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의 식탁
뒤뜰 식탁은 냅킨이나 컵을 집기 위해 손을 뻗을 때마다 서로의 팔꿈치가 스쳐도 개의치 않는다고 전제할 경우 어른 열여섯 명가량이 둘러앉을 수 있었으며 서로의 숨결이 닿기 직전까지 밀도를 높이면 어린이 예닐곱 명은 추가로 끼어 앉을 만했다. 매끈하게 깎인 상판에는 얼굴이 비쳐 보일 듯 니스 칠이 되어 있었고, 두툼한 모서리의 마감은 둘쭉날쭉하며 다리는 울퉁불퉁한 나무 몸체의 근육을 그대로 살린, 다리라기보다는 그 자리에 거의 붙박인 다섯 개의 두꺼운 기둥 수준으로, 웬만한 장정 네댓 사람이 달라붙어도 들어 옮기기 어려운 핸드메이드 제품이었다. 주택 설계자 가운데 누가 이런 걸 여기 둘 생각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최소한 경비가 남아서 들인 게 아니라는 짐작만은 할 수 있었다. 시중의 목공소나 공방에서 이런 물건을 맞추려면 평범한 월급쟁이의 소득으로는 어림없을 거였다.
지금은 어른 일곱 명, 영유아 여섯 명으로 그중 아이 셋은 저마다 아빠의 무릎을 차지했으므로 그나마 한산한 식탁이었다. 앞으로 열두 개 호가 빈 데 없이 꽉 차면 이 식탁도 인구 수용에서 한계에 달하겠으나, 이렇게 많은 입주민이 동시에 빠짐없이 모여 식사하는 일 자체가 매번 가능하지는 않으리라고 요진은 내다봤다.
“각자 잔에 와인을 다 따르셨으면.”
정오에 사다리차가 창문턱에 닿기 무섭게 제일 먼저 뛰어나와 요진 가족을 맞이한 신재강이 일어나 선창했다.
“전은오 님과 서요진 님 그리고 두 분의 딸 여섯 살 전시율 님, 입주를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고 허리를 숙였지만 아이 안은 아빠들은 그대로 앉아 팔을 뻗는 시늉만 할 수밖에 없었으며, 맞은편과 양 끝에 나눠 앉은 이들까지 서로의 잔이 닿지는 않았으므로 눈인사를 대신 주고받았다. 아이들도 어른을 따라 각자의 옥수수 플라스틱 잔에 담긴 감귤주스를 들어 올렸다가 마셨다. 누구 엄마, 누구 아빠라고 부르는 거 재미없잖아요.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나누는 걸 선호합니다. 신재강이 아까 입주민들을 간단히 소개하며 했던 말이다. 병원이나 관공서에서가 아니면 실로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들어 보는 제 이름에 다소 이물감을 느끼며, 요진은 잊었던 모국어의 발음을 새삼 되새기는 이민자처럼 입속으로 따라 중얼거려 보곤 잇몸을 혀로 훑었다.
“오늘 이사 들어오시고 피곤하시니 일부러 저희가 시간도 애매하게 잡고, 간단하게 마른안주랑 다과만 내놨지 뭡니까. 이렇게 환영회가 부실해서 어쩌나요.”
잠든 아이를 품에 안은 고여산이 불편한 자세 그대로 고개만 모로 돌리며 말을 붙이자 은오는 황감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심플한 게 최고죠. 저희가 잠깐 머물다 가는 손님이나 대접받을 사람들도 아니고 그저……”
실험공동주택의 신규 거주자 3인일 뿐인데요, 하기엔 왠지 어조와 무관하게 속정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리라는 예감에 은오는 말을 더 잇지 않고 얼버무리며 잔을 마저 부딪쳤다. 이런저런 그릇 소리에 이어서 말소리며 아이들의 투레질 소리 같은 것이 초저녁의 허공을 부유했다. 고여산의 아내 강교원은 잔을 저만치 멀리 물려 놓고 네 살짜리 첫째 옆에 붙어 앉아 늦은 점심을 떠먹이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랑이며 약간의 짜증도 다정한 오후의 충만함처럼 생각되었다. 이런 그림을, 모자의 평화로운 한때를 해쳐선 안 되겠다는 조심성을 누구라도 갖게 될 법한 장면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웬만한 소음은 배경음악으로, 어수선한 광경은 손 닿지 않는 액자 속 풍경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요진 씨 아까 드린 문건 잘 챙기셨죠?”
신재강의 아내 홍단희가 묻자, 요진은 이삿짐이 부려지는 정신없는 와중에 그녀에게서 뭘 건네받긴 받았다는 기억 가물거렸으나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별거 아니지만 몇 가지 생활 규정 말인데요, 분리수거 요일이나 그런 것들 아까 드린 에이포지에 적어 두었으니까 그대로 잊지 않고 해 주시면 돼요.”
비로소 알아차리고 요진은 도열한 일가 어르신들께 폐백 인사를 마친 신부의 기분으로 숨을 내쉬었다.
“아 그게요, 아직 정리가 덜 되어서 냉장고에 붙여 두기만 했네요. 이따 가서 바로 읽어 볼게요.”
“예, 내일 일요일인데 천천히 확인하셔도 돼요. 그나저나 상낙 씨, 효내 씨는 요즘 많이 바빠요?”
역시 한 아이를 품에 안은 손상낙이, 마침 깨어난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느라 그 물음에 뭐 늘 그렇죠, 하며 대강 고개만 까딱해 보였다. 요진이 둘러보니 어른이 총 여덟 명이어야 짝이 맞는 것을 한 명이 부족하다 싶었는데 이 자리에 없는 이가 손상낙의 부인인 듯했다. 뭐 늘 그렇죠. 진솔하고 대체 불가능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질문자가 원하는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듣기에 따라 무성의한 대답이었다. 어쩌면 이야기를 매조지하려는 의도를 담아낸 것인지도 모르지만 홍단희는 좀 더 명확하게 물음의 추를 얹었다.
“암만 마감이라도 그렇지 식구가 한 팀 더 들어왔는데 얼굴 잠깐 비치는 게 뭐 어렵다고, 상낙 씨가 다림이를 아예 안고 나왔어요그래.”
“아니 마감을, 막 마쳐서 지금 완전 뻗었습니다. 한 사흘 꼬박 샜는데 지금은 누가 업어 가도 몰라요.”
“그렇구나. 잔다는데 어쩔 수 없지. 요진 씨 언짢은 거 아니죠?”
“예? 그럴 리가요. 각자 다 사정이 있을 텐데 제가 뭐나 된다고요.”
요진은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은오 말마따나 자신들은 손님이 아니었고 어떤 격식을 갖출 필요 없었다. 보통의 아파트에서라면 눈인사 정도나 할까 말까 한 헐거운 관계에 불과할 것을, 그래도 주택 사정에 맞게 소규모 그룹 같은 형태가 된 이상 이름 정도나 트고 지내면 그만이었다. 홍단희가 일컫는 잠깐이라는 말도 개인차가 얼마나 심한지, 누구에게든 부담 없게 들리는 잠깐이라는 순간도 모이고 뭉치면 그것이 삶에 어떤 크기와 무게로 다가오는지 요진은 모르지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때론 한순간의 목례를 위해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람이나 상황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요진보다 서너 살쯤 위인 듯싶은 홍단희는 보아하니 천성으로 장착된 활발함도 그렇고 이것저것 세심하게 살피거나 돌보기를 즐기는 부녀회장 스타일이었고, 그런 성격의 사람이 이런 외딴곳에서 거주하기를 자청했다는 게 요진은 조금 신기했다. 아닌 게 아니라 기존의 인간관계나 사회 인연을 모두 청산하고 싶어질 때 들어올 만한 곳이었다. 공기 맑고 물 깨끗하고……가 삶의 가치 기준의 대부분이 되는.
“이렇게 한 식구 더 들어오니까 이제 좀 사람 사는 거 같다. 아니, 그렇다고 그 전에 우리끼리 뭐 적적하게 지냈다는 건 아니고. 효내 씨가 무슨 프리랜서라나, 밤낮을 바꿔서 산다니까 여자가 둘밖에 없는 거나 비슷했는데 이제 한 명 더 들어와서 좋네. 아침에 남편들 보내고 우리끼리 차 한잔 하고 그래요, 응?”
홍단희가 살갑게 말하는 눈앞에 대고 요진은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현실을 정정할 필요 있나 싶어 대답 대신 미소만 띠었는데 은오가 나섰다.
“그게 실은, 출근을 이 사람이 하고 제가 집에서 시율이를 봅니다.”
“예?”
“하하, 제가 능력이 없다 보니 이 사람이 밖에서 일하죠.”
은오는 남들 앞에서 요진을 칭찬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을 낮추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는데, 그것이 배려에서 나오는 말이라도 요진은 가끔 고통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가 자신을 깎아내려서 상대적인 위치가 높아지는 것도 요진은 원치 않았고, 그런 방법으로 진짜 돋보이거나 빛나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칭찬으로 들리지가 않았다.
“아…… 요진 씨가 더 많이 버셔서 바깥분이, 아니 은오 씨가 집에 있기로 한 거예요?”
“뭐 딱히 그렇지는 않고요.”
남편이 입봉하기로 했던 영화가 몇 편 내리 엎어진 뒤로 낭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첫 만남에 밝히고 싶지 않아서 요진은 대충 대답했는데, 홍단희가 아까 손상낙에게 그리했듯이 행간을 읽어 내지 못하고 더 깊이 물어볼까 우려했다.
“그럼 요진 씨 자기는, 요즘 실업이다 비정규다 다 같이 힘든 세상에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모르겠네…… 어디 다니는데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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