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는 사색, 둘이 있으면 대화, 여럿이 함께 있으면 교제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혼자 있으면 고독과 고립을 구분하지 못해 불안해하고 둘이 있어도 서로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고독할 줄 모르니 자신과의 소통은 무망하다. 그런 사람이 타인과의 대화가 가능할 리 없다. 딱히 할 말이 없는 건 화제의 빈곤 탓이지만 자신을 알지 못하니 교통할 주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수히 많은 말들이 떠다니지만 정작 알맹이 있는 말들은 별로 없다.
대화의 상실은 힘으로 이루어진 관계들이 만들어낸 허무한 결과들이다. 이른바 갑甲들의 횡포는 대화를 원천적으로 거부한다. 대통령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국민과 대등한 존재이다. 그는 국민을 대신한 대표 일꾼일 뿐이다. 따라서 국민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지난 정부와 대통령이 저지른 가장 고약한 짓은 대화와 소통의 거부였다. 국민들과는 소통하지 않고 강대국에 가서 마치 선물하듯 검역주권마저 상납한 것에 대한 분노가 시민들을 촛불집회로 끌어모았다. 평화롭고 장기적인 집회였다. 그러나 권력을 쥔 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그들을 불온한 세력으로 몰았을 뿐이다. 두 달 넘게 이어지자 마지못해 말로만 사과했을 뿐 그 뒤로 오히려 시민들을 겁박하고 거짓으로 도배했다. 결국 시민은 권력자와의 대화와 소통을 거부당했고, 권력자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포기했다. 절망을 넘은 체념이 지난 5년 우리가 얻은 가장 가슴 아픈 상처이다. 문제는 지금의 대통령과 정부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업이라고 다를까? 돈의 위세를 내세워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이사회도 오류와 위험성을 걸러내기는커녕 거수기 역할뿐이다. 심지어 사외이사들조차 돈 몇 푼에 현혹되어 모른 척한다. 그나마 그 자리 하나 얻으려고 이리저리 선을 대본다. 대화가 있을 리 없다. 직원이나 노동자도 그저 부리는 사람일 뿐 그들과 소통하고 대화하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를 이끄는 건 자본가와 노동자지만 그걸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건 노동자를 위한, 혹은 노동자와 함께 이루는 체계라기보다 자본가를 위한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이 명령과 복종만을 요구한다. 대화와 소통은 없다.
학교 또한 예외가 아니다. 교육부는 학교를 통제하고 교장은 교사를 장악하며 교사는 학생들을 단순히 가르치는 대상만으로 바라보는 구조에서 대화나 소통은 자리 잡을 곳 없다. 많은 사학들이 온갖 비리를 경쟁적으로 저지른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고치거나 반성하기보다는 새로운 비리의 방법을 찾아내는 데에 혈안이다. 바른 말 하면 온갖 꼬투리 잡아 쫓아내면 그뿐이다. 그런 못된 짓을 지적하고 처벌해야 하는 교육부와 교육청은 짐짓 고개를 돌린다. 그들의 대화 상대는 힘센 자들뿐이다. 나중에 그들이 주는 자리 하나 덥석 물 생각뿐이다.
언론은 또 어떤가? 진실과 정의를 위해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라고 했더니 고깃덩이에 현혹되어 권력이나 사주의 눈치만 보기 급급하다. 피를 흘려가며 투쟁하여 얻어낸 언론의 자유조차 그저 자기들의 왜곡된 생각을 마음대로 퍼뜨리는 자유로 간단히 변질시킬 뿐이다.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토머스 제퍼슨이 지금의 상황을 보면 차라리 '신문 없는 정부'를 택할 것 같다. 왜곡을 일삼는 언론은 사회적 독소일 뿐이다. 사주의 탐욕과 무지에 놀아나고, 정당이나 공무원보다 권력의 눈치를 더 보는 언론에서 대화와 소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다.
누구나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여긴다. 그러고 싶어한다. 나중에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러면 백약이 무효이다. 대화와 소통이 없으면 그게 굳어지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대화의 시작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소통에서 비롯된다. 겸허하게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소통은 '소牛와 통하는 것'이 아니다. 소만 바쁘게 생겼다. 엄하게 소에게 떠드는 인간들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소에게 떠들지 말고 자신과 먼저 대화하고 소통하는 성찰이 필요한 세상이다.
★ 본 기고글은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