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
벗겨진 신용사회의 허울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생각은 망상이며,
이제 미국에서 부자 중의 부자가 되려면
부자로 태어나는 길밖에 없다.
- 이매뉴얼 사에즈와 가브리엘 주크먼
프롤로그에서 봤던 와이키키와 몬터레이의 걸인과 노숙자 들은 애초부터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한때는 어엿한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던 사람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그 추정의 근거로 미국에서 실직이 곧 빈곤층으로의 여지없는 추락을 의미하기 때문임을 이미 지적했다. 그렇다면 미국 사회에서는 왜 실직이 곧 빈곤층으로의 추락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해답을 미국 특유의 ‘가불 경제’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을 흔히 ‘신용사회’라 부른다. 이 신용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 그대로 신용 즉 영어로 ‘크레디트credit’다. 그런데 아무리 번지르르하게 갖다 붙여도 미국에서 신용은 곧 ‘빚debt’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신용이 좋다’는 말은 곧 ‘그가 빚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미국 전체 경제의 약 3분의 2가 생산이 아니라 소비로 돌아간다는 미국 경제 특유의 사실과 긴밀히 연관된다. 물론 어느 나라나 경제는 소비가 있어야 돌아가는 것이 당연지사다. 그러나 미국 경제의 소비 중심성은 상상 이상이다. 한마디로 그냥 써재끼고 보는 것이 이 나라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크나큰 원동력이다.
물론 쓸 돈을 쟁여놓은 채 쓸 때 쓰는 것이라면 누가 뭐라 딴죽을 걸랴. 하지만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전혀 쟁여놓은 것 없이 소비에 몰두하고 그것을 장려하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이는 나라를 비롯해 주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국민 모두가 가진 경제 습속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동안 미국인들은 당장 수중에 가진 것이 없어도 나중에 돈 나올 구멍만 있다면, 그 구멍만을 믿고 미리 돈을 당겨쓰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구멍이라는 것이 자기 직장에서 나올 급여라면, 시쳇말로 ‘지름신이라도 강림한 듯 일단 지르고’ 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가불 경제의 실체다. 오늘 일해 내일 쓰는 것이 아닌 내일, 모레, 글피에 일해 벌 것을 오늘 미리 당겨쓰는 꼴이니, 내가 붙인 가불 경제라는 말이 무리가 아니다.
이 가불 경제의 큰 폐단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른바 ‘구멍’이 막힌다면 큰코다친다는 데 있다. 가불 경제에서는 유사시에 쓸 실탄, 즉 저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구멍’이 막히면 미리 당겨다 쓴 빚을 상환하기가 난감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에선 웬만큼 큰 부자가 아니고서는 멀쩡했던 중산층조차 실직과 동시에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는 신세가 될 공산이 크다. 여태껏 그런 가불 경제로 돌아갔던 나라를 세계에서 중산층이 제일 두텁고 가장 잘사는 나라로 미국 스스로가 한껏 뽐내며 자랑했고, 다른 나라들은 이 속 빈 강정을 한없이 부러워만 했다. 진정한 실상은 모르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제야 비로소 미국인들이 정신을 약간 차린 것일까. 2014년 6월 중순 미국 웰스파고Wells Fargo 은행이 실시한 조사에서, 22세에서 33세에 이르는 1600명의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가 10명 중 8명꼴로 “경제적 난관이 닥쳤을 때를 대비해 지금 저축을 해둬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2008년 경제 위기에서 얻었다”고 답했다. 〈CNN 머니CNN money〉에 따르면 이 조사 대상자에는 1500명의 ‘베이비붐 세대’49~59세도 포함되었는데, 그들 중 약 절반이 향후 은퇴를 대비해 얼마라도 저축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제는 미국인이 저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시련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나 보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경제 상황을 들여다보면 안타깝게도 이런 미국인들의 뼈아픈 각성이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앞서 지적했듯이 미국 경제의 70%가 소비로 돌아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제껏 경제를 움직여왔던 관성의 법칙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는 계속해서 국민이 돈을 저축하기보다 소비에 몰두하도록 갖은 노력을 경주하며 소비를 독려할 것이 뻔하다.
두 번째 이유는 시민 대다수가 아무리 저축 의지를 활활 불태울지라도 실질적으로 저축할 여력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기존에 빌린 돈을 갚는 데만도 출혈이 대단한데 어찌 저축할 엄두를 낸단 말인가. 실제로 위의 설문조사에서 밀레니얼 세대 중 40%는 학자금 대출과 신용카드 대금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고 답했으며, 47%는 월수입의 절반 이상을 빚 갚는 데 할애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를 두고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는 새로운 경제 습속으로 개과천선하려는 미국인의 최대 장애물이 바로 기존에 진 어마어마한 빚이라고 보도했다. 한마디로 예전에 칭송해 마지않던 그 크레디트신용가 미국인의 미래를 가로막는 애물단지로 재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이유로 물가 인상을 꼽을 수 있다. 그나마 푼돈을 아껴 저축했다 해도 물가가 올라서 저축의 의미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중산층의 나라로 소문이 자자했던 지상 최강의 국가 미국은 더 이상 중산층이 두터운 곳이 아니다. 이제 미국인들 중에서도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던 ‘아메리칸 드림’이 정말로 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자수성가의 대명사 격이던 미국 중산층이 도대체 어느 정도나 망가졌기에, 신용이라는 허울로 빚더미라는 실체를 가려온 중산층의 진짜 몰골이 얼마나 처참하기에 더 이상 미국을 중산층의 나라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을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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