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화들
오수연(소설가)
제18회 <세계 작가와의 대화>, 이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이번 행사의 취지라고 들었다. 나는 전임 국제위원장으로서 15, 16회 행사의 실무를 맡기도 했고, 토론자나 청중으로서도 여러 번 참가했다. 이번 토론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그동안 내 나름으로 느껴온 바를 소박하게 보고하겠다.
1. 발산과 흡수
한국 작가들끼리도 쉽지 않은 대화를 언어 장벽까지 있는 외국 작가하고 해보려는 이유는, 그들이 한국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언어, 다른 역사, 다른 문화에 속해 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다른 세계, 차차 보다 많은 세계, 가능하다면 우리 바깥의 전 세계를 알고자 한다.
<세계 작가와의 대화>라는 이름은 작가 대 작가로서 대등하게 대화해보겠다는 인상을 풍긴다. 우리는 우리를 알려주고도 싶어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는 못했다. 초청하는 우리 쪽이야 호감이 있으니까 그 외국 작가를 초청 작가로 선정하고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더 많은 정보를 쌓게 되지만, 초청받는 외국 작가는 한국 문학이나 작가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초청 작가가 와서 당신들도 작가라니까 어떤 작품을 썼느냐고 물으면 보여줄 번역본이 없으므로 뜨끔하다.
아무리 소수어인 한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의 운명이라지만, 이 ‘어버버’ 상태가 결코 유쾌하진 않다. 나는 최소한 <한국작가회의>에 대한 소개, <세계 작가와의 대화>의 취지만이라도 영문으로 정리해놓았으면 한다. 우리는 알려주고 싶은 바는커녕 기본적으로 알려줘야 할 바조차 제대로 준비해두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앞으로도 우리가 여건과 역량 상 상대방에게 듣고 또 우리 얘기를 해주는 명실상부한 대화는 무리이고 어느 한 쪽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면, 나는 여전히 전자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한국 문학을 외부에 알리는 외형적 세계화보다는 작가로서 우리 작품의 내용적 세계화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취하자는 것이다.
더구나 몇 년 새 상황이 급변했다.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있다. 작품의 외국어 번역, 국제적인 문학 교류 행사의 개최, 서구의 주도권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던 비서구 문학권들과의 연대 등. 과거에는 <세계 작가와의 대화>가 한국 문학이 외부와 소통하는 많지 않은 창구 중 하나였더라도 이젠 여러모로 치이며,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모였겠다.
교류란 쌍방향인데 어떻게 칼로 자르듯 가르겠느냐만, 한국작가회의가 주최하는 이 행사가 차별성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발산보다는 흡수를 통한 내용의 보강에 집중해야 한다고 나는 본다. 한국 문학의 외형적 세계화야 작가가 아니라도 뜻만 있으면 애써줄 수 있되, 내용적 세계화는 작가만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할 일이다. 전에도 나는 유사한 주제의 다른 자리에서 말한 적 있다.
‘소재나 배경이 이국적이냐 아니냐를 떠나 세계적인 안목과 문제의식을 갖고 작품을 써내는 작가들이 요즘 점점 늘고 있다. 나는 이것만으로 세계 속의 한국 문학의 중요한 한 장면이며, 설사 다른 외국어로 번역되지 않을지라도 이미 한국 문학의 내용적 세계 진출이라고 생각한다.’ (2006년 한국문학번역원 주최 ‘한국 문학 세계화의 현황과 전망’ 토론회)
2. 어떤 예들
그러면 구체적으로 행사를 어떻게 해야 한국 작가들이 작품을 내용적으로 세계화하는 데, 쉽게 말해 세계화를 갖고 좋은 작품 써내는 데 도움이 될까. 어렵다. 나도 잘 모르겠고, 여기저기 구경 갔다 간혹 찜찜했던 예만 들 수 있을 뿐이다.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닐 거라는 뜻이다.
# 문학 행사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행사는 흔히 늘어지고 시간이 촉박하기 마련이다. 외국 작가의 발표문은 자료집에 이미 원문과 우리말 번역문으로 실려 있으나, 외국 작가가 자기 말로 읽고 또 번역자나 통역자가 우리말로 읽기도 한다. 그러자면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간다. 초청 작가가 여럿이라면 원문과 번역문 중 하나만 읽어도 시간은 빠듯하다. 토론이나 질의응답은 급히 해버리는 수밖에 없다. 익히 듣고 하는 그 말, “시간 관계상 질문 하나만 더 받겠습니다.”
나는 작가회의에서 실무를 맡았을 때 발표문 낭독을 생략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해보았다. 30분 간 청중에게 조용히 자료집을 속독할 시간을 준 후, 바로 토론과 질의응답으로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다행히 현명한 다른 실무진들의 충고로 그런 기형적인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같은 글을 초청 작가는 강단에서, 청중은 객석에서 읽고 나니 좋은 시절 다 지나가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남았다.
그런데 왕왕 발표문 낭독만으로도 정해진 시간을 초과하여 토론과 질의응답은 아예 못하는 경우마저 있는 것이다. 도저히 시간을 연장할 수는 없으니, 다른 초청 작가들이 출연하는 다음 순서가 또 있기 때문이다. 발표문 낭독을 들었고 자료집도 받았으므로 내가 얻은 성과야 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청중은 자료집을 얻으러 거기 갔을까? 그럼 와서 자료집만 한 부 갖고, 뭐 이왕 온 김에 외국 작가의 얼굴도 쓱 보고, 가버릴 걸 왜 끝까지 앉아 있었을까. 자료집은 빈 객석을 채우게 하기 위한 미끼?
# 일단, 정해진 주제에 따라 내가 보낸 토론문의 제목 ‘테러와 문학’이 자료집에 실린 영어 번역문에는 ‘Terret and Literature’로 되어 있었다.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terret’이란 단어의 뜻은 ‘고삐를 꿰거나 목줄을 매는 고리’였다. 그럼, 고리와 문학? 하여간 나는 제목부터, 특히 내 글의 제목이 오자가 났다는 사실에 촉발 받아 예민해졌다. 그러고 보니 자료집 곳곳에서 오역들이 눈에 띄었다. 이를테면 이렇게.
‘우리가 9.11에서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성스러운 비폭력 시위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간디는 샤타그라하(Satyagraha)에 항거하기 위해 비폭력 시위를 행했으나 그 어떤 언론도 그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다.’
사티아그라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진리를 붙듦’이라는 뜻으로, 간디가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하면서 천명한 모토이자 비폭력 저항운동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간디가 그것에 항거해? 내가 대충 해석해 보기로 영어 원문은 이랬다.
‘여기(오늘)로부터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 같은 날, 9월 11일에 간디 선생은 저항의 그 훌륭한 비폭력적 도구-사티아그라하-를 발견했으나, 이 사실은 언론에서 거의 다루어지지도 주목받지도 않았다. (And here 100 years back on the same 9/11 Gandhiji discovered that wonderful nonviolent tool of protest -Styagraha-but it was hardly covered or highlighted by the media.)
이런 자료를 통해서 발표하고 알아들으며 토론까지 했던, 거기 있던 모든 이가 좀 안쓰럽지 않은가.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느냐 하면, 행사를 너무 급하게 또 역량에 비해서 너무 크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몇 개국에서 몇 작가가 온다든지 심각한 주제로 몇 개의 세미나를 한다든지 하는, 규모에 치중하는 탓이다. 행사 진행조차 혼란스러워서 자료집 몇 개를 안고 대형 건물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우왕좌왕했던 기억은 정말 괴롭다. 이른바 국제적인 행사에 참가한 한국 작가로서 알량한 자존심이 구겨지는 건 둘째 치고, 일반 청중으로서도 곤욕이었다. 청중은 청중이지 들러리가 아니다.
# 한국 작가도 초청 작가들과 그야말로 대등하게, 동일한 분량과 비중으로 발표문을 쓰고 발표한 경우였다. 우리말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데는 반대방향보다 2배 이상 돈이 들지만, 그래도 예산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해볼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 주요 내용이 ‘단군신화’를 비롯해서 한국 문화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초청받은 외국 작가야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니 가치 있는 시간이었겠다. 국제 행사에서 한국 문화의 정체성, 꼭 강조해둘 바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나머지 절대다수 한국인들에게는 그 시간이 어땠을까.
어쩌면 큰 행사가 개최됐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외국 작가들은 제 나라로 돌아가서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의 씨앗을 뿌리며, 그 씨앗은 장차 발아하여 만개할 수도 있다. 한국 작가는 장차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다소간 들러리 서주어야만 할 의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작가로서 작품을 써내는 것이 우선이고, 그 순서를 뒤집는다면 오히려 책임 방기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는 뭔가 얻어가고 싶다. 동원되어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
3. 그들
앞의 예처럼 발표문만 읽고 끝난다거나 하면, 초청 작가가 몸소 여기까지 온 게 무색해진다. 이메일로 원고만 보내 자료집에 실으라고 해도 됐던 셈이므로. 초청 작가로서는 숙제, 즉 주최 측의 요구 사항을 간단히 완수해 가뿐하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초청까지 받아온 마당에 제 역할이 미진하다는 불안감도 느끼는 듯하다. 대개 표정이 거뜬해 보이지 않는다. 어떤 저항 작가는 자기를 향한 질문이 한 개뿐인데다 그마저 본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것이자 매우 낙담하기도 했다.
작가 초청이 여타 행사와 다른 점은 작가가 그 몸뚱이를 갖고 비행기를 오래 타고 와서,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외국에서 우리한테 글 한 편 준 작가가 아니다. 우리한테 와 있는 외국 작가다. 때로 나는 우리만 믿고 여기까지 와서,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말도 안 통하고, 자기 일정은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의 안내를 따를 수밖에 없는 그들이 포획되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이방인인데다 작가이기까지 한 사람이 우리 한가운데 뛰어들어온, 일종의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까딱하다간 단상에 번듯하게 앉혀 놓고, 청중과 마찬가지로, 들러리 세우거나 심지어 소외시킬 우려까지 있다. 내가 발산보다는 흡수에 중점을 둔다고 해서 우린 입 닫고 그의 얘기를 잠자코 듣자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심도 있는 토론, 활발한 질문, 한국 작가와의 좌담회 등등,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최대한 소통하여 그로부터 최대한 끌어내자는 것이다. 그래야 번잡하게 행사를 준비한 우리에게도, 먼 길 온 그에게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이 일인 작가가 제 작품이나 문화에 대한 관심과 환호 때문에 혹사당하는 기쁨을 마다하겠는가.
언젠가 나는 한 계기로 한국을 방문한 다수의 외국인들을 따라 우리나라의 자랑, 세계적으로도 손꼽힌다는 거대한 공장을 견학했다. 공장 견학 후 일행은 홍보관으로 가서 기업 홍보 영상을 보고 설명을 들었다. 일일 생산량 얼마, 생산 재료인 그 광물의 지구 매장량은 앞으로 150년분 등등. 대개 발전도상국에서 온 견학자들은 경탄한 눈치고 질문도 많이 했다. 홍보관에서 나와 다른 데로 이동하면서 나는 마침 통역자도 있기에 옆에서 걷는 이들에게 감상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두 사람은 웃으며 답했다. “무섭다.” “나도 무섭다.” 한 사람은 베트남 소설가 바오닌, 다른 이는 시인 찜짱이다. 바오닌은 <세계 작가와의 대화>에 다녀간 적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혼자 오더라도 혼자 오지 않는다. 그들은 초청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나라를 직접 여행할지라도 알 수 없을, 그러나 알고 싶어 하고 알아야만 하는 어떤 지점을 끌고서 온다. 우리는 그 지점에 접촉하고 쭉 끌어당겨서 가급적 넓게, 많이, 깊이 얻어내야 한다. <세계 작가와의 대화>를 첫 회부터 꾸준히 참가한 한국 작가가 있다면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아랍에 대한 남다른, 꿈틀거리는 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 작가와의 대화>의 취지이자 결실일 것이다.
4. 만남
팔레스타인의 대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 아마도 2007년 그의 한국 방문은 그의 마지막 해외여행이었을 것이다. 이후에 그는 심장수술을 받으러 미국에 갔지만 살아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진 못했다. 그 얼마 뒤 나는 팔레스타인에 가서 그의 무덤가에 앉아 생각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어, 다르위시가 한국에 왔었어…. 팔레스타인에서 새삼, 거듭 실감하건대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다. 우리는 위대한 시인을 만난 적 있다.
자카리아 무함마드, 아다니아 쉬블리……. 그들에게는 ‘어버버’ 하는 우리가 어떻게 보였을까. 나는 내가 그들을 떠올리면 좋은 글을 써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듯이, 그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가 그들 덕분에 이 삭막한 세계에서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듯이, 그들도 부디 그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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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오수연
1994년 『난쟁이 나라의 국경일』이 현대문학 장편공모에 당선되었고, 1997년 단편집 『빈집』을 출간했다. 1997년부터 2년 동안 인도에 머물렀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먹는 행위를 통해 인간을 성찰한 연작 소설집 『부엌』을 2001년 출간했다. 이중 중편 『땅 위의 영광』으로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3년 3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라크 파견 작가이자 한국이라크반전평화팀 일원으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다녀왔다. 2004년 『아부 알리, 죽지 마-이라크 전쟁의 기록』을 발표했고, 2006년에는 팔레스타인 현대산문선 『팔레스타인의 눈물』을 기획.번역해 펴냈다. 후배작가들이 주는 상금 없는 상 ‘아름다운 작가상’을 받았고, 2007년 현재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