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여혐 전성시대
여자도 군대 가라?
군대에서 애들과 욕하고 싸우다가 간부한테 걸려 모두 얼차려를 받게 됐다. 자기 차례가 돌아왔을 때 그는 비로소 전역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중대장에게 말했다. “저 군인 아닌데요?” 그 순간 잠이 깼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군대 꿈 에피소드다. 군대 다녀온 남자들은 시시때때로 군대 꿈을 꾼다. 나이가 들어도 이건 마찬가지여서, 제대한 지 20년이 넘은 아들이 다시 군대에 가는 꿈을 꿨다고 투덜거리자 70대 초반인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난 제대한 지 4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군대 꿈을 꾼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가 차별받는다는 피해의식의 상당 부분은 군대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군대의 필요성은 절대적이지만, 한창 때인 20대의 2년을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곳에서 보내야 하는 건 억울한 일일 수 있다. 군대에서의 경험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수십 년이 지나도 군대에 가는 꿈을 꿀까. 그 과정에서 잉태된 피해의식은 일차적으로 군에 가지 않은 남자들에게 향한다. 아들 둘이 군에 가지 않은 것이 대통령 선거의 향방을 갈랐을 정도로 이에 대한 분노는 크다. 하지만 소위 특권층의 병역 면제는 이따금씩 드러날 뿐이어서 이들의 분노를 모조리 담아내기엔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예비역들의 분노는 여성들에게로 향한다. 인터넷에 남녀 대결을 부추기는 기사가 올라올 때면 이들은 댓글란을 장악한 채 울분을 쏟아낸다.
기사 내용: 20대 여성의 취업률이 남성을 앞질렀습니다!
댓글: 여자도 군대 가라!
기사 내용: 우리나라 남성들이 OECD 국가들 중 가사노동 시간이 가장 적다고 합니다.
댓글: 아니꼬우면 여자도 군대 가든지.
기사 내용: 여성 소득, 남성의 64.7%에 불과 … 소득 격차 심화
댓글: 군대나 갔다 오고 이런 소리를 해야지!
여성을 향한 분노가 뜬금없는 것은 병역법상 여자는 군대에 갈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법을 만든 사람들은 100% 남자였으니, 병역법을 고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애꿎은 여성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건 번지수가 틀렸다. 게다가 인터넷의 여론과 달리 남성 대부분은 여성이 군대 가는 것을 진짜로 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군복무로 잃어버린 청춘을 보상 받는 것일 게다. 하지만 2년 동안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대가는 2016년 기준으로 이등병 14만 8800원, 병장은 19만 7000원인 월급이 전부다(그나마도 이건 2016년에 인상된 금액이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면 군필자가 공무원 시험을 볼 때 부여받는 2%의 군가산점인데, 다들 알다시피 군가산점은 1999년 헌재에서 위헌 판결을 받음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예비역들이 여성들에게 본격적으로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한 것은 사실 이 때부터다. 이것 역시 번지수가 틀렸다. 군복무를 명령한 주체는 병역법이지 여성들이 아니다. 원칙대로 한다면 남성들을 징집하는 정부가 그들에게 보상을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정부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간 존재했던 군가산점은 군에 가지 않는 여성과 장애인의 권리를 빼앗아 남성들에게 돌려주는, 정부 입장에선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질 나쁜 보상책이다. 공무원 시험에서 2%의 가산점은 당락에 큰 영향을 미치며, 군가산점이 시행된다면 여성과 장애인은 공무원으로 임용되기가 힘들어진다. 헌법재판소에서 군가산점이 위헌 판결을 받은 이유는 사회적 약자의 취업을 진입 단계에서 막는다는 점이 고려된 결과다.
군가산점이 질 나쁜 보상책인 이유는 또 있다. 군필자 중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비율은 극히 낮으며, 한 연구소의 시뮬레이션 결과 군가산점의 혜택을 보는 사람은 매년 110명에 불과하다. 제대자의 숫자가 매년 수십만에 이르는 현실을 감안하면 군가산점은 상징적인 혜택일 뿐, 제대로 된 보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헌법재판소는 군가산점 위헌 결정을 하면서 “다른 보상책을 강구하라”고 국가에 요구했다. 그러나 그 뒤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우리 정부는 군가산점 부활 말고는 다른 방법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방법은 없을까? 첫 번째가 군복무자들이 받는 월급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 들어 사병 월급을 40만 원으로 올리기로 했다. 게다가 2020년에는 70만 원으로 올리겠다니, 남성들의 박탈감 해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2016년 기준으로 6000원대 수준인 최저임금을 고려해도 이 액수가 ‘충분’하진 않을 것 같다. 이왕 올려주는 김에 100만 원씩 주면 어떨까? 50만 명에게 한 달에 100만 원씩 지급한다면 대략 6조 원 정도가 드는데, 정부가 정말로 군복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따로 재원을 마련해 합당한 월급을 지급하는 게 옳다. 예를 들어 2013년 기업들에게 깎아준 법인세가 9조 원에 달하는데, 이것만 원상 복구해도 월급을 150만 원씩 줄 수 있다.
둘째로, 징병제 대신 모병제로 전환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소수 정예를 뽑아 충분한 월급을 주면서 5년 동안 복무하게 하고, 군에 가지 않는 남자들에게는 매년 일주일씩 제대로 된 예비군 훈련을 받게 함으로써 유사시에 대비한다면 50만 대군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대신 군복무를 안 하는 사람들에겐,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직장 생활을 하는 2년 동안 얼마씩의 국방세를 징수함으로써 모병제의 재원을 충당하면 될 테고 말이다.
이런 제안들이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지금처럼 남성들이 징집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이다. 남성들은 정부에 군복무 2년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고, 징병제 말고 다른 대안이 뭐가 있는지 연구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목소리를 내야지 지금의 제도가 바뀐다. 군 생활에 청춘을 바쳤다는 이유로 애꿎은 여성들에게 그 분노를 쏟아내기보다 그 편이 훨씬 더 낫지 않겠는가?
여성들도 해야 할 일이 있다. 군에 간 젊은이들이 이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임을 인정하자. 여성들 가운데는 휴가 나온 군인들을 그리 반기지 않는 이가 많은데,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물귀신 작전을 쓰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을 듯하다. 군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적극 앞장서자. 재미가 아무리 없어도 제대자들이 하는 군대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자. 군대도 안 가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겠는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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