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
─ 블랙박스요? 내비게이션 말고요?
너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가게 바깥에 쓰여 있는 내비게이션과 블랙박스의 글씨 크기 차이를 상기시켜주듯.
─ 블랙박스요. 나 같은 기계치도 다루기 쉬운 걸로.
올 데가 아닌 데를 온 것 같다는 생각에 말을 우물거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겠다는 듯 너는 조금 더 낮은 음성으로 확인했다.
─ 블랙박스요, 사장님. 차는 가지고 오셨죠?
너는 종이상자가 벽면 가득 천장까지 쌓여 있는 곳으로 목을 돌려 뭔가를 가리켰다.
─ 요샌 내비게이션 겸용 블랙박스도 나와요. 비싸서 그렇지.
나는 복잡한 건 필요 없다고 말했다. 비싼 것도.
─ 중국산도 괜찮아요. 디자인은 좀 떨어지게 나와도 전자제품 생긴 거 보고 사는 건 아니잖아요. 기본기능만 확실하면 되죠. 고장날 게 별로 없어요. 가장 중요한 건 아주 저렴하다는 거죠.
나는 그 중국산 블랙박스가 얼마나 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국산 블랙박스의 가격도 알아두고 싶다고 했다.
─ 사장님은 전후방 투 채널에 주차중 녹화기능까진 필요 없고 해상도는 중간 정도면 되겠는데요. 저기 십만 원짜리면 충분하겠네요.
네가 일어섰다. 갑자기 기둥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키가 나보다 한 뼘, 아니 최소 반 뼘은 큰 것 같았다. 너는 긴 팔을 뻗어 선반에 있는 종이상자를 꺼내서 자리에 앉았다. 네가 상자를 열려는 순간 밖에서 내 또래의 남자가 들어와 물었다.
─ 밖에 서 있는 그랜저가 사장님 차예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 아이구, 연식은 십 년도 훨씬 넘었던데 아직도 새 차 같네요. 차를 되게 깨끗하게 조심해서 타셨나봐. 아끼고 정든 차일수록 기왕이면 블랙박스도 좋은 걸 다세요. 좋은 기계를 사면 다른 차 사도 그 차에 기계를 옮겨 달면 되거든요.
그 차는 세 달 전까지는 중학교 동창 독고태원의 것이었다. 태원은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 때 ‘위기는 기회’라면서 사업을 시작해 부도를 내기까지 친가, 외가, 처가, 친인척, 동창, 친구, 직장 동료, 군대 동기, 고향 선후배 등등 돈 꾸어줄 사람을 찾아 동분서주하다가 자신의 차에서 이십 미터쯤 떨어진 비탈 아래에서 두개골이 파손된 채 발견되었다. 차는 멀쩡했다. 자동차 전용도로의 갓길에 멈춰 있었고 엔진은 사망 추정시간 두 시간 전부터 꺼져 있었다. 경찰은 차의 연료통에 기름이 전혀 없었노라고 했다. 태원의 주머니에서 나온 지갑에는 잔고가 없는 체크카드와 유효기간이 지난 신용카드 다섯 장, 스무 장쯤 되는 명함이 있었다.
─ 돈이 없어서 기름을 제때 못 채워가지고 다니다가 다리 위에서 기름이 떨어진 게 틀림없어요. 책임보험밖에 안 들었으니까 보험사에서 주유 서비스 같은 것도 못 받고, 새벽이라 지나가는 도로공사 차도 없었고. 이럴 때 차 밖에 나가서 얼쩡대봐야 졸음운전이나 음주운전하는 차에 치여 죽기 딱 좋은데. 비상등 켜고 앉아서 기다릴 것이지.
순찰차의 경찰관이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 요약하고 난 뒤 태원의 아내는 자신의 시누이가 아니라 남편의 친구이자 채권자 가운데 하나인 내게 쓰러졌다. 나는 도대체 두 사람이 무슨 관계냐는 듯 경찰, 시누이가 수상하게 바라보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녀를 경찰차의 뒷자리에 태웠다. 태원의 차는 견인되어 경찰서 앞마당까지 따라왔다.
─ 차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경찰관이 진술조서를 프린트하며 묻자 태원의 아내는 경찰이 아니라 나를 향해 차를 좀 부탁한다고 했다. 자신은 차를 운전하지 못하고 남편 생각이 나서 그 차를 보기조차 두렵다고 했다. 그녀는 태원이 내게 진 빚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고 자신의 남편이 죽기 일주일 전 내게 더 이상 돈을 빌려줄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얼마나 지독한 욕설을 퍼부어댔는지 모르고 있었다. 사흘 뒤 영결식장에서 그녀의 여동생이 조금 더 확실하게 언니의 뜻을 전했다. 망설이던 끝에 그 차를 받아온 게 보름 전이었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거나 녹음을 하거나 메모를 하는 건 주의가 분산되고 위험하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블랙박스를 달면 입으로 말만 하면 원할 때 그걸 다시 돌려볼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내 삶, 내가 모르는 의식의 변화를 지켜보는 게 가능해질 것 같았다. 가령 내가 죽을지도 모를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에 어떤 표정일지, 그런 사고가 어떻게 일어나고 또 어떻게 내가 모르는 채로 아슬아슬하게 사고를 모면하는지 알고 싶었다. 내가 그 차의 전 주인처럼 제 운명에 잡아먹히는 순간을 블랙박스가 기록한다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으로 그 기록을 볼까. 어쨌든 블랙박스가 있고서야 그 모든 흥미로운 일이 가능해질 것이었다.
가게 주인은 네가 꺼냈던 종이상자를 치우고 가게 앞쪽에 진열돼 있던 블랙박스를 가지고 왔다.
─ 보자, 이게 요새 새로 나온 최신형이에요. 이건 국내 블랙박스 전문업체가 전량 국내 공장에서 생산한 거예요. 전후방 카메라에 실내녹화 다 되고 고해상도, 화각 이백이십 도, 터치 엘시디 달고 메모리도 상시녹화 때 쓰는 거 따로, 주정차 때 쓰는 거 따로예요. 배터리 방전 방지기능에다가 주차 감시, 고온 보호모드까지 있어요.
─ 얼만데요?
─ 이렇게 여러 가지 최신 기능에 최상급 해상도, 메모리 용량 빵빵한데도 이십오만 원밖에 안 합니다. 제휴카드 할인받고 육 개월 무이자 할부에 세이브 포인트 하면 부담도 없어요.
─ 난 그렇게 비싸고 좋은 거 안 써도 되는데……
가게 주인은 너와는 대조적으로 작고 영리하고 끈질겼다.
─ 싼 맛에 중국제 찾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도 팔긴 하지만, 화질도 후지고 언제 고장날지 몰라요. 저만 망가지면 좋은데 멀쩡한 차 배터리까지 방전시켜버린다니까. 그런 싸구려 달아봤자 고장나면 우리만 욕 들어먹고 고치는 값이 더 들어요. 좋은 차에 좋은 걸 다셔야죠.
차 안에 번개탄을 피우더라도 내가 죽어가는 과정이 고급 제품으로 고해상도로 찍히는 편이 싸구려로 흐릿하게 보이는 것보다는 더 극적이고 모양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걸 달아달라고 했다.
너는 가게 주인이 시키는 대로 새 종이상자를 가지고 와서 내용물을 꺼냈다. 네가 밖에 있는 차에 블랙박스를 장착하러 간 사이, 가게 주인은 내게 제휴카드가 없으면 이참에 하나 만들라고 했다. 나는 순순히 카드 발급 신청용지를 달라고 했다. 내가 신청 양식을 작성하는 동안 너는 내 차에 블랙박스를 장착했고 가게 주인이 치과에 간다면서 자리를 비우자 상담용 테이블로 와서 나와 마주앉았다.
─ 어? 박세권? 나하고 이름이 똑같으시네. 우리 동명이인이에요, 동명이인.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 지금 전국에 투표권 있는 박세권이 예순일곱 명 있죠. 오늘 그중 두 사람이 만났네요.
─ 아, 솔직히 내가 사장님 하도 순진하시고 사탕발림에 잘 넘어가고 하는 것 같애도 그냥 놔둘라 그랬는데, 우리 동명이인이고 하니까…… 이거 카드 결제 할부로 해서 비싼 이자 물지 마시고 일시불로 하고 포인트 할인 오 퍼센트 먼저 받으세요. 카드는 대금 청구되고 한 달 있다 해지하시면 돼요. 쓸데도 없고 연회비만 아까우니까.
너는 카드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카드 발급 신청을 하고 그 카드로 결제를 하면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색해했다. 내게는 그게 순진하게 보였다. 결제를 마친 뒤 너는 나와 함께 내 차로 가서 차의 시동을 걸고 좌우방향을 보며 녹화가 제대로 되는지 확인해주었다. 그 블랙박스에 최초로 녹화된 사람은 너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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