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창가 구석진 자리. 내가 들를 때마다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탁자 한쪽에는 조간신문과 커피잔, 그리고 생수병. 팔순에 가까워 보이는 노인은 늘 책을 읽고 있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책을 펼친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실루엣이 그렇게 단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은 작은 자를 대고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곤 했다. 두 시간 가까이 꼼짝 않고 읽기에 몰두했다. 때로 반신상半身像처럼 보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찾아가는 카페가 있다. 인테리어가 소박하고 자그마한 뒤뜰에는 파라솔이 몇 개 펼쳐져 있다. 점심시간을 피하면 빈자리가 많다. 도심의 고층빌딩 숲에 숨겨놓은 ‘비밀의 정원’ 같은 곳이어서 드나들 때마다 재개발 광풍에 휩쓸리지 않았으면 하고 혼잣말을 하곤 한다. 얼마 전부터는 매번 ‘책 읽는 노인’을 볼 수 있어 카페가 그 자리에 그대로 버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간절해졌다.
대학가에서 주택가까지 도처에 카페 간판이 내걸리는 것을 보고 한때 의아해한 적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거리게 됐다.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다.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무실이자 응접실이고 공부방이자 집필실이다. 가족 형태와 주거 공간이 크게 바뀌면서 카페의 기능은 훨씬 다양해졌다. 카페는 일과 휴식, 나와 타인, 낮과 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 있는 경계의 공간이다.
개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카페와 같은 사적 공간을 마련한다. 사회적 압력을 피할 수 있는 사적 영역이 없다면 현기증 나는 이 ‘복잡계’에서 생존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밀실에서 자기와 만날 수 있어야 광장으로 나갈 수 있다.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밀실의 밀실다움이다. 고시원, 옥탑방, 반지하, 원룸을 바람직한 밀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고독의 공간이 아니라 고립의 공간이기 십상이다. 다른 하나는 광장과 거리, 공원과 같은 공적 영역이 급격하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지적이지만 밀실과 광장이 균형을 이뤄야 개인과 사회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장소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이승희 옮김, 민음사에서 19세기 이후 개인주의의 거듭된 변화, 다시 말해 정체성의 변화를 동질사회와 다원화사회를 배경으로 섬세하게 진단한다. 카림은 개인주의를 세 개 세대로 구분하고, 현재 우리는 3세대 개인주의와 만나고 있다고 말한다. 카림에 따르면 개인주의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일대 전환을 이뤘다.
19세기부터 지난 세기 중반까지 유럽을 지배한 1세대 개인주의는 기존 계급사회에서 개인을 해방시켰다. 이 첫 번째 개인은 민족이나 정당에 소속돼 개인이라는 특성을 추상화함으로써 동등한 법적 권리를 획득했다. 주체의 변화가 목표였던 1세대에게는 정당, 교회, 학교의 역할이 중차대했다. 이 거대 기관들이 민족 중심의 동질사회를 형성하고 개인에게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하지만 민족공인과 민주주의개인는 서로 충돌하는 관계였다.
1960년대에 출현한 2세대 개인주의는 1세대와 달리 주체가 변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2세대는 기존 삶의 양식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두 번째 개인은 ‘프로젝트형 인간’이자 ‘표현하는 주체’다. 이들은 1세대가 추구했던 ‘동등’이 아니라 ‘차이’를 우선한다.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말을 걸라’며 정체성의 문제를 정치 무대에 올려놓았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 즉 다른 정체성을 온전한 정체성의 범주에 등록시키려는 것이다.
3세대 개인주의의 특성은 2세대와 공통점이 많은데 ‘작아지는 자아’로 요약된다. 세 번째 개인에게는 우연성이 수시로 개입해 불확실성이 가중된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보증해야 하는 다원화사회의 고단한 구성원이다. 카림은 공통된 세계관이 부재하는 다원화사회에서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중립성’뿐이라고 말한다. 이 중립성은 오스트리아의 ‘만남구역’과 같은 공적 공간에서 구현된다. 만남구역은 교통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 속도 제한 말고는 특별한 규제가 없다. 이용자들이 스스로 관리, 운영하는 공적 공간이다. 만남구역의 확대판 중 하나가 월가 점령 시위다.
카림은 다원화사회를 인간화하는 지름길이 장소를 창조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다름과 다름이 공존하는 온전한 삶과 사회는 공유 공간을 어떻게 생성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개인주의 탐구를 우리에게 직접 적용하는 것은 무리지만 우리는 몇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과연 몇 세대 개인인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그것은 또 몇 개인가. 우리의 밀실은 어디이고 광장은 또 어디인가. 우리는 ‘사회적·심리적 홈리스’가 아닌가. 카림에 따르면 우리가 창조해야 할 공유 공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냥 주어지지도 않는다. 정당이 계획하지도 않는다.
주말마다 촛불이 밝혀지고 태극기가 휘날린다. 우리는 언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공적 장소’를 창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 1세대 개인주의의 틀에 안주하고 있는 저 ‘낡은 정치’를 지금 여기로 소환할 수 있을까.
★ 본 기고글은 경향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