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961년 여름, 허버트 리는 지역의 잣대, 그러니까 지역 흑인사회의 잣대로 볼 때 부자였다. 미국 최남단 동부지역에서도 가장 깊은 내륙 지방에서 30년 동안이나 농사를 지은 리는 작은 낙농장과 살 만한 집을 갖고 아홉 자녀를 두었으며 한두 가지의 전망도 쭉 뻗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 이글거리던 어느 여름날, 안경을 끼고 가슴받이가 달린 작업복 바지를 입은 흑인 청년이 현관으로 찾아와 투표권에 관해서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을 때, 리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뉴욕에서 왔다는 그 청년을 태우고 에이밋 카운티를 돌아다녀 주겠다고 했다. 친구들과 가족이 보기에, 리의 결정은 죽여 달라고 비는 꼴로 보였다.
미시시피에서 흑인들은 투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여기 검둥이들은 투표할 필요가 없소” 하고 어떤 경관이 말했다. “투표해서도 안 되고.” 흑인이 백인을 수에서 훨씬 압도하는 모든 카운티에서 흑인 유권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미시시피 주가 인두세, 교양 시험을 비롯한 악법 조항을 교묘하게 짜 맞추어 놓은 뒤 70년도 더 지난 때였다. 미시시피가 그렇게 술수를 쓰고 나서 10년 안에 흑인 유권자 수가 19만 명에서 단 2천 명으로 급감했다. 그 뒤로 흑인이 유권자 등록을 하고자 하면 그는 어김없이 테러를 당했다. 법원의 유권자 등록 담당자를 만난 뒤 그의 이름은 신문에 실렸다. 곧이어 그 ‘건방진 검둥이’는 두들겨 맞고 화형당하고 들판에 버려지거나, 한밤중에 오두막집 안까지 총알이 날아 들어와 덜덜 떨어야 했다. 허버트 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것들과 정면으로 맞서고자 마음먹었을 때 자신이 목숨을 걸고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1961년 9월 25일 아침, 리는 미시시피 주 리버티라는 작은 도시를 향해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을 덜컹덜컹 달리고 있었다. 몰고 있는 낡은 픽업트럭의 후면거울 속에 신형 트럭이 보였다. 그는 조면기繰綿機가 있는 곳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다른 트럭도 타이어로 자갈을 튀기며 옆에 차를 세웠다. 크게 튀어나온 귀에 반짝거리며 여름 볕에 붉어진 넓은 이마를 지닌 건장한 백인, 그 운전자를 리는 알아보았다. ‘허스트 씨’는 어릴 적부터 함께 뛰어놀던 평생지기이다. 두 사람의 농장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허스트 씨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이윽고 리는 이웃남자가 손에 쥐고 있는 38구경 권총을 보았다.
픽업트럭 창문을 통해 리는 소리 질렀다. “총을 내려놓기 전에는 당신과 얘기하지 않을 것이오!” 허스트는 아무 말 없이 트럭을 박차고 나왔다. 리는 정신없이 좌석을 기어 조수석 문으로 빠져나왔다. 허스트가 차를 돌아 와서 총을 내저었다.
“오늘 아침엔 당신이랑 놀자는 게 아니야!” 거구의 백인이 말했다. 리가 두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허스트는 리의 왼쪽 관자놀이에 총을 쏘았다. 리는 자갈밭에 그대로 엎어졌다. 신형 픽업트럭은 재빨리 달아났다. 주차장에 정적이 흘렀다. 구경꾼들이 에워싼 시신은 핏물 웅덩이에서 이글거리는 햇빛을 받으며 몇 시간 동안 방치되었다. 흑인들은 시신을 옮기는 걸 두려워했고 백인들은 손대지 않으려 했다.
1961년에 미시시피에서 얼마나 많은 흑인이 살해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매그놀리아 주Magnolia State(미시시피 주의 애칭. 매그놀리아는 목련으로 미시시피 주의 꽃이다―옮긴이)가 흑인을 살해한 백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검시관 심문에서, 허스트는 허버트 리가 타이어 레버를 휘둘렀다고 이야기를 꾸며 냈다. 우발적으로 총알이 발사되었다고 허스트는 말했다. 떠밀려 증인으로 나선 사람은 타이어 레버를 두 눈으로 보았고, 그것은 바로 허버트 리의 시신 밑에서 ‘발견된’ 타이어 레버라고 진술했다. 주의원인 E. H. 허스트는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그러나 허버트 리를 죽인 총알은 그 여름 한 철에 폭죽처럼 잇달아 터진 총격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여느 여름과는 완전히 다르고 이상주의가 넘쳤으며, 몹시도 잔인하고 무척 용감했던 그 여름은 미국에서 자유를 새롭게 정의했다.
1 목화밭을 휘감고 흐르는 미시시피 강
꿈은 가까이 하기에 그다지 안전한 게 아니야, 베이어드. 나도 알아.
나도 한때는 꿈이 있었거든. 살짝만 건드려도 격발되는 권총 같은 거지.
꿈이 오랫동안 생생하게 살아 있다면 누군가는 다치게 돼.
하지만 좋은 꿈이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 윌리엄 포크너, 〈버베나 향기An Odor of Verbena>
1963년 가을, 미국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백색/견딜수 없는 백색이라는 존재unbearable whiteness of being(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를 가리킴―옮긴이)이 넘쳐났다. 대담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국가는 전례 없는 번영의 물결에 올라탔다. 미국 경제의 엔진은 최고의 출력으로 가동되고 있었다. 젊고 잘생긴 대통령(존 F. 케네디)은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았다. 적은 명확했다. 버섯구름, 유엔 연단에서 구둣발을 쾅쾅 구르던 머리 벗겨진 불량배(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옮긴이), 억제되어야 할 전 세계를 향한 위협이 그것이었다. 전 세계 승용차의 3분의 2가 굴러다니고 전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한 나라, 미국은 그런 나라였다. 크고 육중한 자동차는 기다란 후미 안정판 뒤에 눈부신 미등을 달았고, 널찍한 보닛 아래 굉음을 내는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다.
‘미러클 휩Miracle Whip(마요네즈와 비슷한 샐러드 드레싱 제품 이름―옮긴이)과 원더 브레드Wonder Bread(상점에서 파는 빵 제품 이름―옮긴이)가 집집마다 주방에 자리 잡았다. 말보로와 켄트 담배는 TV 광고를 장식했고, 전체 성인의 절반이 하루에 담배 한 갑을 피웠다. 아직은 대형 쇼핑몰이 있는 도시가 한두 곳 뿐이었다. 99퍼센트의 가정, 흑인이든 백인이든 거의 모든 집에 TV가 있었지만 채널은 일곱 개밖에 없었다. TV에는 서부의 ‘광활한 황야,’ 의학 드라마, 웃기는 시트콤이 방영되었다. 가장 비중이 적은 조연을 제외하면 누구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프로그램은 하나도 없었다. 미국 전역의 주의사당과 시청에서 소수를 제외한 모든 정치인은 그들을 뽑는 투표용지만큼 하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 하얀 세상은 앞으로 얼룩이 진다.
그해 가을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인 자문가들이 보내 온 실망스런 소식으로 케네디 대통령은 베트남 개입을 끝마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대학생들은 기타 줄을 튕기며 포크송을 불렀고, 그 동생들은 끈적끈적한 팝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저 멀리 영국에서는 부스스한 머리의 록밴드가 열광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머지않아 대서양을 건너와 낡은 관습을 몰아낼 터였다. 미국 남부 곳곳에서 흑인들이 경찰견과 소방호스에 맞서 행진하며 정당한 처우와 인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정표는 1963년 가을, 미국의 가장 가난한 주에서 세워졌다. 댈러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케네디 암살을 가리킴―옮긴이)이 모든 걸 바꾸기 시작하기 직전 어느 11월의 주말에, 가난에 찌든 수천 명의 시민들은 오래도록 미뤄 온 민주주의에 대한 가르침을 미국에 던져 주었다.
미시시피 주 공식 후보자 명부는 공화당과 민주당 주지사 후보들을 등재했다. 그러나 여전히 링컨이 GOPGrand Old Party(공화당의 별칭―옮긴이)를 이끌던 시대처럼 투표하는 남부의 한 주에서 선거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민주당 폴 B. 존슨(1916~1985)이 그의 아버지가 올랐던 계단을 따라서 차기 주지사가 될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백인 유권자들은 부지사였던 “폴이 지난해 가을 당당하게” 흑인의 주립대학 입학에 맞섰다고 칭찬했다(1962년 9월 30일, 흑인 제임스 메러디스는 120명이 넘는 연방 보안관의 보호를 받으며 인종분리주의 미시시피대학에 등록하러 왔다. 이날 밤 인종주의자들이 유혈사태를 벌인 끝에 메러디스는 이튿날 학생으로 등록했고 1963년 8월에 이 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흑인이 된다―옮긴이). 백인 유권자들은 존슨이 미시시피에서 가장 미움 받는 정치인인 잭 케네디와 바비 케네디(당시 대통령 존 F. 케네디와 법무장관인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를 비꼬는 걸 보며 좋아했다. 얘기인즉슨 두 정치인의 연방군이 ‘올 미스Ole Miss'(미시시피대학의 별칭)에서 인종통합 소요 사태를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백인 유권자들은 NAC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옮긴이)가 ‘검둥이, 악어, 유인원, 흑인, 주머니쥐’의 약자라고 지껄이는 존슨의 농담을 들으며 낄낄댔다. 그리고 11월 5일, 백인 유권자들은 '당당한 폴'을 낙승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그 화요일, 미시시피에 백인 유권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멕시코 만의 연노랑 모래톱부터 델타Delta(미시시피 강과 야주 강 사이 미시시피 북서부 지역―옮긴이)의 목화밭까지, 모의 선거, 흑인들의 선거, ‘자유선거Freedom Election'를 치른 것이다. 장엄한 이름을 지닌 조그만 목조 교회에서, 전체 신도가 신도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복음성가대가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남자들과 여자들은 ‘자유투표용지Freedom Ballot'를 나무상자 안에 넣었다. 옥수수 빵 내음이 향긋한 카페에서, 앙상한 손들이 ‘에어런 헨리-주지사’와 ‘에드윈 킹 목사-부지사’ 옆에 X 표시를 했다. 삐걱삐걱 흔들리는 포치에서, 멜빵 달린 작업복 바지를 입은 흑인 남자들과 체크무늬 옷을 입은 흑인 여자들이 예일대학과 스탠퍼드대학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프리덤 서머’의 이 서곡을 위해 선발된 학생들이었다.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쑥한 대학생 손님들을 “선생님” 하고 깍듯하게 부르는, 평생 물납 소작인으로 살아온 그들은 투표가 언제까지나 ‘백인의 일’로 남을 필요가 없음을 깨우쳤다. 미시시피의 붉은 흙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틔우려는 수천 명이 미용실과 식료품점, 이발소와 내기 당구장에서 ‘자유투표’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은 너무도 두려워서 투표처럼 몹시 위험한 행동을 감행할 수 없었다.
그 주 내내, 공포로 인해 미시시피의 심장은 박동이 빨라졌다. 주 테두리를 훨씬 넘어서 무언가가 결의되고 있었다. ‘닫힌 사회’에서, 인종분리는 델타의 기름진 토양만큼이나 깊은 토대였다. 흑인과 백인이 합의를 본 적은 거의 없지만, 투표가 권력을 평등하게 만든다는 걸 양쪽 모두 알고 있었다. 남부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흑인들의 유권자 등록이 시작되어, 조지아에서 44퍼센트, 텍사스에서 58퍼센트, 테네시에서 69퍼센트가 등록했다. 하지만 미시시피에서는 6.7퍼센트밖에 투표할 수 없었다. ‘2등 시민’으로 남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권력을 쥘 수 없다는 점을 흑인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백인들은 ‘우리 유색인’이 집단적으로 유권자 등록을 한다면, 혹은 더 심한 경우에 “망할 NAACP(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옮긴이) 공산주의자 분쟁꾼들”이 흑인들을 법원 등록소로 이끌고 간다면,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들었던 모든 악몽이 되살아날 것임을 알았다. 재건시대Recostruction(1865~1877, 미연방에서 탈퇴했던 남부 11개주를 연방에 재편입시키던 시기)에, “검둥이, 악어, 유인원, 흑인, 주머니쥐”가 미시시피 주를 운영하면서, 백인 권력과 그 밑바탕이었던 모든 독자적인 인종분리 제도를 일소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후회를 모르는 KKK단이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도 지니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1963년 미시시피에서는 누구도 이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 가을 주말의 잔학성은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치듯이 갑작스럽고 자연스럽고 직설적이었다.
할로윈 밤, 예일대학 학생이 주유를 하기 위해 포트 깁슨에서 멈췄다. 백 년 전, 북군은 바로 이 작은 마을을 거쳐 미시시피로 들어왔다. 멋진 저택들을 보고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 “너무 아름다워서 불을 지를 수 없다”고 한 곳이다. 지역 주민들의 눈에 이제 또 다른 침략이 시작된 것이었다. ‘빌어먹을 양키’(미국 남부에서 흔히 적대감을 담아 북부 사람을 일컫는 말―옮긴이)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흑인 남자나 여자가 타고 다니는 차를 탄 금발의 백인 이방인이었으니까. 백인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명령한 뒤, 사내 넷이 그를 쳐서 길바닥에 쓰러뜨렸다. 뒤이어 그를 에워싸더니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으며 폭행했다. 몇 사람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학생이 겨우 차에 올라타자, 괴한들은 깜깜한 도로를 몇 킬로미터나 추격했다. 이틀 뒤 그런 이방인들이 또 눈에 띄었다. 이방인은 남자들뿐이었다.
따스한 토요일 아침, 자유선거 활동가 두 사람이 선거 전단지를 배포하기 위해 나체스를 벗어나 북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반짝거리는 초록색 쉐비 임팔라 한 대가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운전자는 후면거울로 백인 두 명의 얼굴을 보았다. 곧 유턴을 했지만 쉐비도 유턴을 하더니 범퍼를 들이받았다. 여러 농장과 밭을 지나 남쪽으로 두 자동차는 속도를 높였다. 쉐비가 두 번 옆으로 붙었지만, 고등학교 때 스피드 경주를 했던 운전자는 두 번 다 굉음을 내며 앞섰다. 쉐비는 꽁무니에 바짝 붙었다. 엔진이 신음을 하고 자갈이 튀었다. 두 자동차는 곧 시속 160킬로미터가 넘었다. 결국 쉐비가 나란히 붙더니 이방인들의 차를 도랑으로 밀어냈다. 이번에 그들은 총을 갖고 있었다. 차 밖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들은 운전자는 멈칫했다가 액셀을 힘껏 밟았다. 자동차는 요동을 치며 다시 도로로 진입했다. 총탄이 뒷유리를 박살냈다. 또 다른 총탄이 차체 옆쪽에 구멍을 냈다. 세 번째 총탄이 뒷바퀴를 스치고 지나갔다. 적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며 마주 오는 차량을 요리조리 피해 달리는 동안 타이어에 바람이 빠지면서 속도가 줄었고, 운전자는 결국 샛길로 숨어들었다. 쉐비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그 주 내내 미시시피 전역에서 ‘선동가들’은 비슷한 환대를 받았다. 미시시피 북쪽 테이트 카운티에서는 여러 발의 총알이 자유선거 활동가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남쪽 빌럭시에서는 군중들이 돌을 던져 자유선거 집회를 해산시켰다. 델타로 가는 관문인 야주 시티에서는 경찰이 또 다른 집회를 봉쇄했다. 주말까지 선거 활동가 70명이 체포되었다. 치안을 어지럽혔다는 것부터 진흙이 붙어 번호판이 보이지 않는 차량을 운전했다는 것까지, 혐의는 다양했다. 폭력을 당하고 당장 떠나라는 말을 들으면서, 학생들은 1963년 미시시피에서 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맛보았다.
테러는 거의 성공적이었다. 조직가들은 처음에 20만 명의 흑인이 자유투표에 참여하리라 기대했다. 경찰이 압수한 투표용지를 셈에 넣지 않으면, 82,000명이 투표했을 뿐이었다. 조직가들이 기대했던 건 재건시대 법률에 구속을 받는 모의 투표를 이용하여 공식 선거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 도전이 성공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자유투표는 그 한 장 한 장이 미시시피 변화의 신호였다. 굽신거리고 넙죽거리던 오랜 세월, ‘찰리 씨’의 비위를 맞추던 오랜 세월, “알겠슴다”와 “아님다”를 연발하던 오랜 세월은 끝을 맺었다. 하지만 자유선거는 남북전쟁처럼, 혹은 여전히 미시시피에서 하던 표현대로라면 ‘남부 독립전쟁’처럼 케케묵은 불씨를 다시 일으켰다. 1964년이 되면, 미시시피는 인종차별의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 길고도 광포한 그해는 조직가들이 ‘미시시피 여름 프로젝트’라고 일컬은 것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미국은 그것을 ‘프리덤 서머’라고 일컬었고, 그것은 미국의 높은 포부와 대조되는 인종적 증오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미시시피가 새 주지사를 선출하기 두 주 전, 25만 명이 워싱턴 D.C.에 운집하여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그의 꿈을 피력하는 연설을 들었다. 수많은 군중이 링컨기념관 주변에 모였을 때, 여론조사원들이 전국에 파견되어 있었다. 남부 전역에서 충격적인 폭력이 저질러진 여름 동안 진행된, 인종에 관한 해리스 여론조사는 킹 목사의 꿈이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지 알려 준다. 미국 전역에서 흑인의 소득은 백인 소득의 절반(56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이 극명한 소득 격차와 함께 백인의 상당수는 흑인을 싫어하고 불신하며, 흑인과 가까이 지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떤 이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색인이 된다는 건 역겹고 비참한 삶이죠.” 또 어떤 이들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샌디에이고의 한 여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린 검둥이들을 미워하지 않아요. 다만 우리 가까이에 있는 걸 원하지 않을 뿐이죠. 그래서 우리는 시카고에서 여기까지 이사를 온 거예요.”
킹이 바리톤 목소리로 “지난날 노예였던 이들의 아들들과 지난날 노예소유주였던 이들의 아들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을 그날”을 꿈꾸고 있다고 말할 때, 백인의 71퍼센트는 “흑인은 냄새가 다르다”고 말했다. 언젠가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 받게” 되리라는 킹의 희망에 군중들이 환호할 때, 여론조사 참가자의 절반은 “흑인은 날 때부터 지능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킹이 점점 감정이 고조되어 “흑인과 백인, 유대인과 비유대인, 개신교와 구교를 떠나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손에 손을 잡을 수 있는” 날을 꿈꾸고 있다고 말할 때, 여론조사 참가자의 69퍼센트는 “흑인들은 도덕관념이 느슨하다”고 답했고, 네 명 가운데 세 명이 “흑인은 꿈이 별로 없다”고 답변했으며, 90퍼센트는 딸이 흑인과 사귀는 걸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흑인들은 성욕이 넘쳐요” 하고 네바다 주에 사는 남자가 말했다. “난잡하죠.”
“흑인들을 만지고 싶지 않아요” 하고 펜실베이니아의 여자가 고백했다. “구역질이 나거든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편견을 드러낸 여론조사는 북부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는 부분도 드러냈다. 바로 인종차별은 남부에서 횡행했다는 사실이다. 남부에서는 73퍼센트가 지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고, 88퍼센트는 “냄새가 다르다”고 여겼으며, 89퍼센트가 “도덕관념이 느슨하다”고 생각했다. 이 수치는 남부의 전반적인 상황이었지만, 편견이 가장 심각한 곳이 어디인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메드거 에버스Medgar Evers(1925~1963, 미시시피 출신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운동가, NAACP 지부 대표)가 그 6월에 미시시피에서 총탄에 피살되었을 때, NAACP 대표는 놀란 척조차 하지 않았다. “비인도적 행위와 살인, 폭력, 인종차별적 증오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록을 보유한 주가 바로 미시시피였다. 미시시피는 미국 모든 주 가운데 꼴찌다” 하고 로이 윌킨스(Roy Wilkins, 1901~1981, 민권운동가, NAACP 대표)는 말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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