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콩, 참외, 수박, 닭….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시골에서 나고 자란 이라면 눈치챘을 텐데요. 맞습니다. 어릴 적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몰래 훔쳐 먹던 것들입니다. ‘서리’라고 했지요. 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긴장감 넘치는 통과의례기도 했습니다.
주인에게 걸리면 혼쭐이 났습니다만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더러는 못 본 척 넘어가는 어른도 있었지요. 미풍양속 축에는 못 들겠지만 그렇다고 악습이나 폐습은 아니었습니다. 땅에 기대어 살아가는, 고루 가난한 마을 공동체가 고안해낸 불문율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서리와 함께 떠오르는 것은 무전여행입니다. 졸업이나 입대 전 마음 맞는 청년들이 ‘무일푼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낯선 사람, 낯선 길, 낯선 마을에서 밥을 얻어먹고 잠자리를 구했습니다. 제주도나 지리산, 동해안 7번 국도 같은 데는 청년들에게 ‘성년식의 성지’였더랬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전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면서 남의 밭에 들어가거나 무전취식을 하면 붙들려 갔습니다.
그사이 전체 인구의 9할이 도시에 살게 되었고, ‘농農의 미덕’은 기억 저쪽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래서 사과나무 하나를 ‘사람 밥’으로 내놓은 시 속의 과수원 주인이 무슨 무형문화재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저는, 서리와 무전여행이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서리가 우애의 문화라면, 무전여행은 환대의 문화입니다. 아이들이 서리할 수 있고 나그네가 조건 없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마을. 이보다 더 나은 미래가 또 어디에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