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우리는 그런 감을 잡았던 정치가들, 또는 정치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컨대 18~19세기의 정치인들 중에 미래가 민주주의의 시대로 전개될 것이라 예감했던 이들이 그런 경우다. 수구파, 왕당파, 보수주의자들이 아무리 막으려고 발버둥쳐도 민주주의의 시대는 오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최소한의 감각 안테나로 감지하고 있었다. 이 최소한의 감각이 역사의 '먼 말발굽 소리'다. 미국 보수주의 정치평론의 맹장이었던 윌리엄 버클리는 그 자신 보수론자였으면서 "보수는 역사를 향해 '게 섰거라!'고 외친다. 그러나 역사는 아랑곳 않고 제 갈 길을 간다"고 말한 적이 있다. 노예제 폐지 불가론자들이 제 아무리 역사를 향해 "서라!"고 외쳤어도 역사는 결국 노예제를 허용하지 않는 쪽으로 나갈 것이라 보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말하자면, 역사의 먼 발굽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는 '대선 삼국지'의 전개를 보고 있다. 3명의 대선 후보들이 캠프를 차리고 진영을 짜서 대권 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국민들의 눈과 귀는 세 후보의 지지율이 어제는 각각 얼마 오르고 오늘은 얼마 내렸나를 쫓아다니며 확인하느라 분주하다. 대단한 구경거리고 볼거리다. 대선 판도에서 누가 결국 승리할 것인가를 예측해보는 일도 요즘 한국 유권자들의 큰 소일거리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유권자들이 대선 삼국지를 구경거리로만 보고 지지율 등락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들이 눈여겨보고 있는 것은 따로 있다.
이번 대선 삼국지에서는 3개 진영이 사용하는 언어가 거의 같고 깃발의 모양새가 거의 동일하다. 누가 누군지 말만 듣고는 판별하기가 지난하다. 각 진영에 펄럭이는 깃발로 정책을 구분하기도 어렵다. 듣기 좋은 말들이 총출동하고 있다. 개혁, 쇄신, 민주화, 행복, 소통, 공감, 화해, 통합, 정의, 공정, 희망, 복지, 일자리… 3개 진영은 이런 동일한 어휘들을 자동 녹음기마냥 반복한다. 한쪽에서 '소통'을 말하면 다른 쪽에서도 메아리처럼 '소통'을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 대선 판도는 진부성을 향한 경쟁 같은 데가 있다. 그 진부성 때문에 언어는 공허해지고 무의미해진다.
유권자는 이런 진부성과 무의미성에 대응할 방법을 갖고 있다. 이것이 대선 삼국지에서 유권자가 눈여겨보고 있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각 진영을 어떻게 구분하고 무엇을 판단의 근거로 삼을 것인가, 이것이 지금 유권자들의 일거리다. 정치민주화건 경제민주화건 (사실 양자는 별개 차원이 아니다) 그걸 말하는 정치세력이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희생한 전력이 있는가, 소통을 말하는 자가 표현의 자유와 인권 신장을 위해 애쓴 일이 있는가, 복지를 말하는 세력이 노인, 약자, 장애인, 최저 수혜자를 위해 발벗고 나선 일이 있는가. 뒤집어 점검해도 된다. 여성, 노동, 노조, 소상공인을 위해 그래도 어떤 정책을 세우고 실행해보려 노력한 세력은 누구인가. 빈부격차를 줄이고 최저임금을 올리고 최저생계비 지원책을 편 세력은? 북방정책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정치세력은 누구? 인권을 박살내고 빈익빈 부익부를 추구한 자는 누구? 쇄신을 말하는 측은 쇄신을 감당할 능력, 경륜, 동지, 정치력을 가지고 있는가? 쇄신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유권자는 '뿌리'를 주시한다. 그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다.
"위대한 정치가는 누구보다도 먼저 역사의 먼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비스마르크의 말이다. 역사의 먼 말발굽 소리라, 좋은 말이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이 어디 먼 곳에, 인간의 손발이 닫지 않는 높은 곳에서 인간 세상을 이윽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아, 이제 나의 진행 방향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며 말발굽 울리고 말춤 추면서 인간세로 들이닥치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비스마르크의 말은 우리가 "감 잡았다"고 말할 때의 그 '감'에 대한 비유적 표현일 수 있다.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위대한' 정치가란 미래의 역사가 어찌어찌 전개될 것 같다는 최소한의 감각은 가진 사람이다, 라는 소리일 것이다.
역사상 우리는 그런 감을 잡았던 정치가들, 또는 정치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컨대 18~19세기의 정치인들 중에 미래가 민주주의의 시대로 전개될 것이라 예감했던 이들이 그런 경우다. 수구파, 왕당파, 보수주의자들이 아무리 막으려고 발버둥쳐도 민주주의의 시대는 오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최소한의 감각 안테나로 감지하고 있었다. 이 최소한의 감각이 역사의 '먼 말발굽 소리'다. 미국 보수주의 정치평론의 맹장이었던 윌리엄 버클리는 그 자신 보수론자였으면서 "보수는 역사를 향해 '게 섰거라!'고 외친다. 그러나 역사는 아랑곳 않고 제 갈 길을 간다"고 말한 적이 있다. 노예제 폐지 불가론자들이 제 아무리 역사를 향해 "서라!"고 외쳤어도 역사는 결국 노예제를 허용하지 않는 쪽으로 나갈 것이라 보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말하자면, 역사의 먼 발굽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는 '대선 삼국지'의 전개를 보고 있다. 3명의 대선 후보들이 캠프를 차리고 진영을 짜서 대권 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국민들의 눈과 귀는 세 후보의 지지율이 어제는 각각 얼마 오르고 오늘은 얼마 내렸나를 쫓아다니며 확인하느라 분주하다. 대단한 구경거리고 볼거리다. 대선 판도에서 누가 결국 승리할 것인가를 예측해보는 일도 요즘 한국 유권자들의 큰 소일거리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유권자들이 대선 삼국지를 구경거리로만 보고 지지율 등락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들이 눈여겨보고 있는 것은 따로 있다.
이번 대선 삼국지에서는 3개 진영이 사용하는 언어가 거의 같고 깃발의 모양새가 거의 동일하다. 누가 누군지 말만 듣고는 판별하기가 지난하다. 각 진영에 펄럭이는 깃발로 정책을 구분하기도 어렵다. 듣기 좋은 말들이 총출동하고 있다. 개혁, 쇄신, 민주화, 행복, 소통, 공감, 화해, 통합, 정의, 공정, 희망, 복지, 일자리… 3개 진영은 이런 동일한 어휘들을 자동 녹음기마냥 반복한다. 한쪽에서 '소통'을 말하면 다른 쪽에서도 메아리처럼 '소통'을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 대선 판도는 진부성을 향한 경쟁 같은 데가 있다. 그 진부성 때문에 언어는 공허해지고 무의미해진다.
유권자는 이런 진부성과 무의미성에 대응할 방법을 갖고 있다. 이것이 대선 삼국지에서 유권자가 눈여겨보고 있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각 진영을 어떻게 구분하고 무엇을 판단의 근거로 삼을 것인가, 이것이 지금 유권자들의 일거리다. 정치민주화건 경제민주화건 (사실 양자는 별개 차원이 아니다) 그걸 말하는 정치세력이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희생한 전력이 있는가, 소통을 말하는 자가 표현의 자유와 인권 신장을 위해 애쓴 일이 있는가, 복지를 말하는 세력이 노인, 약자, 장애인, 최저 수혜자를 위해 발벗고 나선 일이 있는가. 뒤집어 점검해도 된다. 여성, 노동, 노조, 소상공인을 위해 그래도 어떤 정책을 세우고 실행해보려 노력한 세력은 누구인가. 빈부격차를 줄이고 최저임금을 올리고 최저생계비 지원책을 편 세력은? 북방정책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정치세력은 누구? 인권을 박살내고 빈익빈 부익부를 추구한 자는 누구? 쇄신을 말하는 측은 쇄신을 감당할 능력, 경륜, 동지, 정치력을 가지고 있는가? 쇄신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유권자는 '뿌리'를 주시한다. 그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