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人文學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이야기를 스티브 잡스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티브 잡스는 1955년 생, 지금 살아 있다면 58살이다. 재작년인 2011년에 사망했다. 잡스는 이미 고인이 된 사람,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쏟아진다. 그는 이미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뿐만 아니라 21세기형 기업가의 전설이 되었다. 아마도 우리가 개인용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전혀 사용하지 않게 되는 시대가 온다고 해도, 잡스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될 듯하다.
그런 이야기 가운데 하나. 새 정부가 ‘창조경제’를 국정기조로 내세우자, 그것을 스티브 잡스와 연결시키는 기사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기사. 한국, 미국, 핀란드, 이스라엘의 초등학교 6학년생과 학부모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심지어 “아이가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롤 모델로 삼았으면 한다.”고 응답한 한국의 학부모 4명 가운데 3명도 “창업은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취업을 권유하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자신의 롤 모델로 스티브 잡스를 이야기하는데, 학부모는 왜 월급쟁이를 권하느냐, 창조경제 하려면 그러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기사다. 이 기사는 설문의 결과를 놓고, 남들과 다르면 안 된다고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문제점이나 부가가치를 창출할 능력이 있는 아이디어를 지원하고, 창업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줘야 한다는 제언을 전문가의 말을 빌려 전하고 있다.(동아일보, 2013년 4월 17일, 창조경제로 가는 길--스티브 잡스 닮으라면서 월급쟁이 권하는 한국 부모)
‘남과 다르다’는 점만을 이야기한다면, 스티브 잡스야말로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 2005년 6월 스탠포드대학의 졸업식에서 행한,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만 한다!”('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는 연설에서 잡스는 자신의 성장기를 고백록처럼 풀어놓았다. 우선 그는 정식 부부관계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또 자신이 설립한 애플사에서 해고된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 연설문은 이렇게 끝난다. “계속 갈망하라,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와 인문학, 이 두 개의 키워드를 직간접적으로 연결시켜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잡스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잡스는 아이패드를 세상에 내놓는 자리에서 “창의적 제품은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서 탄생한다.”고 했다. 이런 발언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그래, 잡스 같은 사람도 인문학을 한다지 않느냐. 인문학이 밥도 먹여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슨 소리냐, 잡스가 말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반응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경영 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 같은 이를 꼽을 수 있다. 오마에 씨는 ‘21세기 교양’을 이야기한다. “요즘 젊은 세대가 과거 대학생의 필독서였던 책을 읽지 않아도 그게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고 싶다. 나는 ‘시대가 바뀌었으니 교양도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21세기 교양’이란 ‘현대 비즈니스맨에게 필요한 정보무장’이며 ‘새로운 소양’이라고 말한다. 그 새로운 소양이란 “지식만 가득 채운 교양인보다 주어진 명제를 풀어가는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을 지식이 아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지 여부, 결국 이것이 세계 어디에 내놔도 인정받을 수 있는 인간의 척도”라는 것이다.(오마에 겐이치, 『지식의 쇠퇴』)
이에 비해, “기업인이 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새로운 유행’에 대해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싸우는 인문학』(2013년 1월 출간)의 첫머리에 실린 글,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적 CEO인가」라는 글에서 서동진 씨(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패드라는 값비싼 장난감을 자랑하기 위해 잡스가 꺼낸 인문학 타령은 가뜩이나 인문학으로 밥 벌어 먹기가 어려워진 이들에게는 호재처럼 보였던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의 학문 시장에서 인문학이 고사될까 걱정하던 이들은 이때다 싶어 잡스의 발언을 두둔하고 선전하고 나섰다. 물론 상당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다. 잡스가 인문학에 빚졌다고 말할 때 이는 이를테면 문사철文史哲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인문학이란 이미 인간에 관한 학문으로 변신한 경영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들로, 굳이 철학과 문학 따위에 신세를 질 이유가 없다. 그 자체가 이미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인문학은 새로운 자본주의에 필요한 정신을 집약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8쪽)
『침묵의 공장』(2013년 4월 출간)의 저자 강명관 씨(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런 논점을 더욱 밀고 나가서 “인문학이 기업의 이윤 창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며 비판한다. 그는 “인문학은 자본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비판정신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인문학이 자본에 종속된 상태가 바로 인문학의 위기”라고 말한다. 강명관 씨에 따르면, 연구비 확보를 최우선으로 하며 스스로 자본에 대한 종속을 심화하고 있는 대학이 인문학 위기의 주범이다.
이러한 논의를 펼쳐놓고 보면, 사람들이 ‘인문학’이라고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인문학’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쪽은 ‘돈이 되는 인문학’ ‘자본 및 기술과 결합할 수 있는 인문학’ ‘취업과 연결되는 인문학’이라 한다면, 다른 한쪽은 ‘돈이 안 되는 인문학’ ‘자본과 기술과는 떨어져 있어야 하고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는 인문학’ ‘취업과 무관한 인문학’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과연 무엇이 ‘인문학’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일까?
‘돈이 안 되는 인문학’, ‘취업과 무관한 인문학’의 현실은 실로 가혹하다. 여러 대학이 멀쩡한 인문학 관련 학과를 통폐합하자 급기야 교육부는 2014년 대학평가 때부터 인문·예체능 계열의 취업률을 평가지표에서 빼기로 했다는 소식도 있다.(한겨레, 2013년 7월 4일, 인문·예체능 계열 취업률 대학평가 지표에서 뺀다)
대학에 인문학 학과의 통폐합, 혹은 폐지와 관련된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글의 주제가 대학의 구조조정이나 대학의 기업화가 아니므로 이에 대해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크게 보아 ‘인문학’의 본질과 관련해서 꼭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흔히 한국의 대학이 기업화하기 시작한 시점을 1995년 대학의 자율화를 바탕으로 하는 ‘5·31교육개혁안’(정확하게는 ‘세계화 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을 기점으로 한다고 일컫고 있다. 그 이후 이른바 ‘CEO형 총장’이 대학에 등장하고 ‘대학운영’은 경제성·효율성·생산성을 강조하는 ‘대학경영’으로 바뀌었다. 학생들도 스스로 자기 자신의 ‘제원’--상품의 특성을 말하는 ‘스펙specification'-- 쌓기에 여념이 없고,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되고자 했다.
이런 대학의 변화를 한쪽에서는 대학의 나아갈 방향이라고, 또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변화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 다른 한쪽에서는 ’대학은 죽어가고 있다‘ 혹은 ’대학은 망했다‘고 말한다. ’대학은 망했다‘고 말하는 이들은 특히 헌법 제31조 4항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규정이나 대학의 목적을 규정한 고등교육법 제28조 “대학은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국가와 인류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심오한 학술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국가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규정이 드러내고 있는 기본정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의 본질과 역할이 무엇인가. 대학이 스티브 잡스처럼 기업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곳으로 본다면, 대학은 더욱 기업화되고 경제성·효율성·생산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학이 그런 곳이 아니라, 인격도야와 함께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면 대학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스티브 잡스도 차마 잘 알지 못했던,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대학으로 나아가는 길이다.(예를 들어,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계를 향한 교육’을 지향하는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사례)
이 양극 사이에서 분출한 사건이 하나 있는데, 2010년 3월 10일 고려대 경영학과 학생이던 김예슬 씨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선언했던 그 사건이다. 김예슬 씨는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 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고 했다.
우리가 ‘인문학’에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고, 그 질문에 해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곤란함과 난처함 속에서 누리게 될 성찰의 계기일 것이다. 그런데 김예슬 씨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질문을 “물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질문의 경색梗塞 상태는, 앞서 길게 말한 대학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떠나서,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왜냐면 ‘나는 누군인가’(정체성), ‘왜 사는가’(인생관) ‘무엇이 진리인가’(진리관, 정의관)라는 질문은 우리가 인간이라면 회피하기 어려운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 동안 인문한국 지원 사업Humanities Korea을 벌여 왔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는 2013년 3월 28일 배포한 보도 자료를 통해, “박물관, 도서관 등 문화시설과 연계한 인문학 문화프로그램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하였다. 이런 사업들이 결국 ‘스티브 잡스가 말한 인문학’뿐만 아니라, '스티브 잡스도 몰랐던 인문학’까지 포괄하는 것이어야 할 거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왜냐면 ‘시티브 잡스도 몰랐던 인문학’은 결국 우리의 정체성과 인생관, 진리관, 정의관과 관련된 질문의 가능성이고, 해답을 모색하는 과정이며, 성찰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은 ‘스티브 잡스가 말한 인문학’뿐만 아니라 ‘스티브 잡스도 몰랐던 인문학’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 이 글은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2013년 8월호에 실린 글로서, 필자의 동의 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