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은 그때 왜 그랬을까. 중학교 입학을 코앞에 둔 까까머리 소년에게 왜 「아침이슬」을 알려준 것일까. 1970년대 초입,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고는 곧 잊어버렸다. 1970년대 후반,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알았다. 고향 집에서 배운 그 노래는 보통 노래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시위대열의 맨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 시절, 나는 「구름 위를 떠다니던’ 몽상가였다.
「아침이슬」은 광장의 노래, 대낮의 노래였다. 20대 후반 사회로 나오면서 ‘밤의 노래’와 만났다. 민주화 열기가 뜨거운 가운데 나는 시인이 되었고, 저녁이면 단골집에서 글쟁이들을 만났다.
분노와 성토가 잦아드는가 싶으면 빈 술병이 마이크로 변했다. 저마다 ‘십팔 번’이 있었으니 누구는 「황성옛터」 누구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 다들 흘러간 옛노래였다.
언젠가 시인들의 애창곡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봄날은 간다」가 1위로 꼽혔다. ‘아침이슬’과 「봄날은 간다」. 두 곡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자칫 다른 것은 틀린 것이고 나쁜 것이라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낮에는 클래식, 밤에는 트로트. 혼자 있을 때는 베토벤, 여럿이 있을 때는 조용필. 이를 두고 이중적이라고, 위선 아니냐고 따지지 말자. 어떤 경우에는 가요 한 소절이 가슴을 미어지게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시 한 구절이 두 눈을 번쩍 뜨게 하지 않는가.
시와 가요를 구분하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우리에겐 시와 노래, 둘 다 필요하다. 좋은 시, 좋은 노래라면 더더욱 필요하다. 좋은 시와 노래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공유 기억’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