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소월의 사인을 둘러싼 이설
三水甲山 내 왜 왓노
한국 현대시의 터주 시인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의 사인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살과 병사로 갈려 있다. 소월은 평북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자택에서 1934년 12월 24일 오전 숨을 거뒀다. 당시 언론이 전한 부고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방현方峴 일찍이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하여 우리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든 재질이 비상튼 청년 시인 소월 김정식 씨는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바 지난 24일 아침에 뇌일혈로 급작히 별세하여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청년 민요 시인 소월 김정식 별세’, 〈조선일보〉, 1934.12.27
‘방현’은 소월의 고향인 평북 구성군 방현면을 지칭한다. 평북 주재 기자가 방현에서 기사를 타전했으니 요즘으로 말하면 ‘방현발發’이다.
이 기사가 나간 지 사흘이 지난 1934년 12월 30일 자 〈조선중앙일보〉엔 ‘민요 시인 소월 김정식 돌연 별세’, 같은 일자 〈동아일보〉엔 ‘민요 시인 김소월 별세 33세를 일기一期로’라는 제목의 부고가 전해진다.
소월은 1927년 동아일보사 평북 구성지국 경영에 실패하고 술독에 빠져 지냈다. 연고를 따져볼 때 〈동아일보〉가 그의 부음을 〈조선일보〉보다 먼저 보도하지 못한 이유가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더욱 아리송한 건 그의 사인을 둘러싼 이설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소월의 오산학교 은사인 안서岸曙 김억金億, 1895~1950?이 1935년 〈소년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언제든지 素月소월이의 생사에 對대하야 이야기하든 것을 생각하면 그의 夭折요절은 楮多病저다병의 그것이라기보다도 夭折요절을 意味의미하는 무슨 전조가 아니엇든가 하는 생각도 업지 아니하외다.
‘요절한 박행薄倖 시인 김소월에 대한 추억’, 〈조선중앙일보〉, 1935.1.23.
이에 근거해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1987년 발표한 한 논문에서 ‘저다병’을 각기병脚氣病이라고 해석했다. ‘저다楮多’는 수족병手足炳을 일컫는 우리말 ‘저다’에서 왔으며 수족병이란 요샛말로 팔다리가 퉁퉁 붓는 일종의 각기병 증세다. 김억이 소월의 사인으로 저다병을 거론한 게 풍문에 근거한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김억은 4년 후 다시 이렇게 썼다.
소월의 가냘핀 몸집이 水土수토쎄인 龜城구성 땅에 와서는 제법 몸이 나서 만년에는 뚱뚱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소월이 가늘고 야위어야 할 사람이 뚱뚱해진 것은 뇌일혈을 부르려고 한 때문인 듯싶습니다. (중략) 소월의 묘는 구성 남시에 있는데 가까운 곽산 본 고향으로 옮겨온 뒤에 돌비라도 해 세운다고 미망인은 언젠가 서울 와서 쓸쓸히 이야기하고 갔읍니다.
김억, 《여성》 39호, 1939.6
이로써 김억은 소월의 사인을 두고 저다병과 뇌일혈이라는 복합적인 소견을 내놓았다. 소월의 사인에 대한 또 하나의 이설은 소월의 3남 정호1932~2004 씨에 의해 제기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붙잡혀 거제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반공 포로로 석방된 뒤 국군으로 복무했던 정호 씨의 존재는 1981년 정부가 소월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는 과정에서 일반에 노출됐다. 그는 이후 진행된 여러 강연회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털어놓는다.
“아버님 소월의 최후는 1934년 12월 23일 저녁때의 일이었는데 그날 저녁에도 집에 돌아오시어 주무시려 하다가 고단하게 잠에 취한 어머님의 입에 은단 같은 것을 넣어 주는 것을 잠결에 귀찮은 듯 내뱉었다고 한다. 한참 주무시던 어머님이 잠결에 아버님의 몹시 괴로워하시는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잠이 깨어 아버님을 흔들어 보고 불러 보았으나 숨소리가 이상해서 곧 불을 켜고 자세히 아버님의 주위를 살펴보니 무엇인가 밤톨만큼의 무슨 덩어리 하나가 아버님의 머리맡에 떨어져 있어 주워 보니 항상 잡수시던 은단이 아니고 한 덩어리의 아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월 사망 당시 정호 씨는 겨우 두 살이었으니 이 증언은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으로 추측된다. 소월 사망 당시 부인은 4남정호 씨의 동생을 임신하고 있던 만삭이었다. 정호 씨의 증언은 소월의 아편 음독설이 유포된 계기가 되었다.
또 다른 이설은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 1966년 5월 10일~7월 1일에 걸쳐 12회 연재된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가 재야 서지학자 김종욱 씨에 의해 발굴돼 2004년 《문학사상》에 전재되면서 불거졌다. 〈문학신문〉 김영희 기자가 소월의 고향인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과 그가 숨을 거둔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일대를 현지 취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인은 1934년 구성군 경찰서의 호출을 받았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시인은 이런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 ‘참, 이런 수모를 다 겪으면서 살아 무엇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렇지 않으면 만주로 가야 하겠는데……. 여보, 당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살겠소? 다음 날 아침이었다. 부인 홍단실은 의외의 변에 억이 막혔다. 시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이미 숨을 거두었다. 부인은 시인의 베개 밑에서 흰 종이를 발견하였다. 그날 밤 시인은 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소월 서거 32주기를 맞아 기획된 이 탐방기가 게재될 무렵 소월은 북한에서 “패배적 감상주의에 젖어 현실을 극복할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한 사상적인 제약성을 가진 시인”으로 평가 절하되던 시기이다. 때는 1967년 주체사상 강화기에 접어들 무렵이다. 이와 관련, 1995년 귀순한 북한 작가 장 모당시 54세 씨의 소월에 대한 얘기는 눈길을 끈다. “1967년 당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 이후 김소월은 다산 정약용이나 연암 박지원 등의 사상·저서와 함께 봉건 유교 사상으로 낙인찍혀 연구 대상에서 아예 배제됐습니다. 그때 당 선전 분야에서는 수정주의와 부르주아 사상과 함께 봉건 유교 사상에 물든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대규모 색출 작업이 벌어졌습니다.”
장 씨는 이어 “내가 북한 중앙방송 재직 시절 김소월의 조카와 한 사무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며 “이름은 김정품당시 53세쯤으로 추정”이라고 밝혔다. 조카의 이름이 김소월과 같은 ‘廷정’자 항렬이어서 조카라기보다 사촌형제뻘로 추정되지만 그의 증언은 비교적 구체적이었다. “그 친구 고향이 정주 곽산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1967년 소월이 숙청당했을 때 그의 묘소 앞 시비는 ‘초당파’들에 의해 깨진 뒤 뽑혀 나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소월의 사인에 대해서도 자살이라고 못 박았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소월은 ‘복어알 안주’를 먹고 자살했습니다.”
이로써 저다병, 뇌일혈, 아편 음독설에 이어 복어알 음독설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소월이 죽음을 결심한 흔적은 편지에서도 발견된다. 소월은 1934년 가을, 김억에게 편지 한 통을 띄운다.
“저는 술이나 한 35배 마신 후이면 말을 아니하면 말지 어쨌든 맘나는 양樣으로 하겟다 생각이옵니다. 자고이래로 중추명월을 일컬어왓사옵니다. 오늘밤 창밧게 달빗, 월색月色, 옛날 소설 여자 다리난간에 기대여서서 흐득흐득 울며 사의 유혹에 박덕한 신세를 구슬프게도 울든 그 달빛 그 월색이 백서白書와 지지안케 밝사옵니다. 오늘이 열사훗날 저는 한 십년만에 선조의 무덤을 차저 명일 고향 곽산으로 뵈오려 가려 하옵니다.”
편지는 일종의 유서였다. 훗날 남한에 살고 있던 소월의 숙모 계희영은 당시 상황을 『소월 선집』장문각, 1970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해마다 추석이 되어도 십 년간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소월이었는데, 이번에는 곽산을 찾아와서 일일이 뒷산에 다니며 무덤의 떼가 잘 자라는지 돌보았고 허술한 무덤은 잘 다듬어 떼를 입혔다. 이러한 소월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왜 저러고 다니지?’ 했을 뿐이었다. 소월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고향에 와서 하직인사를 했던 것이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소월은 죽음에 앞서 선산을 돌보는 등 주변 정리를 했던 것이다. 이 무렵 소월은 최후의 시 「삼수갑산三水甲山」을 《신인문학》1934.11에 발표한다. 이 시는 그가 죽기 약 석 달 전에 쓴 작품이지만 이보다 앞서 소월은 김억에게 보낸 서신 속에 시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을 써넣었고 김억은 소월 사후 《신동아》40호, 1935.2에 소월 자필의 이 시를 원본 그대로 영인해 실었다. 이 시는 원래 김억이 《삼천리》1934.8에 발표한 「삼수갑산三水甲山」이란 시를 차운次韻한 소월의 화답시였다.
三水甲山 내 왜 왓노 三水甲山 이 어듸뇨
오고 나니 崎險타 아아 물도 만코 山 쳡쳡이라 아하하
내故鄕을 돌우가자 내고향을 내 못가네
三水甲山 멀드라 아아 蜀道之難이 예로구나 아하하
三水甲山이 어듸뇨 내가 오고 내 못가네
不歸로다 내故鄕아 새가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 게신곳 내고향을 내못가네 왜못가네
오다 가다 야속타 아하 三水甲山이 날 가둡엇네 아하하
내 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三水甲山 날 가두었네
不歸로다 내 몸이야 아하 三水甲山 못 버서난다 아하하
김소월,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
함경도의 삼수와 갑산을 지칭하는 ‘삼수갑산’은 하늘 나는 새조차 찾지 않는 깜깜한 오지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어려운 곳으로 통한다. 삼수갑산은 완전 고립의 공간이다. 소월은 자신의 신세를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삼수갑산에 갇혀 있는 것에 비유하며 꿈에 그리던 고향에 가닿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탄하고 있다. ‘아하하’라는 반어적이고 냉소적 어조의 반복은 호방하면서도 애절한 정서를 더욱 심화시킨다. 소월의 이러한 상실감과 비애는 그가 두 살 때1903 부친이 정주와 관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고, 그로 인해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뒤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소월은 가세가 몰락하면서 점차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마저 상실해 버렸다는 자각 속에서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삼수갑산」에 담아냈다.
소월 슬하의 자식은 북한에 남은 3남 1녀 외에 월남한 1남 1녀가 더 있었으니 큰딸 구생은 한국전쟁 피란 중에 병사했고, 3남 정호 씨도 작고함으로써 이제 그의 최후를 증언할 이는 더 남아 있지 않다.
북한의 〈문학신문〉 탐방기에 따르면 장남 준호는 고향 정주 곽산에서 목수로 일했고 둘째 은호는 평북 경공업총국의 상급지도원이었다. 유복자였던 넷째아들 낙호는 평양의 설계연구기관의 연구사이고 손자들은 고향 인근 문장리에 산다고 했다. 3남 정호는 18세 때 한국전쟁이 터지자 어머니 홍단실로부터 “너만이라도 남으로 가라”는 말을 듣고 인민군으로 남하하던 중 포로로 붙잡혔다가 인천형무소, 부산과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반공 포로로 풀려났다.
이후 국군에 자진 입대해 1955년 제대한 그는 친척의 주선으로 교통부 임시직에 취직하다가 반려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여전히 곤궁했던 그는 1958년 〈동아일보〉에 자신이 소월의 친자임을 알리기에 이른다. 그의 딱한 사정은 서정주, 박종화, 구상 등에게 전해졌고 당시 국회의장이던 이효상에게 추천서를 써 준 덕분에 국회에 어렵사리 취직을 했다. 하지만 신부전증이 악화된 아내를 돌보기 위해 이내 퇴직하고 만다. 현재 남한에 있는 소월의 혈육은 정호 씨의 딸 김은숙충남 아산 거주과 아들 김영돈인천 부평 거주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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