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곱씹어 볼 우리말
_헷갈리고 모호해서 쓸 때마다 되짚어 볼 우리말
세노야
‘세노야senoya’는 미국 시카고에 있는 뷔페식당이다. 곽재구 시인은 1990년에 시집 《서울 세노야》를 발표했다. 김혜수와 변우민이 출연한 일일 연속극 〈세노야〉는 1989년에 방송되었고, 가수 남진과 하춘화가 주인공을 맡은 영화 〈세노야〉는 1973년에 개봉했다. 노래 〈세노야〉는 조영남, 최백호, 최양숙, 나윤선, 김란영 등의 가수는 물론 배우 최민수도 불렀다. 양희은의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방송에서 처음으로 노래한 이는 작곡자인 김광희이다. 〈세노야〉의 노랫말은 고은 시인이 1970년에 발표한 시이다. ‘세노야’는 미국 피아니스트 짐 브릭만의 음반에도 들어 있다. ‘세노야’가 라디오 방송 전파를 타고 세상에 퍼지기 시작한 때는 1970년 이맘때인 가을이었다.
‘세노야’의 역사와 존재를 더듬은 까닭은 어느 선배의 말 한마디 때문이다. “‘에야누 야누야…’가 일본 ‘뱃노래’에서 왔다”는 얘기를 건네니, “‘세노야’도 그렇다”며 나직하게 응답한 그는 《한국 민요 대전》을 엮어 낸 최상일 민요 전문 피디이다. 그가 자신의 누리집에 올린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세노야’가 일본 말이라는 사실은 민요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세노야’는 일본 어부들이 배에서 (주로 멸치잡이) 그물을 당기면서 부르던 뱃노래 후렴이다. 남해 지역에서 취재한 여러 자료를 분석하면 동쪽으로 갈수록 일본 말이 많아진다. ‘세노야’는 우리말이 아닌 것이 확실해 보인다.”
시인이 나고 자란 곳은 전북 군산시(당시 옥구군). 어릴 때 들었던 그물질 소리의 뿌리가 일본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물 올리며 메기고 받는 흥겨운 소리 ‘세노야’는 훗날 시가 되었고, 처연함 뚝뚝 떨어지는 노래로 거듭났다. 이런 이유로 〈한겨레〉가 창간 두 돌을 맞아 뽑은 ‘겨레의 노래’에 〈세노야〉가 꼽혔을 때 이의가 없지 않았다. 오히려 질곡의 역사가 반영된 민족의 노래가 될 수 있다는 의견 또한 만만치 않았다. 글쎄, 어느 쪽 손을 들어줘야 할까.
_〈한겨레〉, 2012년 10월 26일
노래와 가게 이름 등으로 사십 대 이후에게 익숙한 ‘세노야’는 일본어, 적어도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뜻을 담아 쓴 글이다. 이 글이 실린 뒤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고은 시인이 ‘반박문 아닌 반박문’을 같은 신문에 게재했다.
이것은 반박문이 아니다. 1960년 말 내가 취중의 즉흥으로 일필휘지 한 노랫말 ‘세노야’에 관한 사연을 밝힌다.
1968년인가 그 다음 해인가 나는 미당과 함께 경남 진해의 육군대학 문예 강연에 갔다. 육군 고급장교들이 교생이었는데 전두환 노태우 등도 교생이었던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강연 뒤 육군대학 총장 김익권 장군의 호의로 육군대학 전용의 소형 군함에 두 사람이 타고 통영에서 여수까지의 다도해를 경유하게 되었다. 도중에 박재삼의 고향인 삼천포에도 잠시 기항해서 소주를 마시는 여유를 누렸다.
바로 그 남해 난바다까지 나가 나의 뜻에 따라 멸치잡이 어선들에 조심스레 접근했다. 멸치 그물을 후리고 끄는 선상 노동은 노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어부가 중 후렴으로 ‘세노야 세노야’라는 낯선 낱말이 내 뇌리에 박혔다.
이 ‘세노야’는 내 고향 군산 앞바다의 그것이 아니라 남해 일대의 노동요 발흥의 허사이다. 그런데 훗날 나는 일본 규슈를 여행하다가 규슈 해안의 어부가로 다시 ‘세노야’를 만날 수 있었다.
〈한겨레〉 10월 26일치 30면 ‘말글살이’란의 ‘세노야’는 이 낱말이 일본 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나서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일본 말로 노래 제목을 삼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군산 앞바다 어부가에는 ‘세노야’가 있지 않다.
과연 일제강점기에 우리 모국어는 금지된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기간 이후로도 많은 손상과 오염 그리고 지배 언어의 잔재가 거기에 개입한 바 있다. 아니 근대어의 경우 일본의 조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사실을 굳이 숨길 까닭도 없다. 이는 현대 한국어나 중국어의 관념어 대부분에 해당한다. 그래서 우리 언어의 한 부분은 고대에는 중국에 빚지고 근대에는 일본에 빚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남해 이일대의 언어는 당대의 시각으로 한국어다 일본어다 하고 분별하기보다 고대 한국어가 일본으로 건너간 분명한 사실이 일본어의 기원에 대한 절대 조건인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남해의 이쪽 한국 쪽이나 그 건너 일본 쪽에서 해상 언어의 공동 사용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심지어는 고대 이집트어가 한국어로도 충분히 토착화되었다. 만주어의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세노야’가 일본어라고만 단정하는 것을 주저한다. 그것은 오랜 공해상의 흥취를 담은 고대 한국어이자 지금 국제어로서의 한 낱말이기 십상이다.(고은 시인)
_〈한겨레〉, 2012년 11월 1일
‘세노야’가 어디에서 온 표현인지 설왕설래, 갑론을박이 오가는 자리에 최상일 피디가 점잖게 나섰다. 〈세노야〉는 일본 노동요이다-아니다-현장 취재 결과 ‘일본 어부들의 추임새’가 맞다. 이렇게 줄기가 흘러갔다. 다음은 최 피디의 ‘반박문’과 취재 결과를 밝힌 내용이다.
얼마 전 〈한겨레〉에 ‘세노야’에 관한 글과 반박문이 실렸다. 우리가 잘 아는 ‘세노야’가 실은 일본 말이라는 미디어언어연구소 강재형의 글에 대해, ‘세노야’를 쓴 고은 시인이 일종의 반박문을 실은 것이다.
나는 강재형 소장에게 ‘세노야’가 일본 말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 바 있다. 그리고 고은 시인의 반박문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반박문이 아니라고 하면서 궤변에 가까운 반박문을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고은 시인의 글에 반박하는 글을 써서 〈한겨레〉에 보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에 그 글을 싣는다. 먼저 두 사람의 글을 읽어 보기 바람.
‘세노야’는 일본 말이 확실하다
2012년 11월 1일자 〈한겨레〉 ‘왜나면’에 실린 고은 시인의 “‘세노야’에 대해서”라는 글을 읽었다. 10월 26일자 ‘말글살이’에 실린 강재형 미디어언어연구소 소장의 글에 대한 답글이었다. 본인의 시에 우리말이 아닌 ‘세노야’라는 일본 말이 들어 있다는 지적에 대해 고은 시인은 “이것은 반박문이 아니다”라고 글을 시작했지만, 결론은 거의 반박문에 가깝다. 나는 강재형 소장에게 〈세노야〉라는 민요에 대한 고증을 해 준 사람으로서, 고은 시인의 답글에 잘못된 점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세노야’는 일본의 멸치잡이 배에서 그물을 당길 때 뱃사람들이 부르던 민요 후렴구의 일부이다. 이에 관한 증거는 MBC가 남해안 일대에서 취재한 《한국 민요 대전》 자료도 충분하거니와, 내가 경남 고성에서 취재한 어느 소리꾼의 증언으로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다. 고성의 그 소리꾼 어르신은 농사꾼이었지만 품팔이를 위해 당시 해안에 진출했던 일본 멸치잡이 배를 탔고, 조업을 하면서 일본 어부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멸치잡이는 여럿이 합심해야 하는 일이기에 동작을 맞추기 위해 노래가 필요했다. ‘세노야’는 멸치가 잡힌 그물을 배 위로 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부르던 노래의 일부이다.
일본의 멸치잡이 배는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남해안에 대거 진출했다. 우리의 전통적인 멸치잡이 배보다 훨씬 크고 어로 방식이 다른 어선이었다. 일본에 가까운 부산 앞바다에서부터 서쪽으로 남해, 여천, 완도에 이르기까지, 일본 멸치잡이 배가 남긴 흔적은 바닷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일본식 뱃노래의 형태로 남아 있다. 일본에 가까운 동쪽에는 일본식 뱃노래의 영향이 강한 반면, 서쪽으로 갈수록 그 영향이 줄어들고 우리 민요의 모습이 살아난다. 이는 곧 일제강점기에 특정한 상황에서 일본의 민요가 우리 민요에 끼어들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일제강점기가 36년이나 계속되었던 만큼, 우리 민요에 일본 말이 삽입되는 현상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민요뿐 아니라 우리가 쓰는 말에 어떤 외래어가 얼마나 섞여 들어가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소통에 문제가 없다면 될수록 외래어 대신 우리말을 쓰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일찍이 대중에게 익숙한 ‘세노야’라는 말이 일본 말이라는 것을 뒤늦게라도 알았다면, 우리 모두의 무지를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교훈으로 삼는 것이 옳다.
그런 면에서, 고은 시인이 ‘세노야’에 대해 내놓은 변명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는 ‘세노야’가 어쩌면 고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말일지도 모른다든가, 한일 양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고대 해상 언어 또는 국제어일지도 모르니 ‘세노야’가 일본 말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검증되기 어려운 고대 언어를 들먹이면서 눈앞의 진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일본 사람들이 어쩌면 모두 고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일지도 모르고, 일본 말이 어쩌면 고대 한국에서 건너간 말일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세노야’가 고대 한국에서 건너간 말이라면 왜 일본에만 그 말이 남아 있고 본토인 한국에는 남아 있지 않는가? 《우리말 갈래 사전》을 포함한 어떤 한글 사전을 찾아봐도 ‘세노야’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고, 그 비슷한 말조차 올라 있지 않다.
고은 시인은 자신의 반박문에서도 ‘세노야’가 ‘일본 규슈 지방의 어부가’라고 밝힌 바 있다. 자신이 남해에서 들었던 ‘세노야’라는 말이 실은 일본 말이었다는 것을 오래전에 이미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왜 여태까지 그에 대해 한 마디도 없었는지 궁금하다. 자신이 잘못 알고 쓴 시 한 편이 유명한 대중가요가 되고, 영화나 드라마 제목이 되고, 주점이나 미용실의 상호가 되고, 다른 시인의 시집 제목곽재구 시인의 《서울 세노야》에도 쓰이고, 어느 신문사에서 펴낸 ‘민족의 노래’로 뽑히기도 하는데 말이다.
‘세노야’가 일본 뱃노래의 후렴구라는 것은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일본과 한국은 인종이나 언어 구조에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비슷한 점이 많지만, 민요를 포함한 전통음악은 같은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다. 일본 민요의 음계와 리듬과 시김새는 우리 민요와는 매우 다른 반면, 동남아시아의 민요와 비슷한 점이 많다. 우리말이나 우리 민요에 일본 말이 남아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뼈아픈 근대사의 산물이지, 고대 문화 교류의 결과가 아니다. 잘못된 것은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지식과 문화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다.
▶MBC라디오 〈최상일의 민속기행〉 2007.10.21. 방송/경남 고성 소리꾼 천의생 어르신의 ‘세노야’ 관련 증언 부분이다.
“살아 나온 기 고생이라. 6남맨데 먹을 게 있나. 요샌 우유도 있고… 그땐 아들 여섯을 키우다 보니 고생이라. 배도 탔고.”
“오구도리배. 걸망. 멜치가 걸리는 거는 걸망배. 오구도리는 그물로 놔가지고 싸가지고 땡기는 거고… 방맹이로 돌려서 그물이 갱기 올라온다 아이가. 메루치. 그게 일본 놈 배 아이가?”
“배가 여러 대야. 뗏마, 운반선, 배가 많아. 맘메(큰배), 사까메, 뗏마. 뗏마는 그물 논 데 대니면서 돌보는 일 하고. 잡으면 운반선(에 실어서) 팔러 간다.”
“뱃노래는? 세노야, 세노야 하면서, 그물 댕길 때는 세노야, 세노야, 세노야… 그물 댕길 때.”
“세노야는 그물을 손으로 땡기면서 한다고. 로꾸리로 감아올리고 다 땡긴 다음에 들어서서 ‘세노야’를 하지. 그물을 졸이면서. ‘세노야’ 그게 조선 사람 소리가 아니지. 그게 일본 놈 소리라. 배 탄 사람은 알지. 본인이 직접 했으니까네.” (최상일 피디 블로그, 〈우리소리연구소〉 누리집 http://blog.daum.net/sichoi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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