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30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는 도서관문화발전 국회포럼(공동대표 신기남, 이주영 의원, 공동간사 김장실, 도종환 의원)이 창립되었습니다. 여야 4당과 무소속의 국회의원 74명이 참여한 도서관문화발전 국회포럼은 "더 많은 국민이 질 높은 지식정보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국회가 나서서 도서관 정책의 우선순위를 높이고 보다 많은 예산이 도서관 발전에 투자되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며, "필요하다면 관련법을 개정하고 도서관 발전을 저해하는 구습이 있다면 과감히 바로잡도록 지혜를 모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날, 정옥자 교수(서울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가 '국가 발전 동력으로서의 도서관-규장각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기조강연을 했는데, 저자의 허락을 얻어, 강의 원고 전문을 게재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전의 정리와 국학의 발전은 한 국가의 정체성 확립과 관련된다. 17세기 청나라는 북방족으로서 무력으로 중국을 점령하고 ‘힘의 통치’에 한계를 느끼자 중국 역대의 고전을 수집 정리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간행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문화 사업을 통하여 강남으로 피난, 은거하거나 저항적인 한족지식인들을 포섭하고 문화국가로 탈바꿈하였다.
조선왕조 문물제도의 기초를 놓은 세종대왕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사업도 집현전을 통한 고전의 연구와 인재양성이었다.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라 불릴 정도로 문운文運이 크게 일어난 18세기 영·정조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영조 대에는 조선 전기에 이루어진 문물제도를 재정비하였으니 <속재전>, <속오례의> 등 ‘속’자가 붙은 문헌들이 모두 이때 재정리된 것이다. 정조대에 이르면 규장각을 설립하여 한편으로는 서적을 수집 간행하여 고전 정리 사업을 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재를 양성하면서 문화정책을 펴나갔다.
규장각은 내각과 외각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바, 내각은 창덕궁 안에 두어 왕의 문화정치를 보좌하게 하고 외각은 강화도에 두고 국립출판사격인 교서관을 여기 부속시켜 책을 출판하였다. 또한 정조가 규장각을 중심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중국본 서적 6만여권이 서울대 규장각에 남아 있는데, 당시 중국을 통하여 고급정보를 입수하는 방법이 서적을 수입하는 것이었으므로 왕이 직접 정보산업에 나서서 사업을 선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조선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규장각도 국가의 흥망성쇠와 부침을 같이 하면서 1910년 일제의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가 광복 후 서울대로 이관되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는 고도서 18만 책, 옛날 서류인 고문서 5만장, 책을 찍어내던 목판인 책판 1만 8천 판, 현판 76점 등 모두 26만 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 고도서에는 고서 외에 지도 의궤儀軌(국가행사 기록과 그림)와 지도 등 시각자료도 포함된다.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조선왕조의 연대기들이니 조선이라는 나라가 문치文治(글로써 다스림)를 지향하며 기록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웅변으로 말해준다. 조선이야말로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국가였다.
그 동안 학자들 사이에서는 규장각 자료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국학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었지만 대중적인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규장각에서는 규장각자료의 보존과 열람편의 제공 등 기본적인 도서관 업무 외에 중요한 규장각도서를 영인하여 보급하고 목록과 해제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학계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기초가 되어 자료의 전산화를 시작한지 15년이 되었다.
이 데이터베이스 작업이 성공할 경우 국보급 규장각자료는 원본의 모습을 보여주는 삼차원의 이미지 파일을 통하여 원본의 겉장과 속 내용은 물론, 돌려서 뒷면까지 볼 수 있도록 하여 원본을 보여줄 필요가 없으므로 원본보존에 완벽을 기하게 된다. 특히 고지도나 의궤 등 시각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는 관련 학문분야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할 전망이다. 초서로 된 자료는 탈초(脫草)하고 방점을 찍는 작업까지 완료하여 원문의 한글 번역은 물론 영역하여 세계의 한국학 연구자들에게 제공하고 나아가 CD-ROM으로 제작하여 보급하려는 계획이다.
1. 정조대왕의 시대와 역할
조선왕조는 500년 이상 지속된 나라로 세계에 그 유례가 없을 만큼 장수한 국가다. 그 장수의 비결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가장 원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요인으로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아 그 이념을 국가사회에 실현한 성리학적 명분사회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성리학적 통치철학은 힘에 의한 폭력적 지배가 아니라 명분과 의리를 밝혀 국민을 설득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통치방식은 패도覇道정치가 아니라 왕도王道정치를 지향하였고 법치보다는 덕치德治를 우선시하였다. 왕도정치와 덕치의 장에서는 강제적 법의 남용을 억제하고 인간의 자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교화를 통한 인간화작업을 중요시하였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 학문의 전공자들을 통치행위의 주체로 삼아 문치文治를 하는 문화국가를 지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통치의 주체가 된 사대부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이상으로 하는 학자관료로서 수기修己의 단계에서 인격과 학문을 닦아 전인적 인간이 되어야 치인治人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문·사·철文·史·哲을 전공필수로 하고 시·서·화時·書·畵를 교양필수로 하여 전자에 의해서는 이성훈련을, 후자에 의해서는 감성훈련을 함으로서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된 균형 잡힌 인간형을 추구하였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이성훈련으로 체득한 의리와 감성훈련으로 체질화한 인정을 조화시키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이러한 학문연마와 인격수양은 최고통치자인 왕에게도 강도 높게 요구되는 것으로 세자 때는 서연書筵, 왕이 되어서는 경연經筵을 통하여 이상적인 통치자가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되었다. 신하들로부터 제왕의 학문인 성학聖學을 교육받는 일은 왕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한 의무사항이었고 이에 소홀한 왕은 반정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학문적 능력과 군주의 자질을 겸비한 이상적인 제왕들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는데 숙종·영조·정조 등 군사君師(임금이자 스승)로 불리는 왕들이니 정조대왕이야말로 그 전형이다.
조선사회는 17세기에 중국에서 명·청이 교체되어 세계질서가 변화하는 전환기에 처하여 멸망한 명나라를 계승하는 정통문화국가라는 자부심을 키우면서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내 문화가 최고’라는 문화자존의식을 고양하여 조선고유문화를 창달하게 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국제질서에서 문화적으로 선진인 조선이 중심국가라는 조선중화사상을 형성하여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국민의 자부심을 회복하는 기제로 삼았다. 이에 조선 문화가 세계제일이라는 문화자존의식이 국민의식으로 자리하였다. 이와 같이 문화자존의식과 자기 정체성을 다진 결과 18세기에 이르면 조선고유문화인 진경문화眞景文化를 이루어 내었다.
진경문화의 정점에 섰던 정조대왕은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고 인격적 완성도가 높았다. 신하들을 독려하고 스스로 모범을 보여 교화를 통한 국가기강의 확립에 전력 투구하였다. 국가최고통치자로서 사회체제를 지켜야하는 보수적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변화에도 적극 대응하여 새 시대에 맞는 지배논리를 창출하고 이를 구체적인 정치현실에서 하나하나 풀어갔던 것이다.
정조 시대에 이르면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조선사회에 밀려오면서 시대정신이던 조선중화주의에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외부적으로 청나라의 건륭문화의 영향이고 내부적으로는 조선이 농경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 전환되는 사회적 변혁기에 처하였기 때문이다.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유교적 공동체사회가 농경사회의 물적 기반에 의존하였다면, 상공업사회로 이행하고 있던 조선사회의 운영논리는 그에 조응하는 변화논리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청나라의 선진문명을 적극 도입하자는 북학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호란 후 1세기 반에 걸쳐 조선이 내부결속력을 다지며 정체성 확립에 성공하였으나 더 이상 자존의식에 안주해서는 낙후될 염려가 있다는 집권층 내부의 젊은이들의 반성 위에 제기된 신문명 도입운동이었다. 이들은 부조父祖들이 신봉하던 북벌론北伐論(청나라를 쳐서 복수 설치해야 한다는 논리)을 폐기처분하고 정반대의 논리인 북학론北學論(청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논리)을 제기함으로서 조선사회의 변화를 예고하였다.
정조는 이러한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자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정책을 계승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군사로 자부하던 정조는 선왕인 영조이래 추진되던 탕평정책을 계승하여 당파성을 타파하고 왕권강화를 통하여 일사불란한 통치체제를 구축하면서 전통적으로 학파의 영수인 산림들이 주도하던 학계까지 자신이 통괄한다는 입장이었다.
지지기반을 확보하여 문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립하고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장악하여 나갔다.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여 새로운 지역적 기반을 마련하면서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복권을 통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였다. 아울러 사회개혁정책으로 양반의 첩자인 서얼에게도 청직淸職(문장력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직책으로 관직의 꽃으로 인식됨)을 허용하는 서얼허통정책을 폈다. 나아가 1791년에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단행하여 특권상인의 독점권을 해체하고 상업자율화를 위한 개혁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제 정부기구에서 자신의 권력기반이 될 만한 기능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연구소이자 친위기구인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왕실도서관이자 문화정책을 수립하여 추진하는 기능도 갖고 있었다. 조선사회의 전환기에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야하는 시대적 과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서도 기존의 정부기관 외에 별도의 핵심 기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가 탁월한 추진력을 갖추고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었던 동인은 당대의 어느 학자와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의 문치주의는 이 시대에 와서 활짝 꽃피면서 인문적 소양과 학문적 능력을 갖추지 않고는 제왕으로서 자격 미달자로 낙인찍혀 신하들을 설득할 수도 없거니와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지적 풍토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시대에 이룩한 문화 중심국으로서 자부심을 지키는 한편, 선진문명을 일구어 내고 있던 청나라의 문물을 도입하여 상호 보완하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갔다.
정조는 조선왕조 22대왕으로 1752년 9월 22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출생하여 1800년 6월 22일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1776년 25세로 왕위에 오른 지 24년만이었다. 조선의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긴 왕이다.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는 180권 100책 10갑으로 된 방대한 분량으로 사대부들의 문집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18세기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로 많은 인문학자들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탁월한 문집들을 남겼지만 <홍재전서>는 그 중에서도 압권이다.
<홍재전서>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수상록에 해당하는 「일득록日得錄」은 그의 고양된 사유체계를 보여주고 있으니 정사를 보는 틈틈이 생각하고 고민하여 얻은 단상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산적해 있는 결재사항과 정치적 결단 끝에 명상에 잠기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국가최고지도자의 이상형을 발견하게 된다.
정조대왕이 서거한지 20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그를 재조명하는 이유는 이 시대 우리가 동경하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참모습을 그에게서 찾아내고 그분이 이루려하다 못다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개혁을 오늘 우리 역시 수행해야한다는 각성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맞아 우리가 나아갈 길을 가늠하기 위하여 정조대왕의 길을 되집어보고 법고창신法古創新(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할 필요가 있다.
2. 규장각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규장각은 숙종 때 역대 왕의 글이나 글씨 등을 보관하는 소각小閣으로 건립되었던 것을 1776년 정조대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 기능을 대폭 확대하여 학문연구를 통하여 문화정책을 개발 추진하는 문화정치 기구로 재편하였다. 창덕궁 후원(비원으로 불리고 있다) 주합루 아래층에 규장각이라는 현판을 걸고 주 건물로 삼았고 서고로 사용하던 여러 부속건물을 아우르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역대 왕의 어제 어필 어진 등을 보관하는 장소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으니 세조 때 양성지에 의해서였다.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숙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왕실업무를 관장하던 종부시宗簿司에 소각小閣을 별건하여 역대 왕들의 글이나 글씨,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이 때 숙종의 친필로 「奎章閣」이라는 편액을 써서 걸었다.
숙종 대에 이르러 규장각이 소각으로나마 설치된 것은 이때에 전기의 미비점이 정리되는 일련의 사실과 부합된다. 단종의 묘호문제, 사육신의 재평가문제 등 전기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일들이 숙종 대에 이루어지는 것은 이 시기부터 조선왕조가 지향한 성리학적 명분사회가 확고한 기틀을 다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게 단초를 연 규장각은 18세기 후반 정조대에 와서 확대 재편되어 국가의 문화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핵심기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 22대왕 正祖(1752-1800)가 1776년 25세의 젊은 군주로 왕위에 오르자 제일 먼저 한 일이 규장각의 설립이었다. 정조는 즉위 초에 「계지술사繼志述事(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정사를 처리한다)」「숭유중도崇儒重道(유자를 존숭하고 도학을 중히한다)」라는 시정방침을 표명한 바 있는데, 규장각도 선대왕(숙종)이 뜻한 바 있어 세운 기관이므로 이를 계승한다는 명분 속에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려는 의지를 갖고 환골탈태시킨 것이다.
정조는 비명에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다. 치열한 당쟁과 살벌한 명분싸움의 정치상황에서 어렵게 왕위에 오른 그는 새로운 정치기구를 필요로 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친위세력을 키우는 중심기구로 삼았던 것이다. 규장각 설립 초기에는 정치기구로서의 성격이 강하였지만 점차 문화정책의 중심기관으로 기능하였다. 홍문관과 예문관 등에서 글로써 벼슬 사는 문한관文翰官을 청직淸職이라 하여 조선시대 관료의 꽃이라 하였는데 규장각은 이 양관의 기능 이외에 승정원의 비서실 기능, 춘추관의 역사기록 기능, 사간원의 언론기능, 종부시의 왕실관련업무까지 아우르면서 “청화지직淸華之職”이라 불릴 정도로 관료기구의 핵심이 되었다.
규장각은 홍문관에서 관장하던 경연의 임무를 이관 받아 정조가 주체가 되는 학문토론의 장을 마련하는가 하면, 정책입안은 물론 정책개발을 위한 참고도서를 수집하여 소장하고 서적간행까지 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규장각 관리인 각신閣臣을 청직으로 격상시켜 친위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또한 초계문신 제도를 시행하여 젊은 관료들을 재교육시키는 공무원교육원의 역할로 정조의 친위세력 형성에 중요한 몫을 하였다. 초계문신제도란 37세 이하 참상(6품 이상) 참하(7품 이하)의 젊은 문신 중에서 문명이 있는 자를 뽑아 규장각에서 재교육시켜 40세가 되면 면제하도록 규정한 제도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공무원 재교육 제도인데 37세 이하의 젊은 사람으로 한정시키고 이미 문명이 나있어서 재교육의 효과가 큰 인재를 골라 뽑아 가능성을 확대하였다는 점이 특수성이다. 이는 규장각 설립의 이대 목표인 「우문지치右文之治: 문화정치)」와 「작인지화作人之化: 인재양성)」 중 ‘작인지화’라는 인재양성의 이념에 입각한 구체적인 장치였다. 조선 전기의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정조는 그 효과가 기대했던 바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조정이 초계문신 출신으로 가득하고 어정御定의 책을 출판하는데 이들의 힘을 빌렸다고 평가하였다. 정조의 문화정책 추진에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공경대부의 태반이 이들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정조가 의도한 바 인재양성의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 후원(지금의 비원) 중에도 가장 경치가 좋은 영화당暎花堂 옆 작은 동산에 2층의 누각을 지어 주합루宙合樓라 하여 규장각의 중심 건물로 삼고 주변에 봉모당奉謨堂,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 서고西庫 등의 부속건물을 지어 왕실자료와 서적 등을 보관하였다. 규장각 현판을 건 주합루에는 정조 자신의 어진, 어제, 어필, 보책, 인장 등을 보관하였다. 그 서남쪽에 있던 봉모당에는 역대 선왕들의 어제御製, 어화御畵, 고명誥命, 유고遺誥, 밀교密敎, 선원璿譜, 세보世譜, 보감寶鑑, 장지狀誌 등을 보관하였다. 그 정남쪽의 열고관과 그 북쪽의 개유와에는 중국서적을, 서북쪽의 서고에는 조선서적을 보관하여 도서관의 기능을 갖도록 하였다.
주합루의 서쪽에 서재로 지었던 서향각書香閣을 이안각移安閣으로 고쳐 주합루와 봉모당에 보관한 어제 등의 포쇄(책이나 문서에 바람을 쏘여 건조시킴으로써 부식을 방지하는 작업) 장소로 사용하였다. 규장각 각신들의 사무실인 이문원은 왕의 집무소인 인정전 서쪽 오위도총부 건물로 이전하여 근시하도록 하였다. 그 건물 기둥에 있던 현판을 현재 규장각에서 볼 수 있는데 「객래불기客來不起(손님이 오더라도 일어나지 말라)」는 수교도 있다. 규장각의 엄격한 규율과 특권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 징표이다.
규장각에는 위에서 언급한 의궤 외에 시각자료로서 상당수의 고지도가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 발달한 인문지리학의 수준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지도는 18세기 문화 중흥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진경산수 화법으로 그린 지도는 사람이 살아 숨 쉬는 삶의 터전으로서 묘사된 것이 특징이다. 사실성에 대한 지나친 강박관념은 보이지 않고 인적사항이나 관아 등이 중심이 되어 개념도에 가깝다.
의궤나 지도 등 시각자료 외에 규장각 자료의 대다수는 문집 등 방대한 문헌자료이다. 200년 이상의 세월이 경과하였음에도 종이의 질김이나 먹의 윤기, 인쇄된 글자의 선명함은 긴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정유자, 생생자, 정리자 등 활자의 아름다움까지 더하여 조선중화주의를 부르짖으며 조선 문화가 당시 세계문화의 제일이라던 선조들의 자부심이 허장성세가 아니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규장각에는 연구에 참고하기 위하여 1781년(정조5) 당시 중국서적 2만 책과 한국 서적 1만 책 등 모두 3만여 책을 수집 소장하고 있었고 그 후 지속적으로 많은 도서를 간행하여 보관하였다. 1781년에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귀중도서와 왕실관계 문서들을 보관하게 하였는데 1866년 병인양요로 프랑스군에 의하여 6000여권의 책이 소실되고 300쳐 책의 어람용 의궤儀軌(국가의전에 관한 기록과 그림)류는 약탈당하였다. 프랑스정부가 영구 임대한 파리국립도서관 보관도서가 바로 이 책들이다.
정조는 규장각의 출판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립출판기관이던 교서관을 규장각에 소속시켜 외각外閣이라 하였는데 이곳에서 쓰던 목판 17,000여장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된 후 규장각도서 일부와 함께 이곳으로 옮겨졌다가 1975년 서울대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이들 목판은 오랜 세월동안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관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2000년 봄 규장각에서 대대적인 청소작업을 하였다.
규장각은 1910년 일제의 강점과 함께 폐지되고 규장각도서는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이때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고 규장각의 봉모당에 있던 일부 자료들을 분할하여 장서각을 세웠다. 그 옆 낙선재에 살던 왕실 분들을 위로한다는 구실이었다. 역대왕의 유품들인 왕실관계 중요자료들이 여기에 많이 포함되었고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다.
규장각도서는 다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고 광복 후 1946년 서울대학교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서울대에서도 오랫동안 도서관 부속실로 존재하다가 현재의 건물을 짓고 규장각으로 딴 살림을 차려 독립기관이 된 것은 1992년이다.
민족의 수난과 함께 정처 없이 떠돌던 규장각도서는 서울대 규장각에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서울대 규장각은 26만여 점의 고도서, 고문서, 책판을 소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고도서 17만 5천여 책, 고문서 5만여 점, 책판 및 기타 1만 8천여 장이다.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 6종 7,076책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8종 28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규장각은 많은 소장 자료를 영인하여 연구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고 장기적인 계획으로 소장 자료의 DB(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의 학문 후속세대들이 꺾꽂이가 되어 휘청거리지 않도록 키우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학문 체계를 재점검하여 규장각을 중심으로 하는 통합적이고 원대한 학문체계를 설계해야할 것이다.
이제 서울대 규장각은 도서보관의 기능에서 탈피하여 연구기관으로 도약하였다. 도서관기능은 물론이요, 박물관기능을 아우르고 있으며 연구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국학연구기관이다. 규장각을 통하여 우리는 조선시대 문화정치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고 바람직한 문화국가의 청사진을 그리는 기초를 만들어 갈 수 있다. 현재의 난국을 돌파하는 지혜의 원천이며 문화운동의 전초기지가 될 것임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앞으로 규장각은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문예부흥의 진원지가 될 것이다. 특히 고급 전통문화와 기록문화, 왕실문화의 보고로서 고지도, 의궤 등 예술과 정보를 아우르고 있는 자료들은 문화상품 개발의 촉매제가 될 전망이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의 현실에서 고급 전통문화를 어떻게 활용하여 문화상품화하고 관광자원화 하느냐에 우리의 생존전략을 걸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규장각은 일제 식민사관에 의하여 왜곡되고 평가절하된 조선문화의 높은 수준과 선조들의 치열한 삶의 자세 등을 실증하는 물적 증거이다. 1세기에 걸쳐 제국주의에 의하여 손상된 전통문화의 복원과 그에 입각한 정체성의 정립을 통하여 상처받은 국민적 자부심을 회복하려는 오늘의 시점에서, 규장각은 여러 가지 문제를 푸는 열쇠를 간직하고 있는 민족문화의 보고이다. 나아가 21세기 우리 사회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비의秘意가 잠재하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 학자는 규장각이야말로 DMZ(비무장지대)의 생태보존실태와 함께 세계화시킬 수 있는 우리나라의 보물이라고 말하엿다. 가장 학구적이고 또한 미래지향적이며 세계를 향한 창구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규장각자료의 정보화는 앞으로 우리 문화의 장기적인 발전에 기초가 될 것이다. 이는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 이후 실로 300년 만에 도래하는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준비하는 작업이다. 또한 일제의 압제와 냉전시대에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정체성 찾기 움직임과 맞물려 의미심장하다.
19세기 말 서세동점西勢東漸하던 세계질서 재편기에 서양과학문명의 충격 속에 기존의 조선 문화를 지키면서 우수한 서양기술을 수용하려던 지성계의 한 흐름이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동도東道의 정수인 규장각에 있는 국학 자료를 서기西器로 규정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매개로 하여 전산화함으로써 동도서기론이 실현되는 것으로 평가해도 좋을 듯 싶다.
지금까지 조선 후기 국가발전의 동력으로서 규장각의 어제, 오늘의 서울대 규장각과 미래에 대하여 짚어보았다. 18세기 규장각은 왕실도서관으로 엘리트들에게만 허용되었고, 문화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국립기관이었지만, 현 서울대 규장각은 도서관, 박물관, 연구소의 기능을 아우르며 자료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진력하고 있다. 자료의 전산화는 모든 국민에게 자료를 제공하여 대중화하기 위한 것이며 전통고급문화가 우리 문화발전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상에서 규장각을 하나의 예로 들었지만 현재 도서관의 기능은 계속 진화 발전하고 있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도서관의 정통적 임무는 도서를 대출하고 열람하게 하는 것이지만, 나아가 지식정보화시대에 그 임무를 수행하는 구심점이 되어야함은 물론이다. 지식을 정보화하여 축적하고 공유하고 전파하는 선구자가 되어 지역공동체의 구심점 역할도 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역사회 구성원의 평생교육과 사회교육 등 주요임무를 수행하여 주민의 지성과 품격을 높이는 역할도 요구된다. 도서관이 도서열람이라는 단순한 기능에서 벗어나 동네의 문화센터라는 통합적 기능을 다하기 위하여 동네마다 도서관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도서관에 가는 풍토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동네마다 도서관을 설립하여야 한다.
특히 어린 시절의 독서와 도서관 경험은 평생 가는 지적 자산이므로 어린이들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고 사회활동에서 멀어지는 노인, 살림살이에 찌들어 활자와 멀어지는 주부 등 소외계층의 지적 활동을 제고하는 등 복지개념을 도입할 필요도 있다. 도서관이 중심이 되어 열리는 공개강좌에 많은 이들이 몰리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적 목마름을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제대로 수행하고 도서관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전문 인력이 필요한데 현재 도서관들의 사정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단지 책을 빌려주고 수납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노동이다. 지금 도서관에 필요한 인력은 전문지식을 갖춘 전문사서이다. 각 분야에 전문지식을 갖춘 사서들만이 독서대중의 자문과 요구에 대응할 수 있고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의 전문 강사의 수준을 파악하고 있어서 사회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이제 도서관은 대중화와 활성화를 통하여 국민의 품격을 높이는 사회교육의 장으로, 신지식인 배출의 요람으로, 우리나라가 선민문화국가로 가는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그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