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소년 임금
꼬마가 임금이 되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믿고 안 믿고에 따라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것 역시 바뀌지 않는다. 왕이 되었으니 꼬마라고 부르면 안 되나. 그럼 꼬맹이나 고놈이라고 할까. 그놈의 자식도 나쁘지는 않겠다. 내가 뭐라 부르든 그게 꼬맹이를, 아니 이 나라의 지존이며 만 백성의 어버이라는 이 나라의 임금, 왕, 성상, 주상 전하를 호칭하는 것임을 알 사람은 없다.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얼마든지 하는 법이다. 내가 아는 고 귀여운 꼬마 녀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 사랑하는 내 아우가 이 나라 임금이 됐다고 동네방네 나발을 불고 다닌다면 다들 나를 미친놈이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나 이순李焞이 미친 짓을 하기는 했다. 나처럼 장안에 호가 난 알건달에 파락호가 이 나라의 지존이 될 세자와 형제가 되다니. 비록 피를 나누지는 않았고 한날한시에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괴로움과 기쁨, 환난과 영화를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고 둘이 천지신명 앞에서 맹세를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는 서로를 형님, 아우님으로 부르자고, 누군가에게 둘 중 하나가 손톱만큼이라도 해를 입으면 남은 하나는 반드시 목숨 바쳐 끝까지 복수를 하자고…… 왜 그때 그런 어리석고 젖비린내 나는 선택을 했을까. 어릴 적부터 툭하면 시정 전기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도원결의 같은 고담을 너무 많이 들어서? 사리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어리석어서? 정말 미쳐서? 둘 다? 한꺼번에? 모르겠다. 내가 그리 정한 게 아니다. 그저 운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순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잊을 수가 없다. 꼬마를 보면 그때가 생각이 나고 그때가 생각나면 꼬마가 또 생각나니까. 기억이 되풀이될수록 그 당시에는 무심하게 지나친 세세한 부분까지 선명해진다. 사오 년 전인가. 내가 스물세 살이던 때, 내 아버지가 북벌의 대의를 품고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집을 떠났을 무렵의 나이에 나는 고작 어른들 심부름을 하러 나섰다.
미수眉叟, 허목 영감이 성균관 너머 숭교방에 가서 우암尤庵, 송시열이 어떻게 됐는지, 쉽게 말해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지락거리기라도 하는지 동정을 살펴보고 오라는 거였다. 내가 무슨 제집 똥개인가, 사냥개인가. 냄새를 맡고 오라니. 그것도 공짜로. 물론 나는 절대로 그냥은 가지 않았다. 욕을 잔뜩 뒤집어쓰고 나서야, 견디다 못해 갔다.
“에라이 똥물이 줄줄이 파도치는 똥통에 집어넣고 구더기 밥이 되도록 처박았다가 아가리에 푹 삭은 똥물을 처넣고 삼 년 뒀다가 꺼내 오마분시를 할 외입쟁이 놈아!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방구들이 꺼지도록 처자빠져서 자고 있는 거야? 너 같은 밥벌레에 반거들충이는 하늘에서 똥벼락을 맞아서 골백번 고쳐 죽어도 쌀 것이다. 당장 벌떡 일어나지 못하느냐? 하라는 심부름은 안 하고 밑창 다 빠진 기생 년 궁둥이를 오뉴월 똥개마냥 침 질질 흘리고 쫓아다니더니 사타구니에 사면발니가 옮았나보구나. 좋은 말로 할 때 일어나거라. 치도곤을 앵기기 전에.”
그러면서 물 한 바가지를 내 낯짝에 시원하게 퍼부어서 세수하는 걸 생략하게 해준 사람이 다름아닌 나의 할머니이시다. 한양에서 가장 어여쁘고 젊은 기생들을 거느린 최고의 기생방에 조선 팔도에 얼마나 많은 전장田莊이 있는지 본인도 모른다는 일대 부호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기도 하다. 물론 본인은 한양에서 가장 입과 성깔이 더럽고 손이 모질면서 하나뿐인 손자를 개차반으로도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말 나의 할머니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다 좋다. 내 관심은 할머니가 그 많은 재산 다 쓰고 죽을 것도 아닌데 언제 하나뿐인 자손인 나에게 자신의 사업을 물려줄 것인지, 어느 때에 나를 외입쟁이며 왈짜패가 아닌 진정한 남아 대장부로 인정해주느냐는 것이다.
어린 시절 세상 누구보다 더 나를 아끼고 사랑했던 시봉始峰 채동구 스승이 “네 조모는 원래 조선 천지에서 가장 아름답고 시서화에 고루 뛰어난 절세가인이었는데, 용모는 달나라의 항아요 시재는 조선의 탁문군이라고 불리었다. 네 할애비 계서당이 엄한 부모에게 꾸지람 들을까. 정실 마누라의 눈치 보느라 집안의 별당에도 들이지 못하고 대사동에 코딱지만한 살림집 하나 내주고는 부모 자식 친척 친구 사헌부 한성부 포도청 아무도 모르게 도둑놈처럼 드나들며 아들 하나를 보았는데, 계서당이 문과에 급제하고 환로에 올라서까지 쉬쉬하는 걸 참지 못하고 종내 그 집을 뛰쳐나왔지. 젊은 시절 네 조모를 한 번이라도 본 사내는 누구나 아름다움에 넋을 앗겨 수종처럼 저절로 심신이 딸려갔으니, 웬만한 사내 수백 명 찜쪄먹게 배포가 좋고 수완이 남달라서 조선에 일찍이 없는 거만의 부를 이룬 일세의 여걸이시다” 하고 귀띔해준 적이 있다. 내가 그런 대단한 할머니의 어디를 닮았는지 알쏭달쏭하다. 어쨌든 씨도둑은 못한다고 내가 아버지를 빼닮았다는 말은 들었다.
할머니는 고을 원님이었다 은퇴한 아버지의 관기였다가 속량贖良한 어머니 사이의 외동딸이었다고 한다. 그래봐야 서녀였고 사대부가의 정실이 될 수는 없었다. 쉽게 말해 내 할머니는 서녀 출신 첩이고 아버지가 서자라는 것이다. 비록 서자이긴 하나 한양 도성 성저십리 어떤 규수도 내 아버지를 한번 보면 가슴이 왈랑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할 정도로 면목이 빼어나고 글쓰기, 활쏘기, 말타기, 글씨 등 육예六藝 어느 것 하나 모자람도 없이 재능이 비상했다. 다섯 살 때부터 시를 지었고 소년 시절에 일찍 경사자집에 통달하여 소과든 대과든 장원급제를 할 실력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았으나 내 아버지는 서얼이 문과를 하여 무엇 하겠느냐며 아예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소년 시절부터 말 달리고 활쏘기와 사냥을 좋아하여 그 김에 무과에 급제하기는 했지만 좀체 등용이 되지를 않았다. 그 좋은 인물, 국량이 아깝게 산천경개 좋은 곳을 다니며 매를 팔목에 앉히고 사냥개를 몰아 사냥이나 하고 시나 지으며 좋은 세월을 보내다가 임경업 장군을 만났다. 만나자마자 단박에 서로를 알아보고 허교한 둘은 의형제를 맺어 한 사람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대장군으로, 한 사람은 재야에 숨어 있는 영웅으로 군웅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가 둘 다 야담 속 홍길동처럼 사라져버렸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 십 년 넘게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종내 아버지의 이름을 헛소리로 부르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조부가 내 손을 붙들고 이웃에 사는 시봉부터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매죽헌梅竹軒, 이완, 미수에게까지 찾아가서 제자로 삼아달라, 제 아비처럼 깃털로 날아갈지도 모르는 아이를 붙들어달라고 강청을 했던 것이다. 나를 제자로 삼으면 굳이 문도록門徒錄에 올리지 않아도 되었고 기생방을 운영하는 절세의 미녀가 암암리에 산해진미와 천하의 명주, 경국지색의 가무로 보응을 한다는 소문이 난데다가 철철이 남모르게 문간에 쌀과 면포가 배달되어오니 쉽게 나를 내칠 수가 없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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