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적어도 두번 이상 읽어야 한다. 처음 읽을 때는 시인의 눈으로. 무엇이 시의 불씨를 당겼을지, 어느 대목에서 쾌재를 불렀을지,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을지 따위를 짚어보는 것이다. 두번째는 시에서 한걸음 물러서기다. 오직 ‘나’의 눈으로 시를 재구성한다.
좋은 시의 기준은 여럿이다. 애송하는 한편의 시도 읽을 때마다 호오의 척도가 달라진다. 내가 시에 갖다 대는 잣대는 둘이다. 독자가 다시 쓸 수 있는 시인가, 아니면 독자의 개입을 차단하는 시인가. 나는 전자를 선호한다. 지나치게 완성도가 높은 시, 다시 말해 문제를 제기하고 답까지 제시하는 시 앞에서 독자는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고 돌아선다.
좋은 시는 열려 있다. 독자로 하여금 시를 다시 쓰게 한다. 독자가 시를 새로 혹은 이어 쓸 때 시와 시인은 사라지고 ‘두번째 시와 시인’이 탄생한다. 나는, 시를 촉매 삼아 독자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순간이, 시와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독자에 의해 매번 죽는 시, 그런 시가 오래 산다.
인용한 시는 친절하지 않다. 짧은 동영상 한컷을 던져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다음은 당신에게 맡기겠소’라며 시치미를 뚝 뗀다. 이제부터 우리, 독자가 시를 이어 쓰는 것이다. 저 시를 이어 쓰는 순간, 제목은 장편掌篇·콩트에서 장편長篇·소설으로 전환된다.
어렵지 않다. 자문자답해 보자. 주인 영감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20전이면 2인분인데? 밥집에 못 들어갔다면? 밥값은 어떻게 구했을까, 식당 안 손님들은 어떤 표정이었을까, 거지 가족은 어디에 살까…. 시는 사라지고 장편 드라마가 시작된다.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