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 아버지는 딱하게도 눈을 끔벅거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움츠린다. 그 모습이 겁이 많은 거북이 같다. 아, 아저씨는 이미 폭력과 불합리와 모독에 세뇌될 대로 세뇌되어 분노하는 법을 죄 잃어버린 것인가.
“나 참, 무슨 상관이야. 먹여주고 재워주는 데 이 정도도 못 시켜?”
달구 아주머니가 가시 돋친 소리로 대꾸한다.
“당신 딸이라면 그렇게 시키겠냐구요? 사람이 좀 사람다워야 할 거 아니에요!”
나는 목이 따가울 정도로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쩌면 지난 20여 년 동안 내가 냈던 소리 중에 가장 큰소리인지도 모른다. 그 기세에 달구 새엄마가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어서 나가지 못해? 여기가 어디라고, 어서 꺼져!”
“옥희 씨에게 정당한 휴식을 보장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노동청이든 신문사든 방송사든 어디든 당신이 처벌을 받을 때까지 고발하겠어요! 노동력을 착취하는 게 얼마나 큰 죄인 줄 알아요!”
힘이 없는 쪽에서 비겁에 대항하는 최소한의 전략은 그들의 비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인 듯하다. 내 입에서 나온 노동청, 신문사, 방송사, 고발… 이런 단어들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달구 새엄마의 기세가 누그러진다.
“아참, 별게 다 와서 간섭이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그렇게 내뱉고는 옥희 씨를 향해, 마지못해 하는 소리가 분명한 목소리로 “이제 그만해!”라고는 쏘아붙이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때 내 마음속에 나도 모를 격한 환희와 설움이 밀려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넓지 않은 홀을 단숨에 뛰어가 엉거주춤 서 있는 옥희 씨를 힘껏 껴안는다.
“옥희 씨, 내가 지켜줄게요.”
“고마워요.”
내 품에 안긴 옥희 씨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나는 옥희 씨의 작은 몸을 더욱 꼭 껴안는다. 옥희 씨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필시, 옥희 씨 말고는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은 열망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옥희 씨를 안은 두 팔에 더더욱 힘을 줄 뿐이다. 그러고 몇 분이 흘렀을까. 내 귀에 어떤 거친 파열음 같은 것이 들린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소리였는데, 마치 무언가가 긁히거나 부딪칠 때 들리는 파열음처럼 들린 것이다.
“지랄들 하고 있네.”
옥희 씨를 안은 팔을 풀고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만세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참에서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말 함부로 하지 마! 네 따위가 뭔데.”
나는 지지 않고 만세를 노려보며 소리친다. 나는 이미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다. 내가 옳다는 신념, 그리고 그것이 결코 불순하지 않다는 확신이 그런 자신감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나는 열대의 슬픔을 이해하고 있다. 슬픈 열대의 울분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만세가 계단을 뛰어 내려와서는 내게 달려들어 다짜고짜 멱살을 잡는다. 나도 만세의 멱살을 잡는다. 이것은 말하자면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해서다. 나를 노려보는 만세의 눈이 마치 칼침처럼이나 매섭다. 하지만 나보다 체구가 작고 힘도 달리는 만세는 내 악력에 목이 조이자 끄윽 끅 신음소리를 내뱉는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힘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이 감각, 이것은 내게는 매우 낯설고 신비한 것이다. 아, 나는 이 낯섦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이 감각은 그 힘의 주체에게 이렇게 속삭이기 마련이다. ‘와우 대단한데, 계속 힘을 써봐. 상대가 네 힘에 완전히 굴복하고 있잖아, 상대방의 표정을 보란 말야. 널 두려워하고 널 경외하고 있잖아. 네가 하라는 대로 할 거야. 더욱 힘을 쓰란 말야.’ 이런 속삭임에 설득을 당한 이는 계속 이 감각의 고양을 좇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것을 황홀이나 쾌감 따위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두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이 감각을 느끼고 귀에 들려오는 만세의 신음소리를 듣자 알 수 없게도 힘이 쭉 빠지는 걸 느낀다. 나 자신이 면구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고 이내 온몸에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나는 만세의 멱살을 잡은 손을 슬그머니 풀어버린다. 만세가 분한 얼굴로 씩씩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두고 봐!”라고 소릴 지르고는 밖으로 뛰쳐나가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