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사회주의자들
한 노조 간부가 자신이 숭배하는 공산주의자 레온 트로츠키를 만난 얘기로 전기기술자 청중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이때 홀린 듯 그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1936년, 스물한 살인 데이비드 코빈David Corbyn이 전기기술 견습생으로 막 입문한 때였다. 청중들의 대화는 천 마일 떨어진 스페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상황으로 옮겨갔다. 스페인에서는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농민들이 연합해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 휘하의 공화군이 저지른 잔혹 행위에 항거하며 용맹하게 투쟁을 벌이다가 올리브 농원과 고풍스러운 마을들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이보시오, 동지들.” 연사가 외쳤다.
“우리나라에서 결성된 스페인원조위원회Spanish Relief Committee를 지원해야 하오.”
방 안을 죽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데이비드에게서 멈췄다. 그가 명령을 내렸다.
“코빈, 자네가 가게!”
데이비드는 급진주의자로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교외에 거주하는 변호사의 아들로 안락한 중산층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전기기술 견습생으로 입문하면서 다른 청년 노동자들과 함께 노조에 가입했다. 그리고 동료들이 벌이는 열띤 토론에 매료되었다. 결국 그가 노조에 가입하면서 영국 정치의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그의 정치이념과 곧 그의 부인이 될 여성의 정치이념이 두 사람의 막내아들인 제러미의 정치사상을 형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정치의식이 강했지만 런던 서부에 있는 일링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어린 청년에 불과했다. 그는 명령에 따라 스페인내전구제위원회Spanish Civil War Redress Committee 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젊은이답게 당연히 스페인 전선에서 핍박받는 동지들을 떠나 자기 근처에 앉아 있던 매혹적인 아가씨에게로 옮겨갔다. 나오미 조슬링Naomi Josling도 당시에 스물한 살로 데이비드보다 한 달 늦은 1915년 6월에 태어났다. 몇 년 후 데이비드는 자신의 셋째 아들 피어스에게 그 위원회 모임에 참석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로 거기서 네 엄마를 만났다.”
그러자 어린 피어스가 “그 사람이 우리 엄만지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물었고, 이에 피어스의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피어스가 데이비드에게 장래의 아내에게 끌린 이유를 말해달라고 조르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엉덩이가 맘에 들었고 모자를 쓰고 있었지.”
제러미 코빈은 부모의 첫 만남을 조금 다르게 기억한다. 자기 지역구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코빈은 ‘투철한 신념의 사회주의자들’이었던 부모가 호번에 있는 콘웨이 홀에서 만나 동지애를 느꼈다고 했다. 또 다른 어떤 행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은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시위를 하다가 만났다. 두 분 다 평화주의자로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그의 말에 모자나 엉덩이 얘기는 없었다. 코빈답게 사적인 내용은 배제한 설명이었다.
신임 노동당 지도자는 어린 시절 얘기를 꺼린다. 그는 자신이 어느날 갑자기 런던 북부 지역에 나타났고, 어쩌다보니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고, 성장배경도 불분명하며, 첫 수십 년의 삶은 신비에 싸인 채로 내버려두기를 바란다. 사실, 오늘날의 코빈을 있게 한 건 그의 성장배경이다. 그는 전혀 사회주의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회주의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중산층 소년이었다.
코빈은 중남미에서 팔레스타인, 차고스 제도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이역만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민중들을 옹호하는 명분에 수십 년을 바쳐왔지만 그의 뿌리는 철저히 유럽이었다. 수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집안 족보에는 윌리엄, 존, 에밀리, 샬롯, 제임스, 에드워드 같은 이름들로 빼곡하다. 게다가 데이비드와 나오미의 성장배경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지만 어느 쪽도 노동자 계층의 사회적 정의를 위한 투쟁에 이끌릴 만한 성장배경은 아니다. 코빈의 가계 족보를 보면 오히려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코빈이 선출된 후 〈선데이 익스프레스Sunday Express〉는 코빈의 혈통에서 상당히 사악한 인물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1822년 글로스터셔에 사는 재봉사 집안에서 태어난 제임스 사전트James Sargent라는 인물이다. 그는 훗날 서리 주 파넘에서 구빈원을 운영했는데 이 구빈원은 당시에 “자칭 기독교 문명국이라는 나라의 수치이자 저주”라고 묘사되었다. 이와 관련해 신임 노동당 지도자는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한 첫 연설에서 이런 농담을 던졌다.
“옛날로 돌아가서 그 사람을 꾸짖지 않은 점 사과드리고 싶다.”
그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코빈 가문은 본래 프랑스 위그노로 천주교의 박해를 피해 18세기 초에 영국에 건너온 신교도였다. 그는 또한 “아마 독일에서 온 유대계의 피도 흐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도 했다. 코빈의 친조부 벤저민Benjamin도 재봉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퍽 주 로스토프트 출신 윌리엄 코빈William Corbyn과 루이자 코빈Louisa Corbyn의 7남매 중 하나였다. 윌리엄은 재단사로 성공해 마을에서 가게를 여러 개 운영했고 아들이 변호사가 되도록 뒷바라지해줄 만큼 돈을 벌었다.
벤저민은 1914년 도로시 부시Dorothy Bush와 결혼했고 이듬해 데이비드가 태어났다. 두 사람이 각각 스물아홉, 스물여덟이 되던 해였다. 도로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날, 런던 북부에 있는 뉴 사우스게이트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훗날 제러미 코빈의 지역구와 가깝다. 노퍽 주 헤더셋 출신 화학자의 딸로 태어난 도로시는 아마도 아버지가 영국 동부에 인맥이 있어 그 덕분에 로스토프트에서 초등학교 선생으로 일하게 되었을 것이다.
로스토프트에서 계약직 연습생으로 일하던 벤저민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처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런던 서부의 일링으로 이사했다. 그들이 이사한 집은 테라스가 있는 에드워드 시대 풍의 안락한 집이었다. 그는 유엔의 전신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창립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업무와 관련도니 토론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국제연맹 지지자들은 주로 참혹한 전쟁에 대한 해결책으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를 지지한 사람들로서, 벤저민의 손자인 제러미도 조부의 신념을 따르게 된다.
1945년 도로시는 세상을 떠나면서 남편에게 214파운드 6실링 3페니를 유산으로 남겼다. 벤저민은 상처 후 23년을 더 살았고 여든세 살에 세상을 떠나면서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금액인 2만 2,460파운드를 유산으로 남겼다. 거의 20년 후 그의 아들인 데이비드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산은 그보다 2만 파운드 많았지만, 실질가치로 보면 데이비드가 남긴 유산의 가치는 벤저민이 남긴 유산보다 낮다. 제러미의 큰형 데이비드 에드워드 코빈David Edward Corbyn은 자신의 친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들은 성실하고 선량한 노동자들이었다. 그리 많은 부를 상속받지도 않았다. 대부분 로스토프트에서 재단사로 일하면서 모은 재산이었다. 그분들도 아등바등 고군분투하며 살았다. 우리 친가 쪽이 특별히 유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자였다고 할 수는 없다. 할아버지가 변호사였고 변호사는 상당히 좋은 직업이기는 하지만 상류 계층 사건을 다루지도 않았다. 주로 열심히 일해서 먹고사는 노동자 계층을 상대했다. 할아버지는 일링에서 오랫동안 법률사무소를 공동운영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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