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고 사유하는 교육환경을 만들기 위해
김민웅
문학 작품을 예로 들어보죠.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보석〉이라는 단편은, 주인공 남자가 자신의 아내가 남긴 모조 보석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팔러 갔다가 그것이 진품인 것을 알게 됩니다. 아내가 그것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파지고,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평소에는 진정한 보석이란 타고난 본성, 아름다움 등이라고 주장했지만 막상 막대한 가격이 매겨지는 보석 앞에서는 아내가 어떻게 그걸 가지고 있게 되었는지, 자신의 애초의 가치관은 어땠는지 일절 묻지 않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을 주지 않으려고 그냥 보석가게로 들어가 그걸 팔아 큰돈을 손에 쥐게 됩니다. 이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는 쪽으로 해야 인생이 편해지는 현실에 대한 모파상의 풍자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걸 길러주는 것이 곧 교육의 책임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이런 생각을 지워나가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부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이지? 그 부는 과연 윤리적인가? 권력과 부가 지금의 그 자리에 있기까지 누가 자기도 모르게 희생되었을까? 이런 식의 질문들은 담아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이 가령,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식의 질문을 던지고, 학생들이 이에 대해 토론하고 에세이를 쓰도록 할 수 있을까요?
홍세화
그렇죠. 그게 바로 프랑스 바카로레아Baccal aureat의 질문 방식이기도 합니다. 교육이 가장 큰 문제이죠. 우리나라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고, 사유를 못하게 하며, 사회에 대한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역사와 사회, 정치, 경제, 지리, 도덕, 철학 등 인문사회 과목이 암기과목이 되었기 때문이죠. 얼마나 암기를 잘하느냐에 따라 성적을 매기고 있죠. 인간과 사회에 관한 자기 시각을 못 기르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크나큰 문제이죠.
김민웅
자기 목소리를 실종시키는 교육을 하고 있죠. 스스로 자기 생각을 만들어내고 표현하고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 발언이 되도록 하는 교육은 배제당하고 있습니다.
홍세화
그렇죠. 모든 학생들에게 자기 정체성, 처지와 개성과 관계없이 똑같은 내용을 입력시키고 있죠. 자기 목소리를 갖고 이야기하는 학생은 학교에서 무시를 당하죠. 교사가 말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면 문제아로 낙인찍히게 되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의식의 지평도 넓히지 못하고, 수구 세력이 요구하는 사고만을 갖추게 된 것이죠. 수구 세력은 이러한 교육을 통해 비판적인 생각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와 사회, 경제, 지리 등 인문사회과학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유 능력, 인식 능력을 키우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 교사의 대부분은 수구 세력이 원하는 가치관을 심어주는 숙달된 조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교육이 왜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었을까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일차적으로 한국의 근대식 교육이 일제 강점기 때 정초되었기 때문이죠. 군국주의 일본은 국가주의 교육의 일환으로 인문사회과학을 주입식 암기과목으로 만들었습니다. 개인은 국가의 종속물이고 그래서 천황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등의 의식을 주입하도록 했습니다. 게다가 식민지 백성이었으니 주인의식을 심어줄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도 이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입식 교육에 따라 암기를 해야 하고, 암기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학생들을 줄 세우고 있습니다. 유럽 사회에서 대학 평준화가 이루어진 것은 학문 자체가 학생들을 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인문사회과학에 해당하는 교과목은 학생들을 합격과 불합격으로 구분할 수 있을 뿐이지, 정확히 줄 세울 수 있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느 학생의 국어 능력이나 역사를 보는 안목을 어떻게 정확히 측정할 수 있고 석차를 매길 수 있나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일인 양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기 위해 학문을 비틀었다는 점입니다.
사회구성원들 각자가 사회 문제를 논할 수 있는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학교의 주체가 학생인 것처럼, 사회에서 주체는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가 변하려면 시민의식이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 교육에서 인문사회과학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여건 마련이 필수적인 것이지요.
김민웅
서구 근대 철학의 중심을 세운 칸트Immanuel Kant의 이야기도 결국, 생각의 주체는 곧 나 자신이고 그 능력은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한다는 주장 아니겠습니까? 이 주체는 또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순과 직면하면서 새로운 자신을 발명하고 진화시켜 나간다는 것이 헤겔의 요지이기도 하고요. 서구철학사에서만 예를 들어 좀 아쉽지만, 인간에 대한 근대정신의 뿌리는 굳건하게 믿고 있던 신념 체계도 스스로 의문을 품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해체시키고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이라고 봅니다. 이 정신을 기르는 것이 교육의 과제인데, 우리 교육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거나 심도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좀 전에 홍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일제 교육은 식민지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 수동적인 학생들로 만들었잖아요. 이 방식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상태 아니겠습니까? 대학에 들어와서 비로소 토론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학생들이 대다수입니다.
홍세화
한국에서는 중 · 고등학교서도 사립학교 비율이 적지 않고 대학은 사립이 훨씬 많습니다. 교육의 공공성이 확보되지 못한 것이지요.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교육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데요. 문교부든 교육부든 교육 부처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공공성을 우선해야 하는데 사익 추구에 익숙한 사람이 수뇌부에 포진해 있고, 이런 사람들이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교육부 부처에 있던 사람이 사립학교의 이사로 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니 교육에 큰 변화가 없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성적에 따라 대학서열화가 진행되었는데, 다 아시는 바처럼 유럽에는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SKY 대학에 가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파리 1대학이든 13대학이든 학생이 사는 지역에서 가까운 대학에 가는 구조입니다. 우리는 대학에 입학하면 공부를 안 해도 되고, 그래서 지금은 주로 스펙을 쌓기 위해 대학에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평준화되어 있는 유럽의 대학에 대해 경쟁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한국처럼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경쟁이 거의 마감되는 구조와 유럽처럼 대학에 들어가면서 경쟁이 시작되는 구조 중 어느 쪽이 더 경쟁력이 있을지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일례로, 프랑스의 한 법과대학에서는 매년 20%의 학생을 유급시키고 있습니다. 또 인문사회과학을 중요시합니다. 프랑스에서는 나라말인 프랑스어 수업을 고2까지만 하고 고3이 되면 프랑스어 시간이 없어지고 그 대신 철학을 배웁니다. 그리고 대학 입학시험에 철학이 필수로 치러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철학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사고 능력을 종합할 수 있는 평가를 치른다면 사회구성원들이 지금보다 사유하는 힘을 기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나라는 헌법 제1조가 말하고 있듯이 민주공화국인데, 그렇다면 민주공화국의 공교육의 일차적 소명은 모든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형성하는 일입니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당연한 요구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해야 할 가치는 질서나 국가경쟁력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공공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주입한 의식은 반공과 방첩, 질서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참고로 덧붙인다면, 프랑스 공교육의 3원칙은 ‘보편, 무상, 세속성’이어서 대학 교육도 무상에 가까운데, 세속성이 공교육의 3원칙에 포함된 것은 교육 부문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이 워낙 컸던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말은 각급 학교 교문에 ‘자유, 평등, 박애’의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공화국의 국가이념이 청백홍의 삼색기로 표현되기도 하는 자유, 평등, 박애이므로 프랑스 공교육의 현장인 학교에서 이 세 개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면 우리 학교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와 공공성이듯이 말입니다.
김민웅
좀 전에 교육 부처에 있던 사람이 일선 학교 교장이나 총장으로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셨는데, 다 그런 것은 아니라 해도 인맥의 구조상 이들이 교육부와 수구 세력을 위한 손발 노릇을 할 수 있으니 문제가 되죠. 비판적 사유의 힘에 대한 갈망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교육이 제대로 가능하겠습니까?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고 권력이 정리해 놓은 생각을 정답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특히 역사교과서 문제도 모두 이와 관련된 사안 아니겠습니까?
홍세화
우리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네 생각이 무엇이니’ 하고 질문하지 않잖아요. 학생들이 사유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너는 이것을 암기하고 있느냐’만 확인할 뿐이죠. 유대인은 가정교육을 하면서 부모가 아이에게 끊임없이 ‘네 생각은 뭐니’라고 질문을 하는데, 우리는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죠.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했잖아요. 이 말이 제게는 ‘내 생각의 내용, 유형, 상태가 내 삶의 방향을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암기식 공부를 하게 하고 정답만을 강요합니다. 암기식 교육은 정답이 없는 학문인 인문사회과학에도 정답을 만들었습니다. 글쓰기가 없는, 그래서 독서와 토론이 없는 교육은, 결국 나 자신도 없게 합니다. 내 생각이 없으니 내가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주입식 교육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인간과 사회에 관해 자기 생각이 거의 없는 무뇌아들을 양산했습니다. 이해관계에서는 영리할 줄 모르나 사회문화적 소양은 아주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는…….
그렇다면, 교육 문제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지적하는 주입식 암기 교육을 왜 여태껏 손 놓고 보고만 있는 것일까요? 우리나라같이 경쟁이 심하고, 자본과 수구 세력이 결탁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들일수록 지배하기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김민웅
결국 교육은 정치와 깊숙이 맞닿아 있는 거지요. 이런 교육은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처음부터 차단합니다. 자신보다 권위가 있다고 여겨지는 상대가 정해 놓은 것을 답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을 길들이는 거지요. 그런 과정에서 이른바 “권위”에 대한 질문이 가능해지지 못하고 맙니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라, 이거 수십 년 동안 교실에서 듣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물론 문제의 의도를 정확히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런 식의 교육은 눈치 보게 만들고 자신의 생각과 출제자의 의도를 충돌시키기도 하는 발상을 하지 못하게 만들지요. 출제자의 의도라는 말 속에 담긴 권위가 정해 놓은 틀 안에서 꼼짝 못하고 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것을 공부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고정관념화 된 생각을 비판적으로 되짚어내지 못하는 인간이 되는 거죠.
너무 과도한 해석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이런 교육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교육 현장에서 없다는 게 문제지요. 책을 읽는 것은 생각을 풍부하게 하고, 글을 쓰는 것은 생각을 명료하게 만들어주고, 토론을 하는 것은 생각하는 힘을 엄청나게 활성화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나라 교육은 지금 “생각하는 것은 힘들어, 싫어. 그냥 네가 답을 줘” 하는 식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자신의 인간적 가치와 능력, 목표가 자기 비하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홍세화
주입식 교육이 진보 세력 내부에서도 행해지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진보 세력에서는 ‘의식화’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때에도 의식화는 의식을 주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는데요, 우리 사회는 진보조차 ‘선배 따라 강남 가는 것’처럼 주입된 진보가 많습니다. 선배가 누군가에 따라 정파가 결정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그런데 ‘의식화’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입니다. 지배 세력은 전교조 교사들을 비판하기 위해 그들이 순진한 학생들을 ‘의식화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전교조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생각을 심어준다는 것을 비난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죠. 의식화된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 과정에서 사유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것은 결국 학교 교실에서 암기가 아닌 글쓰기를 일상화할 때에 가능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문사회과학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물음이 담겨 있습니다. 인문사회과학에는 정답이 없으므로 질문하고 사유해야 하는 학문입니다.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사유와 논리, 인식 능력, 감수성이 필요한데, 이와 관련된 능력을 얼마만큼 갖고 있는가를 평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글쓰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글쓰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교에서조차 글쓰기를 제대로 안 하고 있고, 학생들에게 사유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외우게 할 뿐 학생들을 생각하는 존재로 대접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군국주의 일본 시절이나 마찬가지로 민주공화국의 주체적 시민을 기르고 있지 않은 것이지요.
사유와 실천을 공유하는 시민 교육을 위해
김민웅
결국은 우리 사회의 교육이 생각하지 않고 명령을 수행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꼴이지요. 그런 식으로 되다 보니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윤리적 책임의식은 사라지고, 남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습관만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런 태도는 결국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책임감 있는 참여나 실천을 가로막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의롭고 선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정치의 근본이 무너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민 민주주의의 토대를 기초에서부터 해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특히 책을 읽지 않는 시민을 양성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우리 사회의 위기라고 봅니다. 국가가 출판의 생태계를 성장시키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고, 언론과 대중매체도 대중들을 책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시민을 위한 지식공동체를 위한 정책은 보기 어렵습니다.
지식 생태계의 다원성을 확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야만 우리 사회의 상상력, 지적 능력, 감성의 힘, 공감대 등이 다채롭게 확장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걸 위해서는 출판문화의 성장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큰 출판사뿐만 아니라 작은 출판사도 소신을 가지고 책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이 절실하지요. 도서관도 훨씬 더 확충되어서 도처가 시민들을 위한 교육의 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되었으면 해요.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다음 세대의 지적 능력, 독서력은 절망적인 수준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학 현장에서 느끼게 되는 현실입니다. 교육과 독서, 이 문제는 정치의 중심을 바로 잡는 핵이라고 믿습니다. 책을 많이 읽고 토론하고 생각하는 나라의 정치는 단연코 달라지리라 봅니다.
홍세화
책을 많이 읽고 토론하고 생각하는 나라……. 그렇습니다. 그런 나라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해지네요. 그런 나라에서 정치는 단연코 달라질 것입니다. 어색한 말이지만 능력도 부족한 제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여러 분들과 함께 ‘가장자리’라는 학습공동체를 꾸리고 〈말과활〉 잡지를 펴내게 된 배경도 작은 기여이지만 그런 나라를 꿈꾸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웃음)
김민웅
〈말과활〉이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래 우리 조상들이 말 타고 활 쏘는 실력이 남달랐잖아요. 과녁 잘 맞추셔서 말言이 살아나는活 기쁨이 있으면 합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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