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독재가 뒷받침되어 이룬 경제성장의 시대, 청년들의 머릿속에는 이념적으로 만들어진 ‘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통일된 민족, 민주주의 정치를 이룰 수 있는 국가, 또는 강한 노동조합 같은 것들이 개인의 희생을 불사하면서라도 이룩해보려 했던 ‘우리’의 목록이었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온몸으로 가자/허공 뚫고/온몸으로 가자/가서는 돌아오지 말자/박혀서/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그 시절 청년들의 가슴을 끓게 했던 고은 시인의 저 시구 속의 ‘우리’에게 통일은 절대명령이었고, 민주주의는 곧 박정희 1인 체제의 몰락과 동일시되었으며, 노동조합은 강철대오의 군사조직 같은 어떤 것이었다. 통일이 어떤 통일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봉쇄되어 있었으며, 민주정치의 정치·경제적 의미에 대한 물음은 유보되어 있었고, 노동조합이 어떻게 생활 정치에 개입해 들어올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제 시대는 변하여 경제성장의 가능성 자체가 의심을 받고, 설혹 경제성장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데 동원되는 청년 ‘자원’들은 불과 한 세대 위의 청년들이 꿈꿨던 이념적 ‘우리’ 따위에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 한 세대 전 ‘우리’라는 어떤 집단은 이 땅 위에 식민 유산을 극복하고 민중의 대표를 자임하는 지성인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소지하는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느냐는 이른바 대학 시절 ‘의식화’의 세례를 받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런 시민권을 소지할 수 있는 청년들은 한 세대 전이라 하더라도 많지 않았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 변두리에 자리 잡은 시골 청년들의 서울생활 분투기나 아파트 마련을 위한 자금축적의 무용담 속에 정치적 공동체 건설이라는 이념이 자리 잡을 가능성은 지극히 적었다.
‘의식화’를 지향한 민주 투사들이 염원했던 대로 이제 대통령도 자기 손으로 뽑고 청문회를 통해 시민의 양식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고위공직 후보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도 있는 시대이지만 시장과 사회를 오가며 분주히 자신과 가족의 생계와 생존을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개별적 시민들은 여전히 정치적 공동체 안에서 발언하고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졌듯이,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은 연 1000만 원도 안 되는 소득 밖에는 올리지 못할 정도로 벼랑에 몰리고 있는 형편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음성을 밖으로 표출할 길을 얻지 못한 채 33분에 한 명씩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으로 지상에서의 고통으로부터 탈출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 어쩌면 위에서 언급한 고은 시인의 시구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던 의식화된 엘리트들의 화살은 목표했던 과녁에 박혀 부정부패로 썩어가고, 거기서 소외되어 아무도 대표해주지 않는 노동인구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날지 못하는 화살이 되어 자신들의 가슴에 꽂힌 채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썩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이런 상황에 대해 정치적 해방이 곧 인간 해방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유태인 문제에 관하여」, 1843년) 선거를 해서 대표자를 뽑는다든가, 정당을 중심으로 의회를 구성하여 거기서 국정에 대해 논의한다든가, 하는 정치 행위에는 그 행위를 통해 사회 전체의 구성원들을 통합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많은 다수의 인민을 배제한 채 이루어지는 통합이므로 그러한 가상의 정치공동체는 추상적인 어떤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에게 정치적 해방이 곧 인간 해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인간 해방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추상적인 정치공동체의 추상성을 제거하고 개별적인 인간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공동체성이 구현될 수 있을 때 그때 인간 해방은 이루어진다. 특히 마르크스는 개인들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시장에서의 경제활동에서 공동체성이 이루어질 때 인간 해방은 이루어지는 것으로 봤다. 이럴 때 경제는 그 자체로 정치의 연장이다.
문학이나 예술 작품의 진정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정치적 공동체에 편입되지 못한 존재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망각의 늪에서 건져 올려 현실을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상상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성 있는 문학이나 예술이라면 해야 될 일일 것이다. 가령, 1000만 명도 넘는 관객을 눈물짓게 했던 〈국제시장〉에 등장하는 덕수의 일대기는 흥남부두철수에서부터 국제시장에 정착한 후 파독광부를 거쳐 월남전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의 굵직한 현대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한국 현대사를 담고 있다고 해서 특별히 어떤 역사적 전망이나 비전을 제시해주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덕목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는 개인이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역사적인 구체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영화에 대해 왜 이 영화는 해방의 역사를 외면하고 있느냐? 민주화 투쟁은 어디로 갔는가? 왜 기성세대는 반성하지 않는가? 하는 식의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전형적인 진영 논리에 갇혀, 이 영화가 지식인들의 관념으로 만들어진 가짜 해방(정치적 해방)의 역사에서 배제된 보통 사람들의 역사적 진실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 눈을 감는 셈이다.
이런 식의 어법과 독법은 영화감상 후 언론에 공개된 대통령의 촌평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영화의 주인공 덕수가 파독 광부 일을 마치고 돌아온 후 독일서 만난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고모의 삶의 터전인 ‘꽃분이네’ 가게 터를 지키기 위해 월남전 파병 대열에 합류하겠다고 주장하면서 부부간의 언쟁이 벌어지는 순간, 국기하강식이 벌어지자 주위 사람들로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를 강요받으면서 부부간의 언쟁과 논쟁은 강제적으로 끝맺음을 하게 된다. 풍자나 조롱 같은 효과를 낳는 장면이 거의 없는 영화지만 이 장면만큼은 한 개인의 삶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말하자면 국가권력에 대한 희화화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에게 이 장면은 부부 관계마저도 국가권력에 종속되며(되어야 하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영화 전체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비춰진다. 보수-진보 양극단의 해석이 이렇게 공통적으로 영화에 대한 오독이나 난독으로 귀결되는 것은 양자가 모두 영화에서 묘사되는 보통 사람의 구체적 삶으로부터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시각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관점을 상기시키자면, 경제적 삶이 곧 정치적 행위가 되어 보통 사람들의 인간 해방이 이루어질 가능성에 대해 진보-보수 모두 문을 닫고 있는 것이다.
〈국제시장〉이 한창 관객을 모으고 있을 때 TV에서는 신드롬 수준의 화제를 일으킨 드라마가 한 편 상영되고 있었다. 〈미생〉이다. 이 드라마가 특별히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의 소재가 직장인들의 직장 업무 그 자체이며 한 기간제 사원이 그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포착되는 인간관계의 본질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제시장〉이 한 세대 전의 미생들의 구체적인 삶을 재현하였다면 〈미생〉은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 오늘날의 다수 젊은이들이 직장 업무를 통해 바라본 세상의 진실을 그린다. 〈국제시장〉이 근대화를 통과하는 신산한 삶들의 슬픈 모습을 보여주어 우리 모두의 눈물샘을 자극하였다면, 〈미생〉은 지금 이 시대의 생존을 향한 가혹한 경쟁을 냉정하게 그려내면서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않는 개별적 존재들이 스스로 ‘우리’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경쟁의 현장에서 미생들이 더 잘난 누군가에 의해 대표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들을 대표하여 ‘우리’를 조직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드라마 〈미생〉은 보여준다. 그 과정은 크게 보아 몇 단계로 나뉜다. 첫째, 회사에서 업무를 본다는 것은 전형적으로 경제적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지만 업무의 분담과 선택에 이르는 전 과정은 때로는 대결을 통해, 때로는 타협을 통해 구성원들 간의 권력관계를 조절해나가는 정치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둘째, 회사 업무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시되는 것은 경쟁과 효율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회사의 구성원들이 ‘우리’라는 연대의 끈으로 묶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장그래’라는 드라마 주인공의 신분이 유일하게 비정규직 직원인데 장그래가 자신의 상사로부터 ‘우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희열감은 장그래를 둘러싼 모든 직원들, 심지어 회사의 사장까지도 전염되어 나간다. 셋째,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우리’라는 울타리를 필요로 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성원들은 모두가 자유로운 개인들이며 일하는 조직이란 결국 이러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조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미생〉의 후반부는 바로 이런 점을 극적으로 잘 보여준다. 거기서 정규직, 비정규직 사원 사이의 구분과 차별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리고 좀 더 극적으로는 장그래와 그의 상사인 오 차장, 그리고 오 차장의 상사인 김 부장 등이 맺는 관계는 단순히 회사 질서를 특징짓는 위계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어떤 종류의 자유가 깃들어 있다. 위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모두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서로 협동하고 있음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물론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단순한 드라마적 판타지라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드라마 〈미생〉은 생존을 위해 끝없이 투쟁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우리’로 조직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로운 개인들의 협동이라는 가치를 실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