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 새엄마의 심성이 모질고 사특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녀가 달구 아버지와 옥희 씨에게 퍼부었다는 악담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아들이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몰다가 사람을 쳐놓고서는 나 몰라라 줄행랑을 쳤는데, 어미 된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질 않는다. 하긴 달구 새엄마에게는 자신만의 상식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달구 새엄마의 상식은 남을 속이고 남을 짓밟으며 남 위에 서는 것을 돕는 상식일 게다. 무구한 열대의 하늘, 그 평온한 질서를 가만두지 못하고 기어이 먹구름을 드리우고자 하는 탐욕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알 수 없게도, 만세는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서는 사흘 만에 바로 풀려났다. 아버지의 말로는 달구 새엄마가 목욕탕 주씨 아저씨와 경찰과 교묘한 작당을 해서 사건을 축소했고 피해자인 할머니는 돈을 써서 입막음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난 만세는 보란 듯이 오토바이를 몰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어머니는 오토바이가 내는 그 요란한 굉음소리를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라고 표현하셨다.
“누군가가 또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그것은 평소 조신하고 음전한 어머니가 구사하는 말치고는 꽤나 과격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하루 종일 손뜨개질로 이 세상의 모든 비둘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은 짰다. 하지만 그 속도는 더디고 더뎠다. 하루 종일 짠다고 해도 폭과 길이가 겨우 3센티미터 정도만 늘어날 뿐이었다. 이미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어머니에게 뜨개질은 결코 만만한 노동이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물을 짜면서 어머니의 손가락은 가엾게도 하나하나 곱아들고 있었다. 허리도 몰라보게 굽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물 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안쓰럽게 바라보는 아버지를 위로했다.
“나처럼 이런 그물 짜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쵸? 다 짜고서는 특허를 내야겠어요.”
어머니의 노랫소리 역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노동요였다.
“비둘기야, 비둘기야, 예쁜 비둘기야, 그런데 왜 사람들을 못살게 구니. 훨훨 날아가라, 땅에는 내려오지 말고 하늘을 집 삼아서 훨훨 날아가라, 비둘기야, 비둘기야 예쁜 비둘기야.”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아버지는 약방에서 옛날 신문을 읽었다. 그는 사람들의 몸뿐 아니라 마음속에 깃든 병까지 고치고자 했던 상상력이 풍부한 한의사였다. 하지만 그의 상상력은 함부로 무시당하고 훼손되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환자의 맥을 짚은 게 언제인지, 그리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약을 조제한 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그 사이 약재들은 말라비틀어졌다. 아버지는 옛날 신문만을 읽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미담을 소개한 기사를 찾으면 나와 어머니에게 읽어주신다. 그리고 가끔 산책 삼아 외출을 나가서는 어김없이 세탁소 박씨나 계씨 형제, 목욕탕 주씨 등과 언쟁을 벌였다. 그 언쟁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모독을 당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식적인 가치가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원칙이 왜곡된 조건에서 훼손을 당하는 쪽은 언제나 옳은 쪽이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쪽이 자신들이 믿는 정의를 주장하기 위해서 구사하는 유일한 전략은 옳은 쪽을 욕보이고 모독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원래부터 비겁하기 때문에, 그리고 비겁에 익숙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모독하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구사한다. 나는 알고 있다. 더 이상 환자가 찾지 않는 고독한 한의사가 되어버린 아버지는 어머니의 노래를 들으면서 속으로 신음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인 나는 사랑을 하고 있고 시를 쓰고 있다. 사랑과 시는 어쩌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자랑스러워한다. 오히려 쓸모없는 것을 좇는 아들의 시간을 존중한다. 그 아들은 하루 종일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2층 자기 방에만 처박혀서 책을 읽거나 시를 쓰고 가끔은 창문을 열고 비둘기들을 향해 새총을 쏜다. 아들이 하는 짓은 세탁소 박씨나 목욕탕 주씨의 주장대로 한심하고 병신 같은 짓인지 모른다.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하고 있는 뜨개질 역시 쓸모없는 일인지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도, 그리고 뜨개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다. 정의는, 말하자면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악이 그런 것처럼 선도 지식의 종류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눈이 먼저 가서 상대의 눈과 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그 높이는 측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 순간 그냥 딱 들어맞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