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의 탐문 20 작업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이 문학 장르의 장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현실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작가들은 대체로 작업 환경에 민감해서, 글을 쓰기 위한 최적의 시간과 공간을 찾아 헤매고는 한다. 글을 쓰기 위한 공간, 그러니까 작업실의 유무와 그 형편 여하가 때로는 글쓰기에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니기도 한다.(본문에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과거라면, 펜과 종이가 그에 대한 답이 되었으리라. 지금은 펜과 종이의 자리에 노트북 컴퓨터가 들어설 테고, 노트북이 없는 경우에는 휴대전화 메모장이 원고지와 필기도구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펜과 종이든 노트북이든 휴대전화 메모장이든, 확실한 것은 글을 쓰기 위해 그리 많은 재료나 도구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집필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지닌 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원고를 쓸 수 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이 문학 장르의 장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현실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작가들은 대체로 작업 환경에 민감해서, 글을 쓰기 위한 최적의 시간과 공간을 찾아 헤매고는 한다. 글을 쓰기 위한 공간, 그러니까 작업실의 유무와 그 형편 여하가 때로는 글쓰기에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니기도 한다.
“글을 쓰는 데는, 누구나 알다시피, 타자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연필 한자루와 종이 몇장에 책상과 의자가 있으면 그만이다. 이것들은 내 침실 한 귀퉁이에 죄다 있다. 그런데도 지금 나는 언감생심 작업실까지 욕심내고 있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1968에 실린 단편 「작업실」에서 주인공인 ‘나’는 남편에게 작업실이 필요하다고 말해놓고도 그런 자신의 주장이 지닌 타당성에 일말의 의구심을 품는다. “쾌적하고 널찍하고 바다가 훤히 보이니 전망도 좋고 맞춤한 식당과 침실과 욕실에다 친구들과 담소를 즐길 공간도 있다. 게다가 정원까지 있으니 공간이 없어서 작업을 못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가 작업실을 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가 없다”는 말에 힌트가 있다. 짐작하자면, 생활공간으로서의 집과 글을 쓰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작업실은 별개라는 생각이겠다.
이 인물의 고민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저 유명한 산문 「자기만의 방」이 바로 그런 고민을 담은 것 아니겠는가.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한 강연 원고를 다듬은 이 글은 여성과 문학의 관계를 폭넓고 깊이 있게 다루는데, “그녀에게 자기만의 방을 주고 일년에 오백 파운드를 주십시오”라는 대목에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다. 여성이 글을 쓰자면 경제적 자립과,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독립적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학을 향한 갈증을 누른 채 아이들을 다 키운 뒤 마흔 나이에 늦깎이 작가로 출발한 박완서의 사례에서 보듯, 여성 작가들은 생활과 글쓰기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해야 했다.
여성 작가들보다 사정이 낫다고는 해도 남성들 역시 작업공간의 문제에서 마냥 자유롭지는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소개된바, 그가 처음 쓴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은 “좁은 아파트에서 주방 식탁을 마주하고 아내가 잠들어버린 한밤중에” 쓴 것들이었다. 그런데 여기 다른 목소리가 있다. 찰스 부코스키의 시 한 편을 읽어 보자.
“‘가족이니 일이니/ 항상 방해물이/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집을 팔아 버리고/ 이 큰 원룸을 구했지, 보다시피/ 공간과 빛이 있는 방이야./ 내 평생 처음 창작할 공간과 시간이/ 생긴 거야.’// 아니야, 이 양반아./ 창작 의지만 있다면/ 창작은/ 하루 열여섯 시간 탄광 일을 해도/ 애 셋을 데리고/ 단칸방에서/ 정부 보조금으로/ 살아도/ (…) / 할 수 있다네.// 여보게, 공기와 빛과 시간과 공간은/ 창작과 아무 관련이 없고/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않아.”(「공기와 빛과 시간과 공간」 부분)
우리의 작가 이문구가 부코스키의 주장에 격하게 공감을 표한다. 산문집 『외람된 희망』에 실린 「집필괴벽」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글은 으레 밝은 대낮에만 쓴다. 근무처의 사무실이나 다방 또는 친구네 서재 등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잘 것 자고 마실 것 다 마셔 가며 남과 이야기하면서도 쓰고 전화를 받아 가면서도 쓴다.”
젊은 작가 정용준의 산문집 『소설 만세』에는 「고속버스와 기차와 지하철에서 읽고 쓰기」라는 꼭지가 있다. 생계를 위해 여기저기 시간강사로 뛰어다니던 시절, 읽고 쓰기 위한 절대시간이 부족하게 되자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을 활용했던 경험을 담은 이야기다.
“버스에서 소설을 읽거나 초고를 썼다. 기차에서는 인쇄한 원고를 읽으며 퇴고를 했다. 지하철에서는 단편이나 시집을 읽기에 좋다. 집중이 안 되면 영화를 봤다. 처음엔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이 생기고 눈이 감겼지만 한 학기 두 학기 1년 2년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잘 써졌고 잘 읽혔다. 나중에는 카페나 조용한 책상에 앉아 있을 때보다 읽기와 쓰기가 잘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히 초인적인 집중력이라 하겠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특수한 사례,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기대할 수는 없는 경지라 하겠다. 당연한 일이지만, 창작에 필요한 집중력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립과 단절이 불가피하다. 「파리 리뷰」의 작가 인터뷰집 「작가라서」에 소개된 조르주 심농의 인터뷰를 보자.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고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그저 수도사처럼 지내지요. 온종일 저는 등장인물 중 하나가 됩니다. 그가 느끼는 대로 느낍니다. 닷새나 엿새가 지나면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돼요. 제가 쓰는 소설들이 그토록 짧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열하루가 지나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 이런 까닭에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대개는 소설을 시작하기 며칠 전에 앞으로 열하루 동안 약속이 전혀 없는지를 확인합니다.”
물론 심농과 정반대되는 견해도 있다. 같은 책에 실린 네이딘 고디머의 말이다.
“일상과 꾸준히 접촉해야 해요. 고독한 글쓰기도 매우 섬뜩합니다. 하루 동안 자취를 감추고 연락을 두절하는 건, 가끔 광기에 가깝게 보입니다. 세탁소에 옷을 맡기거나 진딧물이 끓는 식물에 약을 뿌리는 것 같은 일상적인 행동은 매우 온당하고 훌륭한 일입니다. 이를테면 그런 행동은 우리를 되살리고 세상을 되살립니다.”
글쓰기 스타일의 차이일 수도 있겠고, 문학과 세계의 관계를 보는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 옳거나 효율적이고 어느 쪽이 그르거나 비효율적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노릇일 터. 사람마다 자기에게 맞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좋겠다.
작업실에 관한 작가들의 고민을 덜어주고자 고안된 제도가 ‘레지던시’다. 레지던시는 정해진 기간 작가들에게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며 글쓰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설을 가리키는데, 문학만이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낯선 공간에서 일상의 제약과 의무에서 놓여나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어서 많은 작가가 애용한다. 국내의 대표적인 작가 레지던시로는 토지문화관과 연희문학창작촌이 꼽히는데, 서울 명동 한복판의 서울프린스호텔이 제공하는 ‘소설가의 방’도 젊은 작가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따로 작업실을 마련할 형편이 못 되고 레지던시에 입주하지도 못한 작가들이 작업실 대용으로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카페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 작가를 따로 거명하기 힘들 정도로 이 문화는 널리 퍼져 있다. 작업실로서 카페의 장점이라면 적당한 소음과 익명성을 들 수 있겠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 이들이 많아지다 보니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재미있는 공간도 생겨났다. 지난 4월 도쿄에 문을 연 ‘원고 집필 카페’가 그곳이다. 이 카페는 마감해야 할 원고가 있는 이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데, 입장할 때 접수처에 그날 써야 할 분량과 마감시각을 적어 내야 한다. 글을 쓰고 있으면 카페 직원이 한시간마다 찾아와서 원고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손님이 사전에 선택한 강도에 따라 마감을 독려하거나 다그치거나 한다. 카페 이용 요금은 시간당 300엔최초 30분은 150엔인데, 사전에 신고한 대로 원고를 끝내지 못하면 영업이 종료될 때까지 카페에서 나갈 수 없다.
작업실은 다른 무엇보다 글을 쓰기 위한 공간이다. 작가마다 문학세계와 문체가 다르듯 자신에게 맞는 작업실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자신으로서 최선의 글을 쓸 수 있는 최적의 장소, 그곳이 곧 좋은 작업실이 아니겠는가.
★ 이 글은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