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나 전주가 고향이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은데 서울이 고향이라고 하면 뭔가 어색하게 들린다. 서울 사람들은 고향보다 서울 토박이인지 아닌지를 따진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서울 출신이 아닌데도 고향이 없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는데 1990년대 이후 신도시로 탈바꿈했다. 옛 지명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고향이 없는 자에게는 지구도 낯설고 힘든 타향이다. 정재학 시인은 “지구에서는 할 만큼 했다”라고 자평하면서 지구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다고 토로한다.
“액체도 고체도 아닌 크리스털 물”과 “다른 지구들”이란 대목에서 후쿠시마 앞바다가 떠오른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일본 정부가 기어이 오염수를 방류하기 시작했고, 우리 정부는 이를 막지 않았다. 누가 말했듯이 일본이 ‘지구의 우물’에다 오물을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의 우물에 문제가 생기면 ‘인류의 밥상’이 사라질 수 있다.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돌아온다. 어디에 버리든 우리가 버린 것은 반드시 우리 몸속으로 돌아온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당시 소련 에너지 장관이 이렇게 말했다. “끝이 시작되었다.” 2011년 3월에 이어 2023년 8월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또 하나의 ‘끝’이 시작되었다.
고향에서 고향별로, 인류에서 뭇 생명으로 감수성과 인지 능력을 확장해야 한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비인간 존재들 또한 지구별의 엄연한 주인이라고 인정해야만 이 ‘끝’이 새로운 처음으로 거듭날 수 있다.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