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양복이 없었다. 평생 한복이었다. 들일 나갈 때는 베적삼, 먼 길 나설 때는 두루마기에 중절모. 잠바나 외투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당신은 근대 이전이었다.
1909∼1989년. 생몰 연도를 써놓고 보니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저 80년 세월에 식민지와 해방, 전쟁, 분단, 산업화가 다 들어 있다. 하지만 당신께선 삼강오륜을 내려놓지 않았고 땅을 버리지 않았다. 당신은 마지막 아버지였다.
아들1959∼은 최초였다. 땅의 마지막 아들이자 아스팔트의 첫 아버지. 그토록 아버지의 시대를 거부했건만 아들은 ‘새 시대’의 한복판에서 난감하다. 면면이 이어져 오던 부자지간이 또 끊어진 것이다. 내가 아버지로서 물려줄 게 ‘불확실성’밖에 없다니. 감당하기 힘든 단절이다.
당신께서 ‘흐린 나라’를 도모한 것은 아니다. 그럴 리 만무하다.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잠을 줄이고 끼니까지 걸렀다. 아들도 다르지 않았다. ‘개발’과 ‘성장’을 외치면 ‘부자 나라’가 세워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 손주들이 갈수록 좁아지는 미래의 문 앞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다.
내 잘못이 크다. 이렇게 땅을 파헤쳐도, 이렇게 쓰레기가 많아져도 괜찮은 것인지, 이토록 정신없이 살아도 문제가 없는지 캐묻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앞만 보고 달리면 ‘좋은 나라’를 물려줄 줄 알았다. 그런데 앞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물려받은 것조차 온전하게 물려주지 못하게 되었다. 면목이 없다…. 하지만 늦지 않았다. 돌아보니 내가 닳아 없앤 ‘문턱’이 없다. 노년에게도 미래가 있다. ‘좋은 나라’로 넘어가는 ‘문턱’을 함께 찾아 나서자. ‘공생공락共生共樂의 미래’에 도장 찍을 아버지들이 왜 없으랴.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