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서 산 60년 전 일기장
한 달에 한두 번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드나든다 하니, 무어 대단한 책이라도 잔뜩 사들이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냥 산보 삼아 들르는 것이다. 쉬는 날 이따금 아내와 버스를 타고 남포동에서 내려 광복동 거리를 걷다가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고, 국제시장과 부평시장일명 깡통시장으로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다. 깡통시장에는 최근 야시장도 생겨서 밤에 볼 것이 더 많다.
어떤 날은 둘이 깡통골목을 거쳐 대청동까지 올라간다. 나는 길을 건너 보수동 책방 골목으로 가고, 아내는 깡통골목을 더 뒤지고 다닌다. 그렇게 두어 시간 지난 뒤 다시 만난다. 나는 배낭을 지고 서점을 훑고 지나가는데 무슨 좋은 책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책방 골목은 그냥 헌책을 파는 곳일 뿐, 도쿄의 ‘간다神田 거리’처럼 고서점이 밀집해 있는 그런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사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고, 이따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책을 두어 권 사거나, 아주 드물게 앞으로 공부에 참고가 됨직한 책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사는 책은 대부분 신간일 필요가 없는 소설 같은 것이다. 한번은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구하려 하니, 1974년에 나온 정음사 판 전집이 있었다. 시렁 높이 있는 것을 내려달라 해서 보니, 워낙 오래되어 낯설기 짝이 없었다. 포기하고 말았다. 뭐, 이런 식이다. 그냥 걷느니 책방 골목으로 다닐 뿐이다.
수삼 년 전 봄날 역시 아내와 헤어져 책방 골목을 배회하다가 골목 중간쯤에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책방에 들렀다. 자주 들르기는 하지만 책을 산 기억은 별로 없는 곳이었다. 훑어보니 책이 한쪽에 정리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잔뜩 꽂혀 있다. 그중 책등이 벗겨진 볼품없는 책이 있다. 뽑아보니, 어라, 케이스까지 갖춘 책이다. 케이스 앞면에는 찔레꽃이 그려져 있고 ‘文藝日記문예일기 1961’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책을 꺼내보니 하드커버다. 그 표지에는 ‘學園日記학원일기 4289 學園社학원사’라고 쓰여 있다. 단기 4289년은 1956년이니 책 케이스의 1961년과는 맞지 않는다. ‘문예일기’ 케이스에 ‘학원일기’를 넣어둔 것이 틀림없다.
‘학원일기’는 청소년을 독자층으로 삼았던 잡지 〈학원〉의 부록이다. 당시 잡지사에서는 잡지를 더 팔 의도로 종종 부록을 끼워 팔곤 했는데, 일기장 역시 그런 부록이었을 것이다. 독자 중에는 일기장이 탐나서 잡지를 사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빠지지만, 〈학원〉은 고등학생들이 읽기에 꼭 맞는 잡지였다. 학원사에서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현상 시문 대회를 열기도 했는데, 그 대회를 거친 전국의 청소년 문사들이 뒤에 정식 문인이 되곤 했다.
일기를 훑어보니 푸른 만년필로 단정하게 쓴 글씨다. 갑자기 구미가 당겼다. 주인을 불러 짐짓 아무것도 아닌 체하면서 “이거 얼마요?”하고 물으니, 주인은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책을 한 번 보고 망설망설하다가 2만 원이라고 한다. 자기로서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 무슨 이런 낡은 공책이 2만 원이란 말이오?” 하지만 내 얼굴에서 비상한 관심의 자취를 읽어낸 주인의 말투가 갑자기 단호해졌다. “세상에 한 권밖에 없는 책 아닙니까?” 하는 수 없이 지갑을 열고 2만 원을 건넸다.
집에 돌아와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일기장 안쪽에 ‘張大成 專用장대성 전용’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이 일기는 장대성이란 사람이 쓴 것일 터이다. 일기는 1956년 1월 1일부터 10월 16일까지의 것이다. 일기를 쓴 사람은 스무 살 정도의 청년이다. 집은 경상남도 진주 근처의 시골이다. 일기가 시작될 때 장대성은 진주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진주농림고등학교 3학년생으로 졸업을 앞둔 처지였다. 1, 2월 대입 시험을 앞두고 마음을 졸이며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진주 하숙집에 있다가 시골집으로 갔다가 하더니, 결국 3월 4일 낙방 통보를 받는다. 다시 동아대학교에 응시했지만, 또 낙방이다. 어쩔 수 없이 자기 집안에서 하는 제재소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며 불안한 마음으로 입대入隊를 기다리다가 5월 8일 동아대학교 야간부 편입 시험에 합격한다. 당연히 5월 19일 징집 연기를 하고 계속 제재소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학교를 다닌다. 따지고 보면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일기다. 하지만 6·25전쟁 뒤 불안한 시대의 20대 초반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의 일상과 속내를 엿보기에 족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친척이나 친구들과의 친밀한 관계, 젊은 여성에 대한 치기 어린 애정, 일상의 일과 휴식 등을 그야말로 날것으로 볼 수 있다.
장대성의 주 활동 무대는 미화당백화점이고, 주 취미는 영화 보기다. 하루치를 보자.
7월 1일. 금일이 일요일인 동시에 7월의 첫날이어서 시민들은 오랜 장마에 시달렸던 몸을 비가 그치자 각 곳으로 산보하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오전에는 남포南浦에서 〈벼락감투〉를 구경하고 오후에는 책상에 앉아 NOTE 정리에 골몰. 저녁에 DS에 있는 S miss와 약속을 포기하고 본점의 Y와 같이 시민관에서 〈안다루샤〉를 관람하고 돌아와 DS에서 S에게 변명을 하고 11시경 SY와 같이 중국요리로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DS에서 경음악으로 1시간 넘도록 감상에 잠긴다.
하루의 일과가 복잡하기도 하다. 7월의 일기가 시작되기 전 ‘이달의 메모’에서 7월에 본 영화를 정리해두고 있는데, 모두 16편이다. 엄청난 영화광이 아닐 수 없다.
일기를 통독하고 나서 대단한 자료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치른 2만 원의 값은 하는 것 같았다. 또한 영화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1950년대 젊은이의 영화 보기도 시각에 따라서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 일기를 사들인 뒤로 혹 서점이나 고물 파는 곳을 들르면 일기가 있는가 하고 유심히 살피게 되었다. 언젠가는 고리원자력발전소 인근의 고물 파는 곳에서 1960년대 충청도 부여 쪽에 사는 농민의 일기장을 발견한 적도 있다. 살까 하다가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쉽기 짝이 없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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