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듣기만 해도 저절로 신나고 어깨가 들썩거리는 말이다. 일 년 내내 축제만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금은 축제 과잉상태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기원도 모호하고 의미도 어정쩡한 축제를 남발한다. 물론 좋은 축제는 지역민들의 사기를 북돋을 뿐 아니라 타지에서 온 사람들로 인해 경제적 부가가치도 제법 높다. 그러나 그저 남들 하니까, 우리 지역에는 축제 하나라도 없으면 아쉬우니까, 급조한 축제들 때문에 제대로 된 축제들까지 한 묶음으로 비난 받는 건 아쉽다.
아마도 근대화 이후 대표적 축제는 대학 축제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학들이 축제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러나 60년대 들어 숨을 돌리고 난 뒤에 대학들은 자연스럽게 축제를 즐겼다. 당시 대학 축제는 서양의 문화를 수입해서 나름대로 소화하려는 몸짓이었다. 그래서 상당 부분은 서양식 축제였다. 그 축제에 갈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됐다. 대학 축제에 갈 수 있는 게 하나의 특권처럼 여겨졌다.
70년대는 정치적 억압과 맞물려 축제가 억압된 젊음의 발산지 역할을 했다. 특히 70년대 들어 맥주, 청바지, 통기타로 대변되는 저항과 소비의 젊은 문화가 욕구하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위한 몸짓이 대학 축제에서 다양한 시도로 나타났다. 80년대 들어서 대학은 크게 변했다. 정치적 상황은 더 암울했다. 대학생들은 이전까지의 학생문화운동이 서양의 모방이었다는 점과, 대중과의 교류가 없는 '그들만의 축제'였음을 반성했다. 대학의 축제가 바뀌었다. 초대권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축제의 방향은 대동제(大同祭)의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민중과 호흡하는 대학의 문화적 자각과 사회적 환경에 따른 접근이었다. 90년대는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뤄지고 이전의 민중적 대중화 욕구도 사그라졌다. 대학 총학생회의 탈정치화 탈이념화도 가속되었다. 이제 대학 축제는 축제 본연의 모습인 놀이와 잔치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축적된 게 없었다. 그래서 공중파에서 친숙하게 보던 여러 놀이들을 모방했다. 이전의 타성적 놀이들과 어우러진 이 축제는 금세 시들해졌다. 그저 작년에 있었던 아이템을 반복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대학문화의 정립 자체가 모색되지도 성숙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학생들은 제 돈으로 만든 축제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참여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엉뚱하게 대학축제의 꽃이 인기가수 불러다 공연하는 것이 됐다. 엄청난 초청비용을 학생회비로 물면서 말이다. 이게 과연 대학축제 본연의 모습일까?
대학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은 바로 '실험정신'이며 '시대정신'이다. 그게 없으면 대학 문화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끊임없는 아이디어와 시대정신의 접목이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낸다. 그게 없다면 차라리 대담하게 축제를 포기하는 선언을 하는 게 오히려 하나의 '실험성'이 되지 않을까?
"저희는 이번에 대학 축제 문화의 정신의 구현을 위한 실험성과 시대정신의 부재에 대해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축제를 포기하겠습니다. 다음 학생회는 더 좋은 대학축제를 만들어내기를 빌며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습니다. 저희는 이번 일에 책임지고 총사퇴하겠으며, 학생회비에서 충당되는 축제 비용의 처리는 향후 공청회를 거쳐 전체 학생회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실험이 아닐까? 그게 사회에 던지는 의미와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대전환점이 되기도 할 것이다.
만약 그런다면, 지금 전국에서 벌어지는 돈 낭비에 가까운 허접스러운 엉터리 축제들도 퇴출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차피 한 번은 죽어야 거듭날 거라면, 늦기 전에 스스로 죽어야 한다. 찬란한 부활을 위해. 그러니 이쯤에서 한 번 축제의 깃발을 내리는 건 어떨까?
★ 본 기고글은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