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인의 생활원리
현대 한국인의 생활원리
1. 금전만능주의와 상품화된 일상
‘금전만능주의’가 우리나라처럼 심한 곳이 없습니다. 이전에는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라는 말이 있었지만 요즘은 ‘돈 나고 사람 났다’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도 있죠.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법이 있어도 집행되지 않는 사회 영역이 생겨났습니다. 이때까지 우리나라의 재벌들이 제대로 처벌받은 적 있습니까? 이렇게 상품화의 원리가 모든 영역에서 관철되고 있는 사회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상품 속에 태어나고 죽는, 이른바 ‘상품 속에 파묻힌 일상’을 살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밖에서 보면 ‘역동적인 사회’라며 놀라기도 하겠죠. 의료, 보건, 교육 등 모든 것이 돈의 영향 아래 자유롭지 못합니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생애주기의 모든 것이 돈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놓인 세상,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조차 돈의 영향을 받는 세상이 된 것이죠.
2. 성역 부재의 극단적 평등주의
성역이 없어진 이유는 우선 일제강점 시대 전통적 신분질서가 외부의 힘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붕괴됐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국전쟁 이후 계층 간의 구분도 더욱 없어지죠. 산업화 이후에는 정치권력과 졸부들이 부상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정당성 문제가 대두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잘 되거나 높은 자리에 앉았을 경우, 실제 실력이나 참된 노력 때문에 그렇게 됐다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운이 좋거나 아는 사람 잘 만나서인 경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희소가치의 분배가 정당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죠. 대체로 불법과 도둑질, 은밀한 그들만의 거래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출세한 범죄자를 보고도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부러워하는 감정까지 느끼게 되고 알게 모르게 공범의식같은 걸 갖게 되기도 하는 지경이죠.
3. 결과우선주의
우리나라는 산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고, 급성장했습니다. 이러한 기적의 대가는 ‘결과 우선주의’로 나왔습니다. 상명하복의 군대식이죠. 대기업의 모든 사원 교육도 이런 방식입니다. 조 나눠서 과제를 주고, 짧은 시간 안에 어떤 식으로든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적나라하게 통하고 있는 거죠. 우리나라는 모든 것이 결과만 잘 되면 됩니다. 거기에는 절차적 정당성이나 과정의 민주주의란 게 없습니다. 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조차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는 절차적 정당성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민주주의, 절차의 정당성들이 중요하게 부각된 것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인데, 생각보다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으니 사람들이 답답해했습니다. 지식인들도 이것을 같이 비판했었죠. 빨리 되는 것이 오히려 기형적인 일인데도 그랬습니다.
4. 속전속결주의
‘속전속결주의’. 여기서 벗어나야 우리나라가 행복으로 갑니다. 우리에겐 ‘은근과 끈기’라는 전통적 의식이 소멸된 지 오래죠. 사회 각 분야에서 시간과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행가면 관광조차도 빨리 빨리하고, 하물며 느리게 살자는 ‘슬로우 운동’조차 빨리 빨리 하려고 하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죠.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 인터넷도 한몫을 합니다. 우리는 인터넷을 의도적으로 선택해 성장시켰는데,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빠른 성장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비롯한 새로운 통신기기 등의 일상화는 한국인들을 더욱 속도의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공짜가 없다는 말은 여기에도 통용됩니다. 경제성장은 빨리 되었지만 빨리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생겼죠. 지금 그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하게 생겼습니다. 여유와 기다림이 상실된 신경증적 사회를 어떻게 다시 정상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5. 현장주의-현세주의
‘쇠뿔도 단 김에 뽑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현장주의를 가장 잘 나타낸 속담입니다. ‘나중 보자는 양반 무섭지 않다’는 말도 있죠. 지금 당장이 중요하지, 나중에 보자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다른 나라에 갈 때 달러를 가장 많이 들고 다닌다고 합니다. 현금박치기란 말처럼 현금을 참 좋아하죠. 지금도 현금을 주면 물건 값도 더 싸게 해주고 좋아합니다. 대신 신용은 없는 사회죠.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는 사회입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질 만큼 격변했던 한국의 현대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언제나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고 정책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니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습니다. 물건도 지금 나오는 물건이 제일 좋습니다. 요즘은 물건도 참 빨리빨리 바뀝니다. 새로운 것이 계속 나와요. 이러니 지속된 A/S가 이루어질 수 없죠.
6. 몰개성적 합일주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개성적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지나치게 타자 지향적이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데 먼저 가는 친구는 없고 다 따라가려고만 하는 거예요. 참된 개성은 남(유행)을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데이비드 리스만David Riesman(1909~2002)이 「고독한 군중」이라는 책에서 인간유형을 전통지향적, 내부지향적, 타자지향적 등 3가지로 구분한 바 있어요. 먼저 ‘전통지향적’ 인간 유형은 행동의 근거를 전통적 사고방식에 두고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넘어선 인간유형이 인구혁명에서부터 1950년대 이전까지 나타난 ‘내부지향적’ 사람들이죠. 내부지향적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근거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합니다. 마지막이 ‘타자지향적’ 인간유형으로 1950년대 미국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은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더불어, 매스미디어가 말해주는 대로, 매스미디어를 기준으로 행동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지향에서 내부지향을 거치지 않고 바로 타자지향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취향대로 가지 않고 남 눈치보고,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홀로서기를 한 경험이 없습니다. 요즘은 부모들이 다 해주니, 부모 의존적이며, 타인 의존적이죠. 독립in-dependent이 아니라, 의존dependent합니다. 경상도 식으로 ‘좋은 게 좋다, 마 그냥 같이 다 가자’는 식인 거죠. 이것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현대 한국 사회의 개성주의는 서양의 개인주의와 무관한 이기주의와 자기집단주의의 혼성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내일에의 전망
부모가 자식을 내버려 둬야 합니다. 옛날엔 자식을 제대로 키우려면 많이 때려서(매) 키워야 한다고 했죠.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자식을 제대로 키우려면 여행도 많이 다니게 해야 합니다. 여행을 하면서 고생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요즘은 여행도 편하게만 합니다. 제대로 된 효가 가능하려면 부모가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 자라야 합니다. 부모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자라야 효孝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정도가 심각할 정도로 부모 의존적이고, 뭘 해도 부모 탓을 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자라야 한다는 거예요. 부모가 힘든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전문직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자기도 힘이 되고 싶어 하고 효도하죠. 부모의 빚도 갚아주겠다고 합니다만 그렇지 않고 곱게만 큰 아이들은 밖에서 빚을 들고 오죠.
1. 현대 한국사회 모순의 심화와 그에 대한 대항문화의 태동
한국사회에서 각종 병리적 현상의 표출은 심각합니다. 범죄는 말할 것 없고, 교실붕괴, 세대갈등, 정신질환의 폭증, 자살 등등. 이런 모순의 심화와 함께 탈이념적 생활정치나 기성주류문화에 대한 저항 등 일종의 반문화들이 태동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사회가 더 갈 때까지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죽어야 제대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교육의 모순도 심화되어 갈 때까지 가봐야 합니다. 안 그러면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상류층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데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그들은 겪지 않으니 모르는 일일 겁니다. 갈 때까지 가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결단이 나와야 멈출 것입니다. 모순이 심화되어야 해결도 가능한 법이죠.
정치도 탈정치화가 될 것입니다. 민주진영의 이념도 현재 위기입니다. 논리가 엉망진창이고, 통합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공공의 적이 있을 때 합해져야 하는데, 이것이 되지 않고 있죠. ‘종북從北’이라는 말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만큼 취약하기 그지없죠. 그 내부에서 혁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2. 대안적 삶과 가치에 대한 성찰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안적 삶을 소수가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죽음과 소멸의 가치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는 겁니다. 죽음의 가치, 소멸의 가치를 다시 끌어 올리자는 거죠. 오늘날처럼 세속의 삶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비대해질수록 죽음에 대한 성찰은 오히려 더욱 의미 있게 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김수환金壽煥(1922~2009) 추기경도 끊임없이 ‘내 탓이요’를 외쳤지만 별 효과를 못 거뒀죠. 사람들은 모두 ‘너 탓이야’를 외치니까요. 생명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무조건 오래 살자’고 주장합니다. 장수長壽가 절대적 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래 살기 위해선 한정된 재화를 가지고 또 서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병상에서 생명 부지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래서 안락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삶, 제대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해봐야 합니다. 이기주의가 지식을 죽인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나’라는 것이 사회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내가 탄생되었다는 것은 남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짐멜은 ‘문화는 개인이 자신의 영혼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나’라는 것은 선대가 남긴 유산입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교육시켜야 합니다. 나밖에 모른다는 것은 까막눈과 같습니다. 이 사회에는 지식은 있지만 나 밖에 모르는 까막눈이 천지에 널려 있습니다. 남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의미인지 교육시켜야 합니다. 집단이기주의도 이기주의의 변형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 속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고, 네가 나다’라는 관념을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행복에 대한 새로운 성찰도 필요합니다. 행복에 대한 목적을 다시 세워보는 것이 필요하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세상의 속도에 따라가려고만 한다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몰개성적’인 것은 외모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가치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행복에 대한 목적을, 가치를 스스로 세우고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행복 찾기’의 첫 시작이 되겠죠.
3. 대안적 삶을 위한 실천적 전략 탐색
필요, 욕망, 탐욕. 이 관계에 대해 다시 점검해 봐야 합니다. 욕망과 탐욕으로 가면 불행해집니다. 가장 기본적인 필요만 있으면 쓸데없는 상상으로 만들어진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노자가 욕망이란 인위적으로 결정되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한 바를 얘기한 적 있습니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욕망을 일부러 쥐어짜서 상품으로 만든다고 했지요. 그러므로 욕망은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을 보고, ‘왜 얼굴이 다 똑같아요?’ 합니다. 왜 요즘 여자 연예인들은 입술을 다 뒤집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입술을 안 뒤집은 애들을 보면 고마울 정도예요. (웃음) 이것은 연예기획사에서 하라고 하기 때문이겠죠. 기획사 전용 성형외과가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정말 요즘 친구들은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개성이 없습니다. 같은 기준으로 비슷하게 고쳤기 때문입니다. 우리 전체의 미美에 대한 기준이 연예기획사에 의해 놀아나고 있습니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그것에 맞춰줘야만 미인이라고 하는 집단최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따라서 대안이 될 만한 모델이 이제부터라도 보다 본격적으로 나와 주어야 하겠죠. 민간 수준의 새로운 ‘생활공동체 운동’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의 공동체는 대부분 돈에 의한 공동체입니다. 그에 대한 대안공동체가 나와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하고, 자신만의 백서를 만들어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욕심을 줄이고 목표를 잘 세워야 합니다. 남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혼자 조용히 있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 있지 못합니다. 조용한 것을 참지 못하죠. 심지어 죽는 것도 같이 못 죽어서 같이 죽자는 자살 사이트가 생겨날 정도잖아요.
삶은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마지막 시간이군요. 가벼운 맘으로 시작한 강의였지만 마칠 때가 되니 이런저런 생각에 새삼스럽습니다. 문득 제가 강의 시작에 앞서 ‘삶은 생각이다’라고 했던 것이 기억나네요. 여러분에게 잘 와 닿지 않는 말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흔히들 ‘삶은 행동이다’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삶은 생각이다’라는 말은 단순히 ‘관념이 최고’라는 얘기를 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삶은 기본적으로 물질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지만 이러한 물질적 조건이 변화하지 않을 때, 객관적 조건이 우리를 옥죄고 있을 때, ‘탈출구는 없는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 번 뒤바꿔 생각을 해보자는 뜻에서 던진 화두이기도 했죠.
저는 개인적으로, ‘몸’과 ‘맘(마음)’이란 글자가 같은 글자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보통의 경우 몸과 마음은 같이 가지요. 마음이 가면 몸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실과 바늘처럼 말이죠. 그러나 우리는 흔히 몸이 먼저 가고 마음이 따라간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몸이 먼저 가고 마음이 따라간다는 것, 즉, 물질적 조건에 의해 의식이 결정된다는 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는 ‘유물론materialism’이라고 하죠. 하지만 저는 앞의 다른 장에서도 말했듯이 이 유물론이라는 번역어가 적합한 용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오히려 ‘materialism’은 ‘구체주의’ 정도로 바꿔 말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무튼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몸이 경색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몸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몸이 가동되지 않을 때에는 다른 것을 가동시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럴 때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고 봅니다. 몸이 계속적으로 독립변수가 된다면, 인간은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됩니다. 인간은 ‘의지’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 경제적 조건이 좋은 사람들만이 계속해서 잘 사는 사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노동이 소외되면, 여가도 소외됩니다. 이럴 때 반대로 ‘여가’로 눈을 돌려보면 노동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지요. 이처럼 문제가 안 풀릴 때에는 우리의 생각을, 의식을 뒤집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몸이 시원찮으면 마음을 추슬러 보는 것이죠. ‘삶은 생각이다’라는 화두로 이 강의를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근래에는 ‘한국의 문화적 특성’에 관한 많은 얘기들이 시도되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반복해서 얘기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한 번도 ‘우리’에 대해 포괄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어요. 가까운 일본의 경우엔 사회학계에서만도 일본에 대한 연구가 단행본으로만 9백 권이 넘는다는 얘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경우엔 그렇게 넓고 세세하게 연구된 것이 거의 없는 형편이에요. 우리는 그동안 우리 자신의 얼굴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채 늘 다른 것들, 남의 것들에만 관심을 가져왔던 거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번에 여러분과 함께 한 총 10번의 강의시간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한 번 더 환기해보고 앞으로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볼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기쁘겠습니다. 더 좋은 기회에 다시 함께 만나기를 기약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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