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발행하는 <도서관이야기> 2013년 3월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편집자 주)
우리는 20세기의 후반기에 태어나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불렀는데, 21세기가 어떤 시대가 될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1백 년, 1천 년도 아니고, 한 5만 년이 지난 뒤의 후손들이 오늘날의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루하루 너무나도 정신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런 질문은 조금 생뚱맞은 질문일지 모릅니다.
20세기에 일어났던 전쟁은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끝자락에 이 지구에 투하되었던 핵폭탄을 보면서 우리는 인류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이후 어떻게든 평화로운 지구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습니다. 숱한 노력이 기울여졌지만, 오늘 이 시각까지 온전하게 평화의 세상을 만들지는 못한 듯합니다.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청소년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특히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 살고 있기에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사회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은 5만 년 뒤의 후손들이 우리를 ‘화석연료 사람들’이라고 부를 것이며, 우리가 과거를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와 같은 이름을 붙였듯이 현시대를 ‘탄소 시대’로 정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2008년 7월, 글로벌 경제는 일제히 멈춰 섰다. 바로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거대한 경제 지진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리프킨은 1차 산업혁명이 19세기에, 2차 산업혁명이 20세기에 그러했듯, 3차 산업혁명이 21세기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산업혁명의 핵심은 에너지와 소통 기술의 유기적 관계입니다. 석유 에너지와 전기 소통 기술이 2차 산업혁명을 일으켰다면, 재생 가능 에너지와 인터넷 소통 기술이 3차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3차 산업혁명’이라는 제러미 리프킨의 용어를 반드시 수용해야 하는 것을 아닐 터입니다. 하지만 산업문명의 거대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것, 그 핵심에 에너지와 소통 기술의 문제가 있다는 리프킨의 지적은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 지하에 매장된 화석연료를 확보하고 이를 이용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형 하향식 지휘 통제 체제와 대량의 자본 집중이 필요했습니다. 에너지 자체가 중앙집권형이기에 비즈니스 모델이나 그 비즈니스를 유지하는 조직 구조가 하향식 피라미드 형태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하향식 관료제 조직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 즉 리터러시가 중요했습니다. 문서로 된 명령과 보고 체계가 없이는 거대한 조직이 관리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이러한 모형이 공립학교 시스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학교는 공장의 축소판이었습니다.
그런데 3차 산업혁명이 태동하면서 1, 2차 산업혁명기의 교육 모델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왜냐면 3차 산업혁명기의 에너지는 분산적이고 협업적이기에 그에 맞는 조직 모델과 교육 모델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주가 마치 균형 잡힌 거대한 기계 시계처럼 자동으로 움직이듯이 시장도 역시 그렇게 작동한다”는 뉴턴이 체계화한 물리학이나 그것을 기반으로 한 고전 경제학, 더 나아가서 이를 기반으로 한 신자유주의적 이념은 심각한 재고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류가 출구 없는 자본주의라는 수렁에 빠져서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꿈꾸기 어렵게 된 데에는 “의무 공교육을 시작한 이후 150년 동안 교육의 방향을 이끌었던 방법론적·교육학적 가정이 크게 일조했다”는 진단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8세대에 걸친 수억 명의 어린이·청소년들이 받아 왔던 교육,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계몽주의적 가정을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이제 지식과 정보는 그 소유권이 아니라 접근권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생각했다면, 이제부터는 호모 엠파티쿠수(Homo empathicus)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성적이고 욕심 많고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애롭고 사교적이며 협동과 상호 의존을 좋아하는 공감의 인간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종교적 동일성 혹은 국가적 정체성에 기초한 관계망 속에서 인간을 보아왔다면, 이제는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 생물권까지 공감하는 인간을 길러 내야 할 것입니다. 교육의 사명은 경쟁하는 인간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고 공감하는 인간을 기르는 것입니다. 배움은 앞 세대로부터 물려받는 지적 유산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함께 나누는 과정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수직적 학습’이 아니라 ‘수평적 학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공장식 학교 교육에서 요구되던 투입 대 산출 방식의 배움이 아니라 상호 의존과 상호 작용, 협력, 공동체적 경험, 나눔, 네트워크적인 만남, 자신과 다른 관점이나 견해를 귀 기울여 듣기 등과 같은 것들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바로 이러한 ‘수평적 학습’과 ‘나눔과 경험으로서의 배움의 장’이 바로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도서관문화(圖書館文化)’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기 것만으로 쌓아나가는 책읽기가 아니라 이웃과 지역과 함께하는 책읽기·책읽어주기의 장이 바로 도서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3차 산업혁명기를 살아가야 할 어린이·청소년을 위해서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도서관을 ‘공장식 학교’의 부속물로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펼치고 있는 ‘수평적 학습’의 경험을 학교에서도 경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생님이나 시험이 없는데도 더 큰 배움이 일어나는 도서관문화를 북돋기 위해 우리가 더욱 힘을 기울이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