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1일 출발
세 번째 혹은 마지막 인도 여행
9시 5분 인천공항 활주로를 벗어났다. 일곱 시간을 날아 방콕 스완나품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 시간 오후 4시. 방콕 시간 오후 2시.
여행과 여행기
연암 박지원은 붓 한 자루, 먹 한 덩이, 벼루 하나, 종이책 한 권을 챙겨 말 위에 올라 중국 북경으로 떠났다. 이제 나는 태블릿 PC, 휴대용 키보드, 스마트폰을 넣은 가방을 메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채 인도로 떠난다.
20대 중반 인도에 간 적이 있다. 30년을 훌쩍 넘겨 재작년에 북인도의 레와 스리나가르를 찾았다. 그러니까 이번 인도 여행은 세 번째다. 다시 30년이 흐르면 나는 아마도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운이 좋아 세상에 머물러 있다 해도, 나에게 그 세상은 불륜의 사랑 끝에 다시 못 만날 연인 같은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미지로 남아 있을 뿐 붙잡을 수 없는 그런 사람처럼 말이다. 인도 역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리라.
여행을 어떻게 하리라 특별히 마음먹은 것은 없다. 낯선 땅은 발을 내디디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법이다. 그러니 특별히 무엇을 챙겨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배우려고 깨치려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기필코 찾아가려는 곳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부분은 시간과 상황에 몸을 맡긴 채 부평초가 물 위를 떠다니듯 돌아다닐 것이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냥 돌아다니겠다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인 셈이다.
여행이란 의지로 혹은 불가피한 우연을 기회로 낯선 곳에 자신을 밀어 넣고 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는 행위이다. 곧 여행은 이물감異物感을 느끼려는 행위다. 내가 닿은 곳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거나 풍문을 통해 얻은 빈약한 정보만 있어, 낯선 공간 속에서 처음으로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움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몸을 떨 때야말로 참다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 참다운 여행이란 또 달리 말해 이븐 바투타와 마르코 폴로, 홍대용, 박지원처럼 말이나 낙타를 타고 낯선 공간을 천천히 이동해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런 여행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비행기, 기차, 자동차의 속도로 이동하는 여행은 거리를 폭력적으로 좁힌다. 연암은 하룻밤 사이에 아홉 번 강을 건넜지만, 나는 하룻밤 사이에 아홉 나라를 건널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여행은 단언컨대 참다운 여행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내가 가려는 인도는 이미 여행지로서 알려질 대로 알려진 곳이다. 어지간한 정보는 책으로 영상으로 인터넷으로 얻을 수 있다. 숱한 사람들이 이미 그곳을 다녀왔다. 그럼에도 나는 왜 굳이 그곳으로 가려는 것인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자면,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연애와 결혼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나는지 이미 알려져 있지만, 어리석게도 인간은 또 그 빤한 사랑에 빠지고 짝을 맺는다. 또 헤어지기도 한다. 태어나서 살고 죽는 그 모든 과정을 익히 알지만,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그 범상한 삶을 살아가지만, 나에게 삶이란 단 한 번만 허락된 특별한 체험이다. 다시 말해 수많은 사람들이 무한히 반복하는 삶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그 삶은 처음으로 겪는 과정인 것이다. 여행도 그럴 것이다. 모든 정보가 알려졌어도 나의 몸과 마음은 그것을 아직 체험해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반복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나에게 최초인 여행을 떠난다.
깊은 명상에 잠긴 수도승의 호흡처럼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본 낯선 물상物象과 사람들의 삶을 다시 떠올리고, 그것을 자신의 경험 혹은 지식과 대조하면서 곱씹은 결과 얻은 새로운 깨침을 체로 거르듯 낱낱이 골라내어 정교한 언어로 엮어야 한 편의 여행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과 예민한 오관을 가진 사람이 날카롭게 벼린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때에야 그것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러기에는 나는 너무나 무디다. 하여, 내가 쓰는 여행기는,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것들과 접촉했을 때 얼핏 떠올랐다 사라지려는 생각과 감정의 조각을 겨우 붙잡아 글로 옮긴 것일 뿐이다.
방콕 공항에서
뭄바이 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방콕 공항에 갇혀 있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의자에 앉아 단조로운 바깥 풍경을 하염없이 보든가, 불편한 잠을 애써 청하든가, 아니면 면세점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어느 쪽도 흥미가 없다. 목적은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이니, 공항에 이렇게 머물러 있는 것은 정말 의미 없는 일이다.
멍하게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피부색과 언어와 옷차림이 가지각색인 사람들이 흘러지나간다. 공항에서 비로소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을 실감한다. 사람들이 공항에 모여드는 건 떠나기 위해서다. 공항은 정주하는 곳이 아니다. 흩어질 사람들,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불꽃놀이 같지 않은가. 불꽃은 사방으로 터지며 사라져 버린다. 비행기도 사방으로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진다. 사람이 이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를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다가 하나 둘 다시 사라지고, 결국은 아무도 남지 않는다.
면세점은 들뜬 소비욕을 충족시키는 곳이다. 나는 그곳과 별 상관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시간을 죽이기 위해 서성대고 기웃거린다. 넘쳐나는 상품들 중 오직 술 한 병을 바랄 뿐, 나머지는 나에게 소용 없는 것들이다. 1766년 1월, 담헌 홍대용은 북경의 상가에 흘러넘치는 상품들을 보고 인간의 양생송사養生送死에 소용없는 사치품이라고 비판했다. 그것을 읽었는지 초정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청산 백운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근엄한 유학자 담헌에게 기본적인 의식주와 유가적 예禮를 집행하는 데 필요한 물품 이외의 것들은 모두 불필요했을 터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초정은 그 지점을 물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의식주로만 충족될 수는 없는 법이다. 누가 옳은 것인가.
21세기 자본주의 경제는 소비상품들을 대량 생산한다. 인간의 역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진보해온 것이 사실이라면, 그 목적지는 거대한 쇼핑몰오프라인이건 온라인이건일 것이다. 인간의 진보는 오직 쇼핑몰을 향한 진보인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상품이 흘러넘쳐도 화폐가 없으면 소비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개인의 현실적 목표는 화폐를 획득하는 것이고, 최종 목적은 상품의 소비가 된다.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공식은 자본주의가 본격화된 이후에 생겨난 관념이다. 화려한 면세점에 흘러넘치는 저 물건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한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인간은 얼마나 소비해야 행복한 것인가?
면세점에서 파는 상품들 중 화장품이 가장 흥미롭다. 인간은 뇌가 들어 있고 시각·청각·후각 기관과 호흡하고 음식을 섭취하는 기관이 위치한 타원형 부위에 매우 큰 관심을 쏟는다. 그 부위의 성능이 아니라 크기, 형태, 상호 비례적 관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거죽의 멜라닌 도포 상태, 탄력성 등이 절대적 관심의 대상이고, 그 관심을 부추기고 돕는 것이 화장품이다. 화장에는 인간의 어떤 욕망이 장착되어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 문명은 낭비의 문명이고,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경제학은 낭비의 경제학이다. 이 문명에 대한 발본적 비판과 반성이 없다면, 인간은 결국 지구의 모든 것을 소모한 뒤 멸종할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정말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하긴, 나도 할 말은 없다.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나는 것 또한 지구를 소모하고 더럽히는, 대표적인 낭비 행위가 아닌가.
뭄바이
뭄바이를 통해 인도 땅에 첫발을 들여놓을 예정이다.
뭄바이는 마하라슈트라 주州의 주도州都다.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이곳이 거대한 도시로 성장한 것은 서구 열강의 침략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1498년 5월 20일 캘리컷에 도착하고부터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의 서쪽 연안에 얼쩡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토후 바하두르는 1534년 결국 포르투갈에 땅을 넘겨주었다. 바하두르는 그 일로 인해 훗날 인도의 민중이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게 될 것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네루의 《세계사 편력》에는 “1662년 영국의 찰스 2세는 포르투갈 브라간사 왕가의 캐서린과 결혼하여 지참금 대신 봄베이 섬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섬을 매우 싼 값으로 동인도회사에 불하하였다. 이것은 아우랑제브 시대의 일이다”라고 적혀 있다.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그 작은 섬 뭄바이는 현재 인구 1200만 명이 넘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
방콕 시간 오후 6시 55분 출발. 거의 밤 12시가 되어 뭄바이에 도착했다. 재작년에는 비자를 받고 오지 않아 입국장을 통과하는 데 꽤나 시간이 걸렸지만, 이번에는 E-비자를 받아서 온 덕분에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공항 밖은 생각 외로 덥지 않다. 낮 최고기온이 30도 정도라고 한다. 미니버스를 타고 호텔로 가는 길에 밖을 보니, 길거리에 누워서 자는 사람들이 있다. 어림잡아 열댓 명 정도다. 그 사람들 말고도 군데군데 더 있었다. 인도에서는 길바닥에서 자는 사람들이 흔히 보인다. 낮에는 그렇다. 육교나 보도 옆에 그냥 누워 잠을 청한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맨발이다. 일가족이 길거리에 앉아 먹고 이야기하는 광경도 흔하다. 뒤에 뭄바이 콜라바 거리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자동차가 다니는 이면도로 길바닥에 한 가족으로 보이는 여섯 사람이 앉아 있었다. 길바닥을 집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에서 본 뉴델리의 노숙자 수가 떠올랐다. 로이는 뉴델리 인구의 40퍼센트가 전기, 수도, 하수 처리 시스템이 없는 무허가 주택에 살고, 5만 명이 집이 없어 길에서 잔다고 했다. 재작년 뉴델리에 갔을 때도 한여름의 태양 아래 길바닥에 모로 누워 자는 사람을 보았다. 이곳 뭄바이도 그 비율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숙자들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물론 인도에만 노숙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도 있다. 일본 도쿄의 빌딩 주차장 한쪽에도 노숙자가 있었다. 문화에 따라 노숙하는 모양새도 다른지, 일본 노숙자는 박스로 집을 짓고 깨끗한 빨래를 널어놓았고, 거기서 출퇴근을 했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 신자유주의 이후 노숙자가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호텔 근처에 다다르자, 한밤중에 이슬람 사원에서 불을 밝힌 채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슬람 사원에서 저러는 것은 처음 본다.
공항을 떠난 지 30분 만에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이름은 밝힐 수 없다. 이 호텔에 대해 험담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외국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주로 값싼 호텔만 이용한 터라 시설이 열악한 곳도 숱하게 보았지만, 이런 호텔은 보다보다 처음 보았다. 너무 좁고 더럽다. 5년 전 튀니지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도시의 호텔에 묵었을 때 그 호텔이야말로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방 한가운데에 아름드리 기둥이 있고, 그 양쪽에 침대가 있었다. 너무 추워서, 옷을 입은 채 두꺼운 양털 담요를 두 겹이나 덥고도 덜덜 떨었다. 하지만 그 방은 넓기라도 했다. 20대 중반에 하루 묵었던 도쿄의 시나가와 프린스 호텔은 침대 두 개를 세로로 붙여놓은 이상하게 좁은 방이었지만 무척 깨끗했다. 그런데 뭄바이의 이 호텔은 침대가 방의 공간 대부분을 차지해, 남은 공간에 신발을 겨우 놓을 수 있을 정도다. 화장실에서 나는 암모니아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져 있다. 뭄바이는 대도시이고 물가가 워낙 비싼 곳이라, 특급 호텔이 아니면 그런 지경을 감수해야 한다고들 한다. 한밤중이라 다른 곳으로 옮길 방법도 없지만,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하기야 몇 시간만 견디면 된다. 날이 밝으면 호텔을 벗어나 뭄바이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야간 기차로 고아로 떠날 테니 참아야 할 뿐이다. 겨우 일고여덟 시간 머무를 곳인데 무슨 상관이랴.
1월 12일 뭄바이
간디의 물레
몹시 피곤했던 덕분인지 호텔 방이 좁고 더러웠음에도 불구하고 단잠을 잤다.
아침 8시에 숙소에서 나왔다. 아침거리를 사기 위해서다. 호텔에서는 조식을 팔지 않고, 주변 지리를 모르기에 식당도 찾을 수 없다. 재작년의 경험이지만, 인도에서는 ‘아침 식사 됩니다’라는 문구를 찾아볼 수 없다. 길거리에 간단한 요깃거리를 파는 수레들이 있고, 그 주위에 둘러서서 종이나 바나나 잎에 담긴 음식을 손으로 먹는 인도인들을 많이 보았지만,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져 따라 해볼 마음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아침에는 그런 길거리 음식점조차 보이지 않는다.
매연 범벅이었던 전날의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는지 뜻밖에도 청량감이 느껴진다. 아침의 거리를 구경하는 것은 확실히 재미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는 노숙자들이 얇은 천을 덮고 보도 이곳저곳에 누워 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이미 하루를 시작했다. 출근길에 골목 구석의 작은 신상神像 앞에서 경건한 얼굴로 허리 숙여 절하는 사람, 방금 사원에서 나온 듯한, 맨발에 하얀 가사를 입고 작은 구리 그릇을 옆구리에 낀 승려, 말쑥한 양복 차림의 회사원들이 거리를 지나간다.
노숙자 옆을 돌아 사거리 쪽으로 내려가니 아침 시장이 서 있다. 주로 채소와 과일을 판다. 오토바이를 타고 채소를 사러 온 부부가 시장 구경을 하는 나와 몽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검은 밤처럼 생긴 열매를 쪼개어 파는 것이 신기해 다가가 구경하니, 상점 주인이 주머니칼로 하나를 쪼개어 건네주며 먹어보란다. 맛이 한국에서 파는 물밤 같다. 우리를 바라보던 남자에게 열매 이름을 물으니 ‘신갈라’라고 한다. 한 봉지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작은 바나나도 반 송이 샀다. 아침거리다.
바나나로 아침을 때우고 9시경 콜라바 지역으로 가기 위해 찬드니 로드 역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처치게이트 역으로 갔다. 도시가 사람으로 들끓기 시작한다. 기지개를 켜면서 가게 문을 여는 상인이 있고, 노점을 에워싸고 아침을 먹는 사람들도 있다. 자동차가 밀려 경적을 울려대고, 그 사이를 삼륜 오토릭샤가 곡예를 하면서 빠져나간다. 그런 풍경이야 한국도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한국에서 볼 수 없는 것도 있다. 길가에서 어떤 여성이 무엇인지 가늠이 안 되는 당구공처럼 생긴 물건과 기다란 풀을 파는데,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이가 그것을 사서 소에게 먹이고 있다. 당구공처럼 생긴 것은 소의 별식인 모양이다. 인도 사람들이 소를 숭배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출근하는 젊은이가 길거리의 소에게 여물을 사서 먹이는 광경은 처음 보는지라 아주 신기했다.
이광수 교수가 번역한 인도의 역사학자 D. N. 자의 《성스러운 암소의 신화》에 의하면, 암소 숭배는 내셔널리즘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고 한다. 자 교수는 방대한 문헌을 근거 삼아 과거 브라만 계급은 쇠고기를 먹었고, 암소 숭배 따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붓다도 버섯 요리를 먹고 죽었다는 설보다 돼지고기 요리를 먹고 죽었다는 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으니, 인도에는 과거부터 육식의 전통이 있었고, 당연히 쇠고기도 먹었던 것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소를 잡아먹는 것보다 살려두고 유제품과 소똥연료을 얻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었기에 소에 대한 숭배가 생겼을 거라고 유추하고 있다. 홉스 봄은 《만들어진 전통》에서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과 함께 국가의 과거를 상징적으로 조작하는 일이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인도에도 그것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인도의 개혁주의자 중 한 사람인 다야난다 사라스바티1824~1883가 세운 힌두교 개혁단체 아리아 사마지에서 암소를 보호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훗날 힌두 민족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1881년 어느 이슬람 신자가 암소를 죽여 제물로 쓰려고 하자 다야난다 사라스바티가 지역 당국에 암소 도축 금지를 요청했고, 이로 인해 이슬람교와 힌두교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특정한 식품에 대한 금기는 개인적 혹은 문화적 차원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남에게 강요할 일은 아니다.
암소가 거룩하다는 말을 지어내고 떠드는 자들은 그것으로 뭔가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아마도 힌두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정치권력을 탐하는 자들, 종교를 직업으로 삼아 이익을 보는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일 것이다. 종교적 금기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우연히 생겨나기도 하고, 특정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말들어내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 종교를 빙자해 이익을 챙기는 교활한 지식인들이 신화와 전설을 덧씌워 그것에 권위를 부여한다. 일단 그렇게 되면 거기서 벗어나기 어렵다.
정호영의 《인도는 울퉁불퉁하다》를 보면, 인도인과 쇠고기 이야기가 소상히 적혀 있는데, 재미있게도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웨스트 벵골의 콜카타 시내 한복판에는 쇠고기를 파는 정육점들이 늘어서 있고 쇠고기 요리를 파는 식당도 흔하다고 한다. 어떤 정파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그렇게 달라지는 것을 보면, 힌두교도가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다.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를 두고 증오는 물론 살인까지 불사하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라는 짐승은 도대체 언제 철이 들까?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