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분에게 1인 혁명을 명령합니다.
그것만이 실현 가능한 유일한 혁명입니다.
- 로버트 프로스트 시 「토양을 만들자(Build Soil)」(1932) 중에서
교육 문제는 교육 문제로만 풀 수 없다. 교육 문제를 교육 문제로 푸는 대증요법으로는 진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교육 문제의 해법은 나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가치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무엇이 좋은 삶이고, 무엇이 좋은 사회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비전을 공유하고, 그런 삶과 사회를 위해 ‘저마다’ 실천하고 ‘더불어’ 연대할 때 교육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사정은 문화예술교육의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문화예술교육 현실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을 찾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제도화 10년이 학교 안팎의 현장에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나 넓고도 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철학자가 “좋은 실천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한 말처럼 좋은 실천을 위한 사유와 행동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극단적 이기심과 경쟁의 신화를 철저히 내면화하면서 성공, 부유, 건강, 명예를 추구하는 스놉snob의 삶, 즉 그들만의 사적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삶이야말로 승리자winner가 된다는 판타지를 용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그렇지만 사회와 교육의 변화를 전적으로 법(제도화)에 의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적어도 문화예술교육에 관한 한, 우리는 이미 그런 경험을 제도화 10년을 맞는 동안 무수히 하지 않았던가. 하나의 제도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 또한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는 차라리 어느 경제학자가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2003)이라는 책에서 언급한 바 있는 ‘나부터’ 교육혁명이라고 한 말에 더 깊은 신뢰와 지지를 보낸다.
‘나부터’ 교육혁명을 추진한다는 것은 교육공학적 입장에서 교육 개혁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 대상이 되는 아이들 혹은 성인들 입장에서 생각하고, 나부터 바꾼다는 자세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법을 찾는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병든 교육의 문제가 병든 사회의 문제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나 또한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예술교육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미국의 저명한 아나키스트운동가 애먼 헤나시(1893-1970)가 주창한 바 있는 ‘한 사람의 혁명One-man Revolution’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한 사람의 혁명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자기 자신의 변화를 위한 시도라는 관점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점을 승인하고 수용한다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 시스템의 인질 신세에서 벗어나고, 규칙의 내면화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시스템의 인질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지금의 문화예술교육 문제는 예술교육 정책에 있어서 표준화 문제와 함께 이른바 ‘지침 행정’이라는 이름의 사회적·심리적 관리기술을 너무나 섬세하게 적용하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런 표준화 정책과 관리기술이 우리가 일정한 리듬 속에서 살고 있다는 감각을 완벽히 상실한 이 사회에서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재구성하려는 문화예술교육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은 말할 나위 없다. 나는 이 점에서 E.F.슈마허의 용법을 차용하자면 “최고의 행정은 ‘행정부정이론’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 슈마허는 ‘최소한’의 행정으로도 잘 돌아가는 조직구조를 찾아내자고 역설한다.
슈마허가 자발성을 억압하는 이른바 크리스마스 트리 유형의 조직 대신에, 놀이공원에서 끝에 수백 개의 작은 풍선이 달려 있는 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바닥에 서 있는 조직 유형을 이상적인 구조라고 파악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그 줄을 놓치지 않고 잘 쥐고 있을 사람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이 비유는 인간적 접촉이 가능한 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조직 유형의 원칙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슈마허가 제창한 행정부정이론을 지금 당장 우리 현실에서 기대하는 것은 난망하다. 이 점에서 한 사람의 혁명이 갖는 의미와 맥락에 대해 더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의미와 맥락은 아마도 미국 작가 리 호이나키가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1999)에서 우리는 지금 세 종류의 분리 혹은 고립 상태에 처했다고 진단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는 “사람을 그 육체와 장소와 시詩로부터 떼어놓고자 하는 노력”이 우리 시대에 전면화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육체, 장소, 시詩, 이 세 종류는 실상 우리 삶의 핵심 구성원리가 되어야 한다. 리 호이나키의 진단에서 나는 육체, 장소, 시詩의 회복이야말로 문화예술교육의 목표이고 지향점이어야 하며, 우리 삶의 새로운 재구성을 위해 필요한 출발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우리는 육체노동을 혐오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으며, 자신의 토착적 에토스로부터 추방당한 근대의 저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며, 삶의 온전함을 위한 필수적인 시의 세계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 산문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특히 산문적 삶을 산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삶에서 ‘기쁨’이라곤 없이 강압과 의무만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산문적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항상 더 좋은 것이 아니라 항상 더 많은 것을 추구한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처리해야만 하는 과다한 정보로 도처에서 정보 과부하에 시달리는가 하면, 늘 접속 가능하고 항상 연락할 수 있어야만 하는 과잉 커뮤니케이션에 중독되었다.
과연 그런 산문적 삶에서 우리들 자신이 웰리빙well-living의 기쁨과 의미를 누릴 수가 있을까. 이 점에서는 성인들은 물론이요, 소비주의에 중독된 아이들 또한 별다를 바 없으리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인생에서 저지른 최대의 실수를 묻는 질문에 독일의 어느 재력가가 “친구들과 지낸 시간이 너무 적었다”고 고백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학교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예술교육은 우리 자신이 한 사람의 주체로 탄생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교육철학과 교육방법론에 더 철저히 봉사해야 한다. 문화정책을 세심하게 시행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가 “예술은 관리행정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뼈대이며, 뼈대이어야 한다”고 한 것도 그런 이유와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한나 아렌트가 “문화(즉 예술)의 핵심은 아름다움이다”라고 주장한 것 또한 인간의 진취성과 문화예술과의 관련 양상을 언급한 주목할 만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정책을 결정할 때 최소 단위의 의사결정권을 존중하려는 자세를 뜻하는 보충성subsidiarity 원리가 제대로 구현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경우 이 보충성의 원리는 지방분권 혹은 지방자치의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사람의 혁명이 어느 때보다 지금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의 리 호이나키는 좋은 삶은 ‘용기’의 결여, ‘상상력’의 결여 그리고 ‘진실’의 결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용기, 상상력, 진실이 결여된 삶은 주체적 행동 대신에, 조건반사적 행동이 지배적인 양식이 되어버린 삶을 의미한다. 그런 조건반사적 행동이 지배적인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사람은 필연적으로 정신적 무감각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정신적 무감각 상태에서 핵무기적 자아가 발아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래서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를 갖는 것이 퍽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어떤 나쁜 관행들과 습속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 있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 글의 제사題詞에 인용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토양을 만들자」는 한 사람의 혁명에 동참하려는 나와 우리들의 슬로건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너무 비장하지는 말자. 언제나 항상 웃음과 여유를 잃지는 말자. 저 톨스토이 소설에 등장하는 ‘바보 이반’처럼! 거룩한 바보가 나와 세상을 바꾸는 법이다.
★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 에 연재된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함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