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밤
우리는 한때 체육관으로 쓰던 곳에서 잠을 잤다. 래커 칠을 한 나무 바닥 위엔 한때 그곳에서 열리던 경기들을 위한 직선이며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농구 그물은 없었지만 링은 여전히 제자리에 달려 있었다. 실내를 빙 둘러 관중석으로 쓰던 발코니가 있었는데 그곳에 있으면 추잉 껌의 달콤한 흔적과 관전하는 소녀들의 향수 냄새, 그 속에 어우러진 자극적인 땀 냄새의 흔적이 희미하게 코 끝에 닿았다. 사진을 보면 여자 아이들은 처음에 펠트 스커트를 입다가, 나중에는 미니스커트를, 그 다음에는 바지를 입었고, 훨씬 더 훗날에는 한쪽 귀에만 귀걸이를 하고 머리에 요란한 초록색으로 군데군데 물들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댄스 파티도 열렸을 법한 곳이었다. 음악의 여운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머무른다. 덧쓰고 지우고 그 위에 다시 덧쓴 양피지의 글씨처럼 영영 들리지 않은 소리들이 겹겹이 포개어져 있고, 스타일 위에 스타일이 겹치고, 나지막히 깔리는 드럼 소리, 허허로운 흐느낌, 휴지로 만든 꽃다발, 마분지로 만든 악마들, 춤추는 사람들 위로 빛의 눈발을 흩뿌리며 빙빙 돌아가는 유리의 공들.
방 안에는 옛날의 섹스와 고독과, 형체도 이름도 없는 뭔가를 기다리는 기대가 있었다. 그 갈망이 기억난다.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던 어떤 일을 기다리던 그리움이. 그러나 그때 그 순간 그네들의 손이 옴폭 팬 등허리를 만지고, 저 뒷마당에서, 주차장에서, 들썩거리는 육신 위로 희미한 영상이 명멸하던 소리 죽인 TV 시청실에서 우리 몸에 그 손들이 닿은 후로 모든 것이 딴판으로 달라져 버렸다.
우리는 미래를 갈망했다. 우리는 어쩌다 터득하게 되었을까? 영영 채울 수 없는 허기를 갈구하는 이런 재능을, 도대체 어디서 배워버린 걸까? 갈망이 공기 중을 떠돌았다. 그리고 지금도 대기 중에 감돌고 있다. 서로 이야기도 나눌 수 없도록 멀찍이 간격을 두고 일렬로 배치해 둔 군용 간이 침대 위에서 잠을 청할 때면 허기는 공중을 떠돌다 무심코 표면으로 자주 떠올랐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플란넬 시트를 깔고 군용 담요를 덮고 자는데, 담요는 구시대 것이어서 아직도 U.S.라는 글자가 찍혀 있다. 옷은 곱게 개켜서 침대 맡 등받이 없는 의자 위에 놓아두었다. 순찰을 도는 사라 ‘아주머니’와 엘리자베스 ‘아주머니’는 가죽 혁대에 달린 가죽 끈에 가축용 전기 충격기를 매달아 덜렁거리며 다녔다.
하지만 그들에게 총은 없었다. 제아무리 ‘아주머니’라도 총을 덥석 맡길 만큼 신뢰받지는 못했다. 총을 지닐 수 있는 건 ‘천사’ 중에서도 특별히 뽑은 간수들뿐이었다. 그 간수들도 호출 없이는 건물 안으로 발도 들여놓을 수 없었고, 우리 또한 산책할 때가 아니면 외출이 금지되어 있었다. 산책은 하루 두 번,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축구장을 도는 것인데, 경기장 주위엔 철조망이 달린 사슬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다. ‘천사’들은 등을 돌리고 철조망 바깥에 서 있었다. 그들은 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솔직히 약간 다른 감정도 없지는 않았다. 그들이 쳐다봐 주기만 한다면. 말을 걸어볼 수만 있다면. 그러면 뭔가 주고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아직 몸이 있으니까. 그게 우리가 꿈꾸는 환상이었다.
우리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서로 속삭이는 법을 배웠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팔을 뻗어 허공을 가로질러 서로의 손을 만질 수 있었다. 머리를 바짝 붙인 채로 옆으로 돌아누워 서로의 입을 지켜보며 입술을 읽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침대에서 침대로 이름을 교환했다.
알마. 재닌. 돌로레스. 모이라. 준.
2장
쇼핑
의자 하나, 탁자 하나, 등 하나. 머리 위 하얀 천장에는 화환 모양의 부조 장식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덕지덕지 석고 칠을 한 텅 빈 공간이 보였다. 그곳은 얼굴에서 눈알을 뽑아낸 자리 같았다. 틀림없이 전에는 그 자리에 샹들리에가 있었을 것이다. 밧줄을 걸 수 있을 만한 물건은 그들이 모조리 들어내 버렸다.
창문 하나, 하얀 커튼 두 장. 창문 아래 작은 방석이 놓은 걸상. 창문이 살짝 열려 있을 때면(어차피 창문은 활짝 열리지 않는다.) 바람이 통해 커튼이 흔들린다. 나는 의자나 창가 자리에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이런 광경을 바라볼 수 있다. 유리창에 비친 햇살이 마룻바닥으로 툭 떨어지곤 한다. 좁고 긴 나무 널이 깔린 마룻바닥은 공들여 닦아서 광택제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다. 마룻바닥에는 천을 땋아 만든 타원형 바닥 깔개가 하나 있다. 그들을 이런 양식을 아주 좋아한다. 여자들이 여가를 선용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물건을 재활용해서 손수 만든, 고풍스러운 민속 공예. 전통적 가치로의 복귀. 낭비가 없으면 부족도 없다. 낭비하지도 않는데, 어째서 나는 부족한 걸까?
의자 위의 벽에는 그림이 한 장 걸려 있다. 액자 틀은 있지만 유리는 없다. 인쇄된 꽃 그림, 푸른 붓꽃들, 수채화다. 꽃들은 아직 허락된다. 혹시 우리 모두가 똑같은 꽃 그림, 똑같은 의자, 똑같은 하얀 커튼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정부 보급품으로?
군대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리디아 ‘아주머니’는 말했다.
침대 하나. 싱글, 적당히 딱딱한 매트리스에 자투리 털들을 모아 넣은 하얀 침대보. 침대에서는 그저 잠만 잘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면 잠도 못 자든지.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지금은 다른 모든 물품들처럼 생각도 레이션통조림으로 만든 군용 즉석 식량 ─ 옮긴이식으로 해야 한다. 생각하면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일이 너무 많다. 생각이 많으면 끝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줄어드는데, 나는 되도록이면 끝까지 버틸 작정이다. 푸른 붓꽃의 수채화 액자에 왜 유리가 끼워져 있지 않은지, 창문은 왜 활짝 열리지 않으며 어째서 안전유리가 끼워져 있는지 나는 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탈주가 아니다. 어차피 멀리 도망갈 수는 없으니까. 뭔가 날카로운 흉기를 손에 넣기만 하면 우리가 우리 몸에다 활짝 그어버릴 또 다른 탈출구가 겁나는 거다.
그리하여. 이런 자질구레한 세부 사항들을 제외한다면 여긴 대학의 손님 접대실이라 해도 좋았다. 물론 귀빈과는 거리가 먼 손님들을 위한 방이라고 해야겠지만. 구시대로 치자면 형편이 어려워진 여자들이 즐겨찾는 싸구려 하숙집 셋방처럼 보이기도 했다. 형편이 어려워진 여자들이라, 따지고 보면 그게 바로 지금의 우리들이다. 하긴 형편이란 게 그나마 남아 있기나 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만.
그래도 의자, 햇살, 꽃들. 이런 것들을 쉽사리 무시해선 안 된다. 나는 목숨이 붙어 있고, 살아가고 있고, 숨 쉬고 있다. 꼭 모아쥐고 있던 두 손을 펴고 햇살을 받아본다. 내가 있는 이곳은 감옥이 아니라 특혜의 장소다. 흑백 논리를 사랑하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말대로.
시간을 재는 종이 울리고 있다. 이곳에선 시간을 옛날의 수녀원처럼 종소리로 알린다. 또한 수녀원이 그러했듯이 거울도 몇 개 없다.
의자에서 일어나 발을 뻗어 햇살 속으로 밀어넣는다. 발을 감싼 빨간 구두는 굽이 낮지만 그건 춤을 추기 위한 게 아니라 척추를 보호하기 위한 거다. 빨간 장갑은 침대 위에 놓여 있다. 장갑을 집어들고 손가락을 하나씩 밀어넣어 손에 낀다. 얼굴을 감싼 가리개를 제외하면 옷은 전부 붉은 색이다. 피의 색, 우리를 정의하는 색이다. 치마는 발목까지 오는 풍성한 주름 스커트이고, 드레스엔 가슴까지 이어지는 판판한 앞판과 손목을 덮는 긴 소매가 달려 있다. 하얀 가리개도 규정에 따라 지급된 보급품으로서 시야를 제한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우리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는 목적도 있다. 나는 한번도 빨간 옷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빨강은 내 색깔이 아니다. 나는 쇼핑 바구니를 집어들고 팔에 걸친다.
방문(내 방이 아니다, 내 방이라고는 죽어도 말하기 싫다.)은 잠기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제대로 닫을 수도 없다. 방문을 나서면 번들거리는 복도가 나오는데, 복도 한가운데로 탁한 분홍빛 카펫이 길게 깔려 있다. 카펫은 숲속에 나 있는 오솔길처럼, 왕좌로 이어지는 주단처럼 내 갈 길을 일러준다.
카펫은 꺾어져 계단을 내려가고 나 역시 그걸 따라 내려간다. 한 손으로는 목제 난간을 붙잡는다. 한때는 이 난간도 살아 있는 나무였겠지만 수세기를 더 지난 지금은 하도 손때를 타 반질반질 따뜻한 광택이 날 지경이 되었다. 이 집의 건축은 후기 빅토리아 양식으로, 부유한 대가족을 위해 지은 저택이었다. 복도에는 할아버지 같은 괘종시계가 서서 시간을 조금씩 배급하고 있고 다음에는 엄마처럼 인자한, 생활의 냄새가 감질나게 풍기는 좌실坐室로 통하는 문이 나온다. 나는 결코 의자에 앉을 수 없고 서 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하는 좌실. 복도 끝, 현관문 위에는 색유리로 된 부채꼴 모양의 채광창이 있다. 빨갛고 파란, 꽃무늬.
복도 벽에는 그나마 남아 있는 거울이 하나 걸려 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싼 하얀 가리개로 그리 눈길을 이끌면, 거울을 볼 수 있다. 물고기의 눈처럼 둥근 볼록 거울이라서, 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일그러진 그림자나 뭔가의 서투른 패러디처럼 보인다. 빨간 옷을 입은 동화 속 등장인물 같은 모습으로, 위험스런 부주의의 찰나를 향해 걸어 내려가고 있는 나. 흠뻑 피에 젖은 수녀.
계단 맨 아래쪽에는 모자와 우산을 거는 스탠드가 있었다. 나무를 구부러뜨려 만든 것으로서 길고 둥근 나무 살이 고리 모양으로 부드럽게 위로 휘어져, 활짝 벌린 고사리 잎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속에는 우산들이 몇 개 들어 있었는데, 검은 색은 사령관의 것, 파랑색은 사령관 ‘아내’의 것, 그리고 내 것은 빨강색이다. 빨간 우산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나간다. 아까 창 밖을 보았기에 날씨가 맑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사령관 ‘아내’는 좌실에 있다. 앉아 있지 않을 때도 있다. 가끔씩 방 안을 왔다 갔다하는 그녀의 발소리가 들린다. 무거운 발소리 한 번, 가벼운 발소리 한 번, 그리고 탁한 장밋빛 카펫 위를 살며시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
복도를 따라 걸어, 좌실과 식당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 복도 끝의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이곳에선 더 이상 광택제 냄새가 나지 않는다. 리타가 안에 있다. 그녀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하얀 에나멜로 칠해진 식탁 옆에 서 있다. 늘 입는 ‘하녀’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구시대 외과 의사들의 수술복처럼 둔탁한 녹색이었다. 길고 몸매를 감춰주는 드레스의 형태는 내 옷과 상당히 비슷하지만, 가슴받이가 달린 앞치마가 있는 대신 하얀 가리개와 베일은 없었다. 바깥에 나갈 때는 베일로 얼굴을 가렸지만, 사실 ‘하녀’의 얼굴이야 드러나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붙여 갈색 팔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빵을 만들고 있었는데, 지금은 반죽 덩어리를 치대면서 주물러 모양을 만드는 마무리 작업중이었다.
리타는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정말 반가워서 그러는지 그냥 나를 봤다는 뜻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그녀는 밀가루가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고 토큰 책을 찾아 부엌 서랍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토큰 세 장을 찢어 내게 건네준다. 조금만 웃음기를 띠면 친절해 보일 텐데. 하지만 그녀의 찌푸린 얼굴은 사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다만 빨간 드레스와 그 옷이 상징하는 의미를 싫어할 뿐이다. 내 근처에 있으면 질병이나 불행 따위를 옮을까 봐 기분 나쁜 것뿐이다.
가끔 나는 닫힌 문 뒤에서 나는 소리를 엿듣곤 한다. 구시대의 나라면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다. 행여 들킬까 봐 오래 엿듣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자기라면 절대로 그렇게 몸을 더럽히지 않을 거라고 리타가 코라에게 말하는 걸 엿들은 적이 있다.
누가 아줌마한테 그러라고 하든가요? 코라가 말했다. 그리고 그런 처지가 된다 한들 뭘 어쩌시겠어요?
‘콜로니’로 가면 되지. 리타가 말했다. 선택의 여지는 있잖아.
‘비非여성’들하고 같이 살라는 말이세요? 죽도록 굶주리고 말도 못할 고생을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코라가 말했다. 정신 차리세요.
그네들은 콩깍지를 까고 있었다. 문은 거의 닫혀 있다시피 했지만, 딱딱한 콩깍지가 금속 용기 속으로 떨어지며 가볍게 짤랑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리타는 항의하는 불평인지 동의하는 한숨인지 알 수 없는 소릴 냈다.
아무튼 그 여자들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코라가 말했다. 최소한 말은 그렇게들 하잖아요. 내가 열 살만 젊고, 난관 수술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죠. 소위 말하는 중노동도 아니잖아요.
내가 아니라 천만다행이지 뭐야 하고 리타가 말하는 순간 나는 문을 열어젖혔다. 그네들의 얼굴에는 등 뒤에서 험담을 하다가 들켰을 때 여자들이 흔히 짓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한편으로 도발적인 표정,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그날, 코라는 보통 때보다 유달리 더 친절하게 굴었고 리타는 평소보다 훨씬 더 무뚝뚝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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