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두 예루살렘
열병
이 책은 예루살렘이라는 실제 도시와 그 도시가 던져 주는 묵시종말론적 환상 간의 치명적 순환 고리에 관한 책이다. 다시 말해, 두 예루살렘에 관한 책이다. 땅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 그리고 현세의 예루살렘과 상상 속 예루살렘. 그러한 이중성은 기독교의 예루살렘과 유대교의 예루살렘, 유럽의 예루살렘과 이슬람의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그리고 언덕 위 도시라는 실제 지리상의 예루살렘과 메시아 국가라는 이상으로서의 예루살렘 간 긴장을 통해 한층 두드러진다. 메시아 국가는 존 윈스럽 이래 예루살렘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벌어지는 모든 분쟁의 근원은 과거 속에 깊숙이 묻혀 있으며, 이 책에서 그 뿌리를 파헤쳐 보고자 한다. 결국 현실 속 장소로 귀결되는 이 이야기는 바로 사해와 지중해 사이 3분의 1 지점쯤의 능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순례자들의 과열된 꿈에 얼마나 끝없이 시달려 왔는가에 관한 것이다. 가슴에는 열정을 품고 머릿속으로는 세상의 종말을 그리며 양손에는 무기를 든 그 순례자들은 수 세대에 걸쳐 전설 속 관문들을 두드려 왔다.
앞서 나열한 각 쌍의 두 예루살렘은 마치 서로 마찰해 불꽃을 일으켜 불을 지피는 부싯돌과 같은 형국이다. 각 민족과 국가를 실제 전쟁의 불길이 위협하고 있으며, 이들 전쟁은 신성한 도시에서 촉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성전聖戰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느님의 불은 처음에는 불붙은 떨기나무로, 그 다음에는 선택된 자들의 머리 위를 떠도는 불길로 나타났다. 예루살렘은 인간의 가슴 속에도 불을 지펴, 서구 문명의 DNA 속에 열성을 심었고 참된 신앙이라는 전염성 강한 열병을 일으켰다. 쉽사리 낫지 않는 이 열병은 감염인 동시에, 불붙은 마음이 으레 그렇듯 영감이기도 하다. 그리고 열병이라는 말은 치유라는 반대 의미까지도 저절로 연상시킨다. 예루살렘에 대한 집착에서 탄생한 영감은 곧 종교적·문화적 은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시편〉에는 ‘구원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적혀 있는데, ‘구원’이라는 단어의 일차적 의미는 ‘건강의 회복’이나, 열병은 황홀, 초월, 도취 같은 이미지가 연상된다. 야훼는 선지자 즈가리야에게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나는 예루살렘을 술잔으로 삼아 인근 뭇 민족을 취하게 하리라.”
지상의 예루살렘이라는 화면 위에 천년왕국에 대한 강렬한 환상을 투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가 완성되리라는 신념이 바로 예루살렘 열병이다. 이러한 역사의 결말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오거나 재림하거나 혹은 아마겟돈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천사들이 사탄의 무리(그리스도교인들이 대개 유대인, 무슬림, 그 밖의 ‘이교도’를 지칭하는 표현)를 무찌르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종교적 색채는 털어냈지만, 예루살렘은 신세계 순례자들이나 유럽 코뮌communard주의자나 공산communist주의자들이 말하는 사회적 이상향을 통해 천년왕국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암시적인 배경으로 머무르게 된다. 결국 20세기와 21세기 동안 계속된 악惡과의 전쟁 중심에 놀랍게도 예루살렘이 있었던 것이다. 냉전 및 테러와의 전쟁 모두의 구심점이었던 바로 그 예루살렘 말이다. 본래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고대 도시였던 예루살렘은 서구 역사의 자극磁極이 되어, 오늘날의 세계를 조성하는 데 그 어떤 도시보다도 큰 역할을 했다.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그렇게 초월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는 아테네나 로마, 파리도 아니고, 모스크바나 런던도 아니며, 이스탄불이나 다마스쿠스, 카이로도 아니고, 엘도라도나 이민자들이 꿈에 그리는 뉴욕도 아닌, 오직 예루살렘뿐이다.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땅 위에 재현된 천국인 것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그 천국에 지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수 세기에 걸쳐 환상 속의 그 도시가 현실 속 도시를 만들어 내고, 그 현실 속 도시는 다시 환상 속 도시를 만들어 왔다. 예루살렘을 연구해 온 시드라 드코번 에즈라히는 “예루살렘의 은유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그 지정학적 면적은 줄어든다. 그리고 그 신성한 도시의 경계가 확장될수록, 그 행정적 도시의 경계는 폐쇄적으로 변한다”고 표현했다. 그러니 결론은 전쟁이다. 지난 2000년간, 예루살렘의 지배 세력은 열한 차례나 거듭 전복됐고, 거의 모든 경우 극단적 폭력을 수반했으며 그 전면에는 늘 종교가 있었다.6 이 책은 그러한 전쟁 이야기, 즉 신성한 땅이 전쟁터가 되는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심지어 예루살렘과 직접 관련이 없는 전쟁에서조차,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는 멀리서 들려오는 어느 전송가戰頌歌 구절처럼 ‘무시무시하고 빠른 칼을 들고 (…) 오시는 주님의 영광’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은유적 경계는 그것을 끊임없이 확장시키는 행정상의 경계와 갈등하는 가운데 그 둘 사이의 구분을 온 세상 끝까지 허물어 버린다.
예루살렘 열병에 걸리는 이들은 종교 집단들인데, 예루살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세 일신교가 이 열병에 걸린 것은 확실하다. 주로 기독교의 서사이기는 하나, 한때 유대 민족 역시 그 서사에 장단을 맞췄고, 무슬림도 관심을 보였으며, 세속 문화마저 무의식중에 그 뒤를 좇았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분쟁 당사자들 역시 그러한 기독교의 서사를 구체화시키는 데 동참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병소病巢인 동시에 그 열병에 대한 해독제이며, 종교 역시 문제의 근원인 동시에 그것을 극복할 방법이다. 종교가 정맥을 끊는 칼인 동시에 그 칼을 막아내는 힘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을 통해 알 수 있다. 각각의 전통은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 역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바로 거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바빌로니아인들에 이어 로마인들의 손에 성전이 파괴된 뒤로 예루살렘이 유대인들에게 보여준 것은, 하느님이 부재不在를 통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우선, 성서 시대에 성전을 재건하고도 그 안의 지성소至聖所는 일부러 빈 공간으로 남겨 두었다. 비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신화화한 것이다. 그 후 로마의 손에 파괴된 뒤 재건이 여의치 않자, 유대인들은 항상 ‘내년’이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토라Torah》를 연구하거나 모세 율법을 지키며 상상으로 성소를 빚었다. 수 세기에 걸쳐 지속된 디아스포라Diaspora 가운데서도 공동체적 결속을 유지하고, 유랑과 억압 속에서도 살아남아 결국 시온주의Zionism까지 탄생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예루살렘에 대한 유대인들의 환상이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에서 가장 확실한 사실은 예수는 가고 없으며, 성찬 중시주의Sacramentalism를 투사할 때에만 예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열정에 도취된 상태라면 지금도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을 꿇고 바로 ‘당신’을 위해 피땀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예루살렘은 ‘당신’도 그곳에서 무릎 꿇을 수 있는, 경건한 신앙의 중심지로 남게 된다. 기독교의 궁극적 미래관이 담긴 〈요한묵시록〉은 구세주가 고난을 받았던 도시에서 주로 펼쳐지며, 구원 행위라 할지라도 예수의 예루살렘 재림은 결국 파멸을 뜻한다.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은 무함마드가 죽은 뒤 5년이 지난 637년이었다. 주목할 부분은 바로 그 신속성이다. 아라비아 반도를 점령한 선지자의 군대는 하느님은 한 분이라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일찍이 이슬람권을 결집시켰으며, 그들이 맹렬히 추종한 대상 역시 예루살렘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사막에서 살던 무슬림들이 그 열기를 몰고 예루살렘으로 왔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초월적 의미를 본능적으로 직감한 무슬림들은 갈망할 대상을 처음으로 찾았고, 진정한 의미의 첫 군사 작전을 펼쳤다. 이슬람교에서는 신이 가까이 있음을 오직 암송으로만 깨달을 수 있다. 무슬림들이 매우 난해하고도 암시적인 《코란》을 읊조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헌데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는 예루살렘의 돌에 찍힌 선지자의 발자국은 암송으로만 신을 모셨던 이들에게 특별히 성스러운 상징으로 다가온 것이다. 무슬림들에게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알 쿠드스Quds, ‘성소’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세 일신교는 과거가 결코 단순한 과거에 머물지 않고 언제고 미래 속으로 호시탐탐 끼어들려는 찰나의 영역으로 연속된 현재에 둥지를 틀고 있는 셈이다. 마치 공간 영역이 실제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만 남긴 채 영적으로 승화되며 계속 증발되기라도 하듯, 일직선상의 시간은 예루살렘 안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좀 더 광범위한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시간의 중절中絶이 의미하는 바는 심리적 상처와 신학적 통찰이 그저 전승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에 의해 여기로 전달되어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처, 의혹, 적대감(그리고 광신에 이르기까지)의 초월적 발현은 오직 그 인간적 근원을 이해함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출발해 퍼즐 조각처럼 맞아 떨어져 가는 일련의 역사적 삽화들을 볼 때 예루살렘이 웬만한 완력 정도로는 허물 수 없는 거대한 종교적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의 본산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세속적 역사와 상징적 표류를 보면 종교와 정치의 작용, 타락, 소강, 진정 등을 좀 더 큰 틀 안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예루살렘의 제식들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성서의 각 전승이 우회적 계시, 즉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앎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각 전승은 진실에 명중할 때도 있지만 빗나갈 때도 있으며, 관용과 불관용 그리고 평화와 갈등을 동시에 뒷받침한다. 이 책은 성스러운 폭력의 여러 갈래 길을 통과하는 일종의 순례 여정이며, 서구 세계에서 그 모든 길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 바로 예루살렘임을 증명한다. 중세 지도상에서 예루살렘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가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세 대륙에서 쏟아져 나온 군대들이 이곳에서 만났고, 21세기가 된 지금은 제4대륙의 군대도 이곳으로 온다.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관계는 본래 종교 때문에 촉발되었지만, 세속적 세력들을 변형시키는 힘으로도 끊임없이 작용해 왔다. 굳이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서도 전쟁은 이미 그 자체로 신성할 수 있다. 이 역시 우리가 다루려는 주제다. 중요한 것은, 유럽 그리고 미국 내 유럽 문화유산 즉, 그 예루살렘 열병 바이러스가 고대 로마군의 공격, 중세의 십자군, 종교개혁 전쟁, 유럽의 식민주의 정책, 신세계 개척, 근대의 전면전 등에서 연이어 숙주宿主를 찾았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와 그에 대한 관념이 마치 가연성 화학물질들처럼 뒤섞여 예루살렘은 부담스러우리만치 성스러운 땅이 되어 버렸다. 광기와 신성함, 폭력과 평화, 신의 뜻과 권력욕이 뒤엉킨 일촉즉발의 혼합물은 오늘날까지도 갈등의 불씨에 들이붓는 기름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야말로 기름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지역인 중동의 유전과 성지聖地가 중첩되었으니 말이다. 오늘날 석유는 열강의 그 어떤 전략적 관심사보다도 위에 있다. 이란 및 이라크에서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는 초승달 지대에 석유가 집중 매장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그 한가운데 위치한 예루살렘에 대한 공공연한 집착이 단지 영적 상징성 때문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위험 역시 단지 영적 차원의 것이 아니다. 아마겟돈에 대한 묵시종말론적 환상이 인류 역사에서 현실이 된다면 그 불꽃이 처음 붙는 곳은 아마도 아마겟돈을 잉태한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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