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필 그곳에
O는 덩치는 크지 않아도 강단이 있고 ‘한 성질’하게 생겼다. 찢어진 눈매와 튀어나온 광대뼈, 우뚝한 콧날이 젊은 시절 - 물론 그는 지금도 젊다고 주장하는 40대 후반이다 - ‘좀 놀았겠다’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누구든 O를 한두 차례 만나게 되면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배려가 많은 사람인지 알게 된다.
그는 화단에서 이름있는 화가이다. 그림을, 그중에서도 동양화를 그린다. 개인 전시회도 수십 회 가졌고 다채로운 수상 경력도 있다. 웬만한 사람은 그의 이름을 들으면 안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다. 좀 더 잘 아는 사람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행동에 나서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며 인물평을 전해준다. 물론 그가 그렇게 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오래된 왕복 2차선 도로와 새로 건설된 4차선 도로가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국도를 친구 C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계절은 한창 볕이 좋은 봄이었고 길 한쪽으로 유유히 따라오는 강의 푸른 물빛과 세상을 초록으로 물들이기 시작한 풀과 나무가 두 사람의 기분을 한층 들뜨게 만들었다. 그들은 물 흐르듯 이어지는 대화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여행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뒤에서 따라오는 차에서 ‘비상 깜빡이’를 켜고 ‘쌍라이트’를 번쩍거리는가 하면 간간이 경적까지 울리면서 뭔가 못마땅하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운전을 하던 C는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던 O가 거울로 뒤차를 주시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화제는 뒤에서 따라오는 차에 집중되었다.
“저놈, 저거 왜 저래?”
“뭘 잘못 먹었나?”
“아침에 누구한테 밥도 못 얻어먹고 얻어터졌나?”
“날아가는 새가 깔긴 응아에 눈탱이라도 맞았나?”
두 사람은 처음에는 만담을 하듯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은 상태임을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차선이 왕복 4차선으로 넓어졌다. 뒤차는 옆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와 두 사람이 타고 있는, 9년간 15만 킬로미터의 주행거리를 기록 중인 SUV를 가볍게 추월했다. 두 사람은 애써 그 차의 운전자를 보지 않으려 했고 C는 여전히 규정 속도를 지켜가며 주행을 계속했다. 뒤차에서 앞차가 된 그 차가 그냥 지나가는가 싶었는데 한숨 돌린 C가 실수로 상향등을 켜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앞차가 속도를 늦추고 웅크린 호랑이처럼 그들이 탄 차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더니 그들의 차가 앞으로 나서자 다시 ‘비상 깜빡이’를 켜고 ‘쌍라이트’를 작동시키는가 하면 마침내 유리창을 열고 손까지 내밀어 차를 옆으로 세우라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C가 그걸 모른 체하며 지나가려 하는데 다시 차선이 왕복 2차선의 좁은 길로 바뀌었고 그 차가 중앙선을 침범해서 추월을 하면서 앞에 나섰다. 그때부터는 시속 30킬로미터 미만으로 느릿느릿 주행하면서 그들이 탄 차가 앞질러 가는 것을 방해했다. 더 이상 그 차의 도전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 타 좀 데워봐. 더것들이 뭔데 기들 막고 행패야?”
O가 떨림을 감추기 위해 목에 힘을 주느라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우리가 뭔가 잘못하긴 했나 봐. 그래도 같이 운전하는 사람들끼리 그냥 서로 좋게좋게 이해하고 넘어가도 되겠구만 뭘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C는 되도록이면 말썽 없이 길을 갔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건 일방적인 바람일 뿐이었다. 빨랐다 느렸다 제멋대로 가던 앞차는 10여 미터 앞에 완전히 멈추었다. C는 차의 속도를 확올려 도망치는 것도 아주 잠깐 고려했다. 하지만 10년 다 된 자신의 고물차가 앞차와 같은 날렵한 최신형 승용차를 따돌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C는 체념을 하고 한숨을 쉬며 차를 세웠다. 하필이면 주변에는 오가는 차라고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여차하면 전화로 경찰에 신고를 하겠다면서 C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O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앞차의 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머리가 짧고 체격이 건장한 두 사내가 내렸다. 운전대를 쥔 C의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 똘지 마, 똘지 말라고!”
O는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스스로도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차문을 연 채 땅에 한발을 딛고 또 다른 발을 딛으려는 차에, 땅에 웬 커다란 망치 - 공사현장에서 흔히 ‘오함마’라고 불리며 기다란 손잡이 끝에 육중하고 뭉툭한 금속 덩어리가 달린 도구로 보통 망치보다 더 큰 힘을 가할 수 있어 콘크리트 거푸집 둥을 깨뜨릴 때 사용한다 - 가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절묘하게도 차와 길가 밭 사이의 틈에, 박달나무 자루를 달고 금속의 몸체에 벌겋게 녹이 슨 채.
“아니, 이게 여기 왜 있는 거야?"
말을 하면서 O는 자신도 모르게 그걸 집어 들었다. 한 손 으로 들기에는 약간 무거운 듯해서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가 오른손으로 바꿔들었다가 하면서 무게를 가늠했다. C를 돌아보며 “이게 왜 길바닥에 있을까?” 하면서 오함마를 이 손 저 손으로 주고 받기도 했다. C는 전화기에서 여전히 손을 떼지 못하면서도 “있을 만하니 있겠지. 상태가 나쁘지는 않네” 하 고 대꾸했다. O가 앞을 바라보자 아까 차에서 내렸던 머리 짧은 두 남자가 5, 6미터 앞까지 와서 더 이상 전진도 후퇴도 하지 못하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었다.
“왜요, 아더씨들! 뭐 할 말 있드세요? 있냐고?”
O는 오함마를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리다가 번쩍거리는 상대방의 승용차를 겨냥했다. 여차하면 때려 부술 수도 있다는 듯이. 그러자 두 남자 중 하나가 급히 “아녜요, 우리 그냥 지나가다가 하도 운전을 안전하게 잘하시는 것 같길래 좀 배우려고 그랬던 겁니다” 하고는 동료를 향해 눈을 껌벅거렸다. 그의 동료는 그만한 말주변조차 없는지 그저 커다란 주먹을 서로 포갠 채 서 있을 뿐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시원하게!”
어느새 C도 운전석에서 몸을 빼고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아닙니다. 날씨가 참 좋죠? 계속 안전운행 하세요!”
남자가 말하더니 동료의 어깨를 쳐서 돌려세웠다. 그들의 커다란 엉덩이가 멀어져가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들이 차를 타고 출발하고 난 뒤 한참 있다가 O는 차에 올랐다. 그의 손에는 은인과도 같은 금도끼, 아니 오함마가 들려 있었다.
“그걸 왜 갖고 들어와! 무섭게.”
C가 질겁하며 말하자 O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고마워서 그러지. 집에 가서 녹 싹 닦고 기름칠 잘하면 뭔가 작품이 될 것 같애. 마르셀 뒤샹의 작품 〈변기〉처럼. 그거 아니면 어때. 그냥 기념으로 가지고 있겠다는데.”
“그 오함마, 주인이 없는 거겠지?”
“그렇지. 누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여기에 오함마를 두겠어. 지나가던 트럭에서 떨어졌거나 했겠네.”
“하필이면 딱 그곳에.”
“그래, 하필이면. 고맙게도.”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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