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과 행동으로 시대를 바꾸고자 한 사상가
모든 역사는 오늘 지금 여기의 역사로 늘 재편성된다. 지금 여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살아 있는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역사는 늘 다시 재조명되고 다시 쓰여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편집과 편찬의 역사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모든 시대의 시공간은 오늘 지금 여기의 시대와 시공간으로 늘 다시 호출된다. 그래서 개인이든 공동체든 국가든 지나간 시공간은 현재의 시공간으로 불려 나와 지금의 시공간과 병존하게 된다. 우리의 삶과 세상은 지금 여기의 삶이자 과거와 함께 사는 병존과 공존의 삶이고 세상이다.
김종철. 많은 사람들이 대놓고 까칠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다정했던 사람. 더불어 사는 공생공락의 삶을 추구했던 사람.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이 부박한 세상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사람. 대쪽 같은 원칙주의자이면서도 누구보다도 염치를 중시한 현실주의자였던 사람. 그는 20세기와 21세기라고 이름 붙은 시대에 한반도라는 시공간을 산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히 시대에 적응하거나 순응하면서 일생을 살지 않은 특출한 사람이었다. 홀로 그리고 스스로 전혀 낯선 새로운 삶과 세상의 길을 개척하고 그 길을 여럿이 함께 걸어가고자 했던 선각자였다. 그는 그야말로 피를 토하듯 시대의 종말을 소리 높여 외친 예언자였다. 예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시대를 뒤바꾸고자 노력한 실천가였다.
기후위기가 이미 임계점을 지나 여섯 번째 멸종 사태가 급속도로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날, 파국의 징후가 거세질수록 생태주의자 김종철은 앞으로 수없이 다시 살아 있는 우리 앞에 호명되고, 수없이 다시 지금 여기 현재의 역사로 재구성될 것이다.
「녹색평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자모임이 있는 생태주의 잡지
1991년 11월 25일, 김종철은 44세의 나이에 격월간 잡지 「녹색평론」을 창간했다. 이후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그는 일관되게 「녹색평론」을 근거지로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무모하면서도 거대한 도전을 이어왔다. 착취와 피착취, 억압과 피억압의 인간관계를 우애와 환대의 인간관계로 바꾸고자 한, 어쩌면 유격전의 해방구 투쟁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있는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당시는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구소련의 해체가 진행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89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이란 논문을 발표해 사이비 체제종말론이 막 유행을 타고 있던 때였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로 한반도 역사상 최고조에 달한 서구 산업화의 풍요와 고도 경제성장의 떡고물이 노동자들에게도 떨어지고 있었다. 대기업 노동자들 중심으로 자가용 보급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거리거리에 의식주 상품이 넘치고 넘쳐 흘렀다. 그런 시대 상황 속에서 김종철은 벌건 대낮에 등불을 들고 자본주의 산업화도 곧 망할 것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경제성장과 개발은 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정면으로 시대를 부정하고 시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는 도전장이나 다름없었다.
150여 쪽의 얇은 소책자에 불과한 「녹색평론」 창간호의 글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거의 혁명에 가까운 도전과 외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종철의 창간사는 지금 읽어도 생생하게 각인되는 서구 산업화의 종말, 경제성장과 개발의 중단 선언문이었다. 사회와 국가를 생태사회와 국가로 바꾸자고 제안하고 실천을 촉구하는 성명서였다. 김종철은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를 똑같은 서구 근대 산업화의 자연 파괴 이데올로기로 비판하고 세상의 파국을 피하려면 농업 중심의 소농사회를 복원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녹색평론」은 이후 한 호도 거르지 않고 29년 동안 173번이나 세상을 바꾸는 사자후의 목소리를 내놓았다. 많은 정기구독자들이 「녹색평론」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고 「녹색평론」을 삶의 등대로 삼았다. 이들 열혈 정기구독자들이 만든 전국 각지의 「녹색평론」 독자모임은 특이하고도 전 세계에서 유일한, 잡지를 매개로 한 결사체이다. 173호에 실려 있는 독자모임 광고만 헤아려 보더라도, 강원 홍천, 충남 청양, 충남 홍성, 북대전, 충남 서산 태안, 세종, 충북 북부, 경기 부천, 경기 군포, 경기 성남, 경기 화성 동탄, 서울 강서, 서울 강남 서초, 서울 중랑, 대구, 대구경북 가톨릭, 경남 창원, 김해 장유, 경남 진주, 전북 군산, 전북 전주, 제주 서부, 제주 풀무질 등 23개에 이른다. 이외에도 천안 아산, 대전 가톨릭 등 독자모임을 준비 중이거나 잠시 휴지기를 가지고 있는 지역까지 합하면 30여 곳을 훌쩍 넘는다.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농민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에게는 기관지 「이스크라」의 배포망을 지하당 조직의 뿌리로 삼았던 러시아 사민당을 떠올리게 만들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녹색당 창당에는 이들 ‘녹평 독자모임’ 회원들이 대거 참여해 산파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김종철은 손사래를 치며 싫어하겠지만, 케이팝, 케이방역에 앞서 케이 독자모임이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사대주의 앵무새에서 벗어난 조선의 생태주의자, 김종철
김종철을 어떤 사상가이자 실천가로 자리매김할지 그 논의는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 그런 자리매김의 시론으로 주제넘고 두서없지만 김종철의 사상과 실천을 몇 개의 주요한 측면으로 간략하게 서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김종철은 사대주의의 열등의식을 완전히 극복하고 새로운 생태주의 사상의 지평을 연 조선의 생태주의자였다. 오리엔탈리즘과 그 대항으로서의 옥시덴탈리즘을 뛰어넘어 그런 차원과는 전혀 다른, 사람과 세상의 밑바탕으로부터의 생태 전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 이래 한반도 주민들은 이른바 중화주의 사상과의 오래고 질긴 긴장과 갈등, 투쟁의 역사를 계속해 왔다. ‘고려’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 자체가 사대주의와의 대립과 자립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글의 창제와 조선 중기 이후의 실학과 동도서기론 등의 대두는 중국 모방과 앵무새 따라 하기를 거부하는 현실주의의 실천이었다. 19세기 말 서구의 침략과 함께 조선의 식민지로의 전락은 한국 인민들에게는 천지개벽 같은 사건이었다. 이후 1세기 이상을 한반도 인민들은 오직 서구 근대화, 산업화를 신앙처럼 숭배하며 부국강병의 경제성장과 개발을 향해 좌고우면 없이 돌진해 왔다. 당연히 사상과 학문의 서구 추종과 따라 하기, 앵무새 같은 식민지성은 거의 유전자처럼 한국 인민들의 내면에 깊숙이 각인되어 버렸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가능하다면 황인종 피부까지도 하얗게 바꾸고자 한 ‘누런 피부 흰 가면’의 교수와 학자들이 지금까지도 온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과 유럽 유학파들이 장악한 대학은 이같은 식민지 학문과 사상의 온상이었다.
김종철은 이같은 앵무새 따라 하기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우리의 문화와 토양에 맞는 생태주의 사상을 꽃피웠다는 점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그가 최해월의 동학과, 동학을 이어받아 한살림운동을 시작한 무위당 장일순을 높이 평가하고 따르고자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줄기차게 소농사회의 복원을 주창한 것도 기본소득을 강조한 것도 한국 인민의 몸과 마음에 걸맞은 한국의 옷을 만들고자 한 그의 지론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백석의 시 낭송 듣기를 즐겨 하고, 해월의 동학사상과 소태산 박중빈의 원불교를 자주 언급했던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계속)
★ 본 기고글은 「프레시안」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