색체가 정한 원래의 성으로 되돌아갔는지 폭로했다. 이 논문으로 인해 전 세계 의학계는 충격에 휩싸였고, 영아기 성전환수술을 둘러싸고 열띤 공방이 펼쳐졌다(이 수술은 일반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애초에 쌍둥이케이스가 보고된 방식과 실질적인 결과를 밝히는 추적 조사가 거의 20년 만에 실시된 이유와 추적 조사가 머니 박사나 존스홉킨스병원이 아니라 외부인에 의해 실시된 이유를 놓고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 정체성의 신비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났을 뿐 아니라, 저명한 성 전문가 사이에서 30년 동안 유지되어온 라이벌 관계가 밝혀졌다. 의학사상 가장 심란한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사례가 그런 식으로 폭로된 것도 두 사람의 신랄한 라이벌 관계 때문이었고, 어쩌면 애초에 실험이 감행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이 사건이 의학계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 전문가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시끌벅적한 파문이었을지 모르지만, 데이비드 라이머에게는 오롯이 개인적인 참사였다. 그는 1997년 여름에 (얼굴을 가리고 음성을 변조한 채) 두 군데의 텔레비전 인터뷰에 응한 것 말고는 어떤 기자에게도 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게 밝힌 적이 없다. <롤링 스톤>에 이 사건을 소개하고 싶다는 내 제안도 그의 신원이 드러날 수 있는 결정적인 부분들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받아들였다. 그의 요구대로 나는 기사에서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자랐으며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밝히지 않았고, 부모님의 성함도 론과 재닛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일란성쌍둥이로 태어난 남동생도 브라이언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 위니펙에서 그를 담당했던 의사들의 이름은 이니셜로만 표기했다. 데이비드를 지칭할 때도 존과 조앤을 번갈아 썼다(다이아몬드와 시그먼드슨이 논문에서 그에게 강요된 섬뜩한 이중생활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가명이다). 심지어 데이비드의 소재를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내는 단서마저 공개하지 않으려고, 그가 포경수술을 받던 날 아침 역사상 최악의 폭설이 몰아쳐서 위니펙이 마비됐었다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았다. 4월 말에 엄청난 폭설이라니, 참상의 전조로 난데없이 불가사의한 자연현상이 벌어지는 셰익스피어나 그리스의 비극과 섬뜩하게 닮은 대목이다.
내가 쓴 기사는 <롤링 스톤> 1997년 12월 호에 실렸다. 거의 2만 단어에 달했고 지면의 한계와 잡지 특유의 마감시한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주도면밀한 기사였다. 그런데 기사를 게재하고 보니 데이비드의 인생과, 그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과학계의 음모가 워낙 복잡하고 과학적으로 의미심장하며 드라마틱해서 제대로 소개하려면 책으로 출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데이비드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고, 나에게 그 책의 집필을 맡기고 싶어 했다. 이번에는 내가 집필을 맡는 대신 한 가지 중대한 조건을 달았다. 존/조앤이라는 가면을 벗어달라는 조건이었다.
‘북미 중서부의 어느 지방’이라는 애매한 장소를 배경으로 주인공, 가족, 친구, 의사 등등이 모두 가명으로 등장하는 책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들과 더불어 어떤 곳에서 살았는지 알아야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유전이냐 환경이냐, 생물학이냐 양육이냐의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책을 쓰려면 데이비드가 성장한 사회문화적인 환경을 자세하게 소개해야만 했다. 데이비드의 요구대로 익명을 고집하면 이 이야기 특유의 감동적인 여운이 대거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작가로서의 욕심도 있었다.
가명의 원칙을 따른다면 그가 열네 살 때 남자로 되돌아가는 힘겨운 여정을 시작하면서 원래 이름인 브루스 대신에 데이비드를 선택한 이유부터 조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데이비드를 선택한 이유는 그 이름이 견실하고 남자답게 단순명쾌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다, 14년 동안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고 작당했던 배후세력과 싸워서 거둔 승리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뜻밖의 승리였기에 그는 성경에서 천하무적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다윗의 영문 표기가 데이비드다―옮긴이)을 좇아 자신의 이름을 결정했다. 이 대목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부분에서 익명을 고집하면 그의 영웅담에 담긴 전반적인 의미는 물론, 데이비드 자신이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소개할 수 없었다.
데이비드는 1993년 초에 다이아몬드와 시그먼드슨의 논문을 위해 난생 처음으로 인터뷰를 허락하고, 계속해서 <롤링 스톤> 기사를 위해 나와 인터뷰를 하면서 수치심과 비밀스런 생활의 그늘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존/조앤이라는 가면을 벗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꺼냈을 때 그는 이미 긴 여정을 거친 상황이었다. 그는 아내, 부모님, 남동생과 의논하고 단 하룻밤 고민한 끝에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데이비드는 내가 그의 과거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모든 문을 활짝 열었고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주었다. 12개월에 걸쳐 100여 시간에 달하는 인터뷰를 허락했고, 개인적인 법률서류와 상담기록, 아동상담소의 보고서, 아이큐 검사 결과, 진찰 기록, 정신과 정밀 검사 등 남다른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쌓인 모든 서류를 내게 공개한다는 동의서에 서명했다. 어렸을 적 선생님과 학교 친구들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는데, 이 탐문 작업은 그가 졸업앨범도 처분해버리고 성姓을 기억하는 학교 친구도 거의 없고 여자로 살았던 자신을 기억하는 모든 이를 피해가며 지난 15년 동안 지냈기 때문에 무척 힘이 들었다.
데이비드의 도움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부분이 있다면 아버지를 비롯한 라이머 가족들과의 인터뷰였다. 그들은 괴로운 마음에 20여 년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이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입을 닫고 지냈던 것이다. 존/조앤이라는 가명 아래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마침내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남다르게 솔직했던 라이머 가족 덕분이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남녀의 삶을 모두 겪었던 데이비드 라이머의 경험담이지만, 결국에는 실패로 돌아간 사상초유의 성 심리 실험에 쌍둥이 아들 하나의 미래를 맡길 수밖에 없었던 20대 초반 젊은 부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모님은 정말 미안해하세요. 모든 게 두 분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내가 위니펙을 처음 방문했을 때 데이비드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부모님은 나를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그렇게 하신 것 아니겠어요? 너무 막막하다보면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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