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구두당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확실히 아는 이는 없다. 아흔두 살로 그 도시의 최고령자인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최하한선인 여섯 살 때도 이미 그러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모두에게 일어난 일이 아님은 확실하며 수 세대 이전부터 서서히 발생하여 확산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신부는 그 첫 번째 증거로 자신의 유년기에 아직 생존해 있었던 증조부로부터 색에 대해 들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신부의 증조부 또한 직접 색을 본 적은 없고, 그 자신이 어렸을 적 한참 위의 어른들에게 색이 존재했던 시절에 관해 들은 바를 전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 내용은 상당 부분 왜곡 및 편집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초록 나뭇잎이 늦가을에 붉게 물든다느니, 무거워져 허리를 숙인 노란 곡식의 물결이 끝없이 펼쳐진다느니 하는 말들은 전설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다음으로 노신부가 내세운 증거는 성서였다. 성서에는 깨끗하고 고귀하며 정의로운 영혼을 나타내는 흰색과, 물리쳐야 하는 어둠과 악을 뜻하는 검정 말고도, 여러 가지 색깔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대대로 옷자락에 술을 만들고 그 옷자락 술에 자주색 끈을 달게 하라”1거나 “자주와 자홍과 다홍 실, 아마실, 염소 털,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2과 같은 구절이 그랬다. 어떤 대목에서는 질병에 걸린 자의 피부를 상술하면서 ‘누런’ ‘푸르스름한’ ‘불그레한’ 등의 표현이 나타났으므로,3 그 색들이 불쾌감 내지는 더러움이나 공포와 관련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처럼 명시된 부분에서가 아니라면, 신부는 강론을 하면서도 말씀 가운데 언급된 색들에 대해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 없었고, 가끔씩 순수하게 학문적 호기심으로 그 색깔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사람들은 흰색이나 검정 때로는 이도 저도 아닌 회색 옷을 입었다. 흰 열매를 따고 검은 빵을 씹으며 회색 강물을 마셨다. 검은 불꽃에 흰색 또는 회색 고기를 구워 어느 정도 거무스름해졌을 때 먹었다. 어떤 색이 음식을 취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인지를 알지 못하고 종류마다 기준이 다른 데다 질감과 맛, 냄새와 날씨 등 다양한 변수가 존재했으므로 순전히 본능에만 의지해야 할 때도 있었다. 생활의 지혜가 부모에게서 자식한테로 이어져 쌓이기까지 배앓이와 고열로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상처를 입은 자리에 검은색 피가 흘렀다. 회색 새들이 검은 나뭇잎을 입에 물고 날아갔다.
색 없는 세계에서 사람들의 판단 능력은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수준을 유지했다. 상처에서 흐르는 검은색 물을 피라고 부르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많이 폭포처럼 흘러야 사람이 죽고 마는지는 비극적 경험이 수차례 누적된 다음에야 평균을 내어 기록할 수 있었다. 상처에서 검은색 물이 적어지면 환부가 아무는 과정이었고, 회색이나 맑은 물이 배어나면 며칠 내 완치라고 보아도 좋았다. 구토물부터 분비물 그리고 배설물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대강 비슷한 범주에서 다루었다.
색 없는 세계에서는 감정 표현 수단 또한 부족했다. 사람의 안색을 살피는 일은 무의미했고, 상대의 피부에 직접 밀착하지 않으면 그의 온도를 느끼지 못하는 만큼 서로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지, 그 감정은 발전적이고 건설적인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색 없는 세계에서 온도와 감정을 포착하려면 다양한 표정과 언어가 대체 수단이 되어야겠지만, 색이 돕지 않고서는 그 또한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거나 오해를 불식시킬 만큼 풍부하지 않았다. 모든 이의 눈에 비친 무채색의 세계는 공평하고 고요했으며 희로애락은 최소한의 종족 보존과 번식을 위해서만 미미한 수준으로 존재했다. 화가들은 회백색과 검은색으로 정물화와 풍경화를 그렸는데, 눈에 보이는 대로의 세계를 묘사하므로 어떤 미지의 풀이나 꽃을 따다가 죽은 곤충과 한데 개어서 새로운 안료를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무채색의 세계만 알고 자랐으므로 그들이 화폭에 펼쳐 놓는 기괴하거나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 또한 흑백과 회색으로만 이루어졌다.
언제부터 그리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이 세상은 신이 손가락을 잘못 스치고 지나간 결과물로 보였다. 볕에 넌 이불의 먼지를 몽둥이로 떨어내듯, 언젠가 분노와 쾌락과 무절제가 허용 한계를 넘어선 적이 있어 신이 채찍을 휘둘러 모든 것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되 다만 색깔들만 떨어낸 것 같기도 했다. 신의 징벌이 아니라면, 심술궂고 장난기 많은 마녀가 제 지팡이에 닿는 사물마다 색을 빨아들여서는 거대한 자루에 훔쳐 달아난 모양이었다.
─
1 민수기 15장 38절.
2 탈출기 25장 4~5절.
3 레위기 13장 전체.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