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생태학
손아람 (소설가)
스코틀랜드의 네스 호수에 수룡이 산다는 소문이 있었다. 다국적 탐사대가 음향 탐지 장비를 동원해 여러 차례 호수를 샅샅이 뒤졌다. 끝내 수룡 네시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네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네시는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목격담과 신뢰하기 어려운 흐릿한 윤곽의 사진이 널리 퍼져나갔다. 네시는 부재 증명의 실패로 생명을 얻었다. 네시는 신이 살아남듯이 살아남았다. 부재 증명과 존재 증명에 요구되는 엄격성의 현저한 불균형 위에서.
네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BBC의 의뢰로 구성된 생물학자팀의 연구였다. 그들은 네시를 직접 찾는 대신 네스 호수의 기저 생태계를 조사했다. 호수의 수질을 분석했고, 고립된 수직 생태계의 기초 에너지원인 식물성 플랑크톤의 함유 밀도를 계산했고, 수룡 같은 거대 동물을 부양할 수 있는 먹이사슬을 구성하기에는 네스 호수의 생태열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네시를 최초로 촬영한 목격자가 네시의 사진이 ‘만들어졌음’을 자백하면서 네시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네시는 살아있는 동물이 아니라 만들어진 허상이었다. 네시의 연구자와 탐사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쫓는데 삶을 바친 셈이다.
한국에 문학은 존재하는가? 한국 문학은 작가의 창작과 독자의 독서 사이에서, 건강한 출판 시장과 진실한 수요에 입각한 텍스트 생태계 위에서 살아 있는가? 아니면 찰나의 사진에 흐릿하게 담긴 용 모양 목각인형의 윤곽처럼 드문드문 돌출하는 베스트셀러가 만든 허상인가?
문학이 살아있는지, 이 시대에 문학 텍스트에 대한 진실한 수요가 존재하는지 확인하려면 문학의 기초 생태계를 들여다봐야 한다. 문학의 기초 생태계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해리포터’라고 생각한다. 무협지이며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펄프픽션으로 양판되는 연애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독자와 독서의 성장과정에서 문학 텍스트는 자연스레 수직적 먹이사슬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무협지의 독자는 감식안의 성숙을 거쳐 고문학(高文學) 독자로 편입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문학의 생태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고문학은 다양한 층위의 독자가 유입돼야 생존할 수 있는 포식자적 지위를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칼 같은 문장과 배타적인 세계관, 장인 같은 고집을 지닌 김훈의 굉장한 소설 ‘칼의 노래’가 독주하는 동안, 익명의 작가들이 자존심 따위 다 내려놓고 오직 읽히려고 쓴 싸구려 연애소설이 한 쇄를 완판하지 못하는 출판 시장은 그런 곳이 아닐 것이다. 나는 김훈의 고고한 세계관이 나 홀로 백만 가까운 독자와 소통했던 지난 일을 ‘조회수 0에 도전하는 게시물’의 조회수가 폭발하는 것과 같은 진기한 현상으로 본다. 건강하게 살아있는 시장 생태계라면 밀리언셀러는 차라리 인터넷 소설에 가까운 형태인 게 자연스럽다. 문학이 역피라미드 형태로 소비되는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이 과연 ‘문학이 담은 것’인지, 아니면 ‘문학을 담은 것’인지 우리는 의심해보아야 한다.
혹은 이 모든 일이 한국에만 문학이 온전하고 바람직하게 정착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걸까? 소년기에 눈높이 근처의 양판소설조차 건드려보지 않는 사람이 교육된 고전읽기를 거쳐 열렬한 순문학의 독자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문학은 이미 문화가 아니라 종교다. 그들에게 텍스트는 경전이며 독서는 예배이다. 가장 널리 팔리고 가장 읽히지 않는 책이라는 의미에서라면 한국 문학은 진실로 경전이 되었다.
해리포터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계 문학의 세태는 문학의 타락이 아니라 건강의 증거다. 문학 텍스트에 대한 실질적인 수요가 기저부터 안정되어있을 때 해리포터 같은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 이는 텍스트가 독자에게 선생이 아닌 친구로서 소통을 시작하고 있음을, 교양적 의무가 아니라 읽기 욕구에 바탕한 필요에 의해 소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 출간된 대부분의 문학 한 권이 한 쇄를 채우지 못하는 한국의 문학 시장은 이미 국문과와 문예창작과 학생, 동업관계의 작가와 시장동향을 살피는 출판업자, 쓸모 있는 원작을 탐색하는 서사예술 종사자들의 돌려읽기로 충당되는 소꿉놀이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고리 바깥으로 나가 글을 쓰는 작가들은 종종 문학의 아이콘이 아니라 문화의 아이콘이다. 이때 독자들이 선호하고 소비하는 것은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취향과 지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주는 합의된 기호다. 그 사이 어디에도 문학의 영토는 없다.
순문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획일적인 시장 점령은 문학 읽기가 스스로의 필요가 아니라 외적인 압력에 떠밀린 문화적 요식행위로 전락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P2P에서 무엇이 돌아다니는지 살펴보라. 관객 만 명을 못 채운 영화와 천 권이 안 팔린 만화들이 거기에서 재빠르게 공유된다. 컨텐츠에 대한 욕구의 절실함은 불법과 처벌의 위협 따위를 가볍게 넘어선다. 그런데 백만 권이 팔린 문학의 스캔본은 왜 찾아볼 수 없는가? 사람들이 종이책의 질감을 포기하지 못해서? 문학 독자들의 열렬한 애서심 덕분에? 차라리 사람들이 책상 위에 올려두거나 가방 바깥으로 살짝 삐져나오게 보일 ‘책’을 원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문학을 텍스트 그 자체만으로는 원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사회적 기호로 작용하지 못하는 무형의 텍스트는 사용 가치가 전혀 없으므로.
비슷한 관점에서, 인터넷에는 왜 자생적인 문학 커뮤니티 사이트를 찾아보기가 그토록 어려운가? 왜 문학 읽기 모임은 뜨개질 동호회만도 못한 규모인가? 백만 권의 책을 집어 드는 독자들은 어디서 무얼 하는 중인가? 대체 이 문화의 기형성은 어디서 왜 시작되었는가?
한국 문학에 만연한 과도한 엄숙주의의 부작용이다.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다. 문학처럼 단속이 심한 교육이 이뤄지는 분야는 찾기 어렵다. 유소년기부터 아이들은 미숙하거나 요사스러운 글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된다. 문학은 교복처럼 획일적으로 강요된다. 청소년들은 성장기에 문학적 감식안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이끌어줄 계단을 밟아보지 못한다. 동화와 고전 사이 중간 단계 독서는 음지에서 이뤄지다 사그라든다. 마치 학창시절 몇 년 놀다 공부 좀 해보려 책상 앞에 앉으니, 교과서에 구구단은 사라지고 미적분 방정식의 낯선 기호들만이 꿈틀거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청소년들은 수학을 포기하듯이 문학을 포기한다. 그 다음으로 문학은 친숙한 것 그래서 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심오한 것 하지만 읽어야 하는 것이 된다. 이 시대의 독자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좋은 읽기가 아니라 즐거운 읽기다. literature의 역어로 ‘문학’을 택한 것이 적절했는지부터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music은 ‘음학’이 되지 않았다.
우리 작가들의 글쓰기는 엄숙의 교조에 사로잡힌 읽기 교육의 최종적인 귀결이다. 모든 작가는 한때 고된 문학 독서의 시험을 이겨낸 충성스러운 독서가이기 때문이다. 제도화된 문학 유산을 상속하여 출발한 작가들의 언어는 세련미 넘치고 정제된 반면, 개성이 위축되어 있고 사유와 통찰의 폭이 대단히 좁다. 이는 한국 작가들의 글쓰기가 편향되었다기보다 유희와 상상력, 그리고 거시적 통찰을 담당하는 다양성의 축들이 이미 질식사해버렸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통제를 거부하는 자유로운 성격과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한동안 문학은 아무런 매력적인 유인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문학은 암담하게 정체되어 있고 유전자를 판박이처럼 공유한 글들로 메워진 숨 막히게 답답한 풍경으로 보였을 터다. 한국 문학은 종종 창작보다는 서예에 가까워 보인다. 문학이 좋은 작가를 다 놓쳐왔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내 세대의 문단에는 드디어 글쓰기를 기예로 사사받은 문장 기술자들만이 남았다. 철학자와 이야기 공학자는 이곳에 없다. 그들은 문학을 떠나 어딘가로 갔다.
문학의 이름 아래 있어야 할 자질구레한 것들이 문학의 변방으로 추방되면서, 문학의 과수원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잡초를 걷어내려고 주변을 빙 둘러 살포한 농약이 과수원 전체를 불모지로 만들었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흐르는 게 아니라 낮은 곳에서 자란다. 모든 문화는 기저 생태계가 활발하게 움직일 때, 그러니까 낮은 곳이 번성할 때 역설적으로 높은 곳의 생산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2000년대 한국 영화는 수많은 팝콘필름과 소수의 웰메이드 통속 영화로 구축된 생태 피라미드 위에서 관객들의 분극화된 취향을 꽃피웠다. 다양성에 기여하고 깊은 통찰을 선보이는 연출가들이 그나마 먹고 살만해진 건 ‘조폭 마누라’나 ‘가문의 영광’ 같은 통속영화가 양적 저변과 질적 지평을 확대시킨 덕이다. 건강하게 작동하는 기초 생태층에서 다음 수준의 작품을 원하는 관객들이 끊임없이 삼투되지 않았다면 많은 연출가들이 여전히 고독을 헤매거나 일찌감치 다른 길을 찾았을 것이다. 한국 영화가 처할 뻔한, 그리고 한국 문학이 처한 현실이다.
나는 평균적으로 한국 문학이 해외 문학보다 높은 수준의 작가층을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문제는 그 두께다. 예를 들어 베스트셀러로서 ‘엄마를 부탁해’와 ‘해리 포터’를 비교하는 것은 대표성이 없다. 해리포터는 영미 문학의 진입관문이다. 양적 최대한인 동시에 질적 최소한이며 다양성의 시작이다. 그러면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부탁해는 한국 문학의 최대한이자 표준이자 평균이자 그냥 그 시기 한국 문학의 거의 모든 것에 가까웠다. 한국 문학은 유전자가 서너 개 뿐인 생태 환경 속에 놓여 있다. 생물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멸종의 위기라고 부른다.
누구나 위기는 인식하고 있다. 제도권 문단과 출판사에서는 젊고 새로우며 가끔은 같잖은 것마저 수용해보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등단 문학상의 눈높이를 파격적으로 낮추는 한편 노골적으로 대중 친화적인 문학 공모전을 신설한다. 젊은 작가들의 글쓰기 방향을 유도하는 위로부터의 변화가 통할 거라 믿는 모양이다. 줄기에 비료를 발라 꽃을 피우려는 격이다. 그러나 비료는 땅에 뿌리는 것이 아닌가. 제도권 문학 출판사들의 양보는 딱 그 정도로 그친다. 여전히 출판자원의 대부분을 고고한 문학에 집중하고 순혈주의자처럼 뿌리 깊은 정체성을 지키는 데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대형 문학 출판사들이 계열화 전략으로 분리한 출판 계열사에서 문학적 다양성을 슬쩍 실험하고 처분하는 게 그 예다.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겪었을 경험을 나도 겪었다. 힙합 음악에 빠진 20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그린 내 첫 장편소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는 수많은 문학출판사들로부터 “흥미롭지만 우리 출판사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반려당한 끝에 비문학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장편소설이 흥미로운데도 불구하고 문학 출판사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흥미롭지만 여전히 문학은 아니라는 뜻인가? 반면 용산참사의 법률적 쟁점을 다룬 ‘소수의견’이 출간된 후로는 그들이 먼저 구체적인 제안을 쏟아냈다. 그들은 내가 금융자본주의, 천안함, 대통령에 대해 쓰길 원했다. 나는 내가 제시받은 것을 반려를 면할 조건으로 이해했다. 등단문학상의 심사기준처럼 이것은 작가가 훈육되는 절차의 일부이다. 그런 절차는 흥미롭지만 내 성격과 맞지 않는 것이어서 전부 거절해야만 했다.
출판 시장의 움직임에 대척하는 작가들의 자발적인 논의 역시 공급자 논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 대중적인 문학이냐, 더 참여적인 문학이냐 하는 문제는 쟁점으로 성립할 수도 없는 이상한 의제다. 더 대중적이고, 더 참여적인 문학을 선택적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하나? 태도 역시 재능이다. 작가는 평생 쓰던 대로 쓸 뿐이다. 문학을 바꾸는 건 문학에 이미 몸담은 자들의 몫이 아니라 문학이 벌써 배제한 자들의 몫이어야 했다. 한국 문학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문학이 대중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비극적이지만 이미 대중이 문학을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와 한국의 문학 환경 차이를 ‘쓰기’의 보편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현재 한국 문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보편성의 부족이 아니라 되려 보편성의 동어반복, 보편성의 근친상간적 재생산이다. 그 속을 들여다보라. 오직 보편적인 사건만이 일어난다. 우리 눈앞과 상상력 너머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특별하고 중요한 일들은 다 어디 있는가? 젊음을 상실하고, 시대를 상실하고, 아버지를 상실하고, 어머니를 상실하고, 아들과 딸을 상실하고, 혹은 취직에 실패해 무기력하고, 연애에 실패해 무기력하고, 그냥 원래 무기력한 인물들. 인간의 문제가 그보다 보편적일 수 있는가? 나는 그게 시대 정서의 투영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거리를 메웠던 촛불 사이를 단 한 차례만 거닐었어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전례가 없는 역동성과 긍정적 에너지, 그리고 상상력으로 충만한 시대를 살고 있다. 시대를 고민하고 미래를 꿈꾸는 힘이 분권화되었다고 그게 상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 문학에 투영된 것은 시대의 무기력이 아니라 문학의 무기력이다. 문학을 멀리 내팽개치고 스스로 전진하는 세상과 세상을 바로잡을 수훈을 남겨야 한다는 선각자적 강박 사이에서 자신감을 잃고 좌표를 잃은 작가들의 혼탁한 시야다. 그러므로 이 시대 한국 문학에 나타나는 것은 단지 보편성이 아니라 보편성으로의 퇴행이다.
보편성 논리의 허구성은 정작 ‘시장의 보편성’을 장악한 세계 문학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마법 학교를 졸업한 마법사(해리포터), 숨겨진 예수의 후손을 추적하는 모험(다빈치 코드), 문명의 몰락 이후 남은 국도를 따라 걷는 생존자들(로드), 꿈을 좇아 세계를 떠도는 방랑자(연금술사), 밀교와 초존재론적인 세계의 순환고리(1Q84), 눈을 멀게 하는 전염병의 창궐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아우성(눈먼 자들의 도시), 다양한 나라에서 쓰인 다양한 층위의 문학을 아우르는 공통어는 결코 보편성이 될 수 없다. 세계는 이미 문화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논하는 문명의 단계를 넘어섰다. 작가의 통찰을 채색하는 개성과 다양성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세계적 보편성이다.
생태 환경의 절멸을 외면한 채 ‘바람직한 한국 문학’과 ‘세계를 지향하는 한국 문학’을 논하는 말은 공허하다. 그 말은 끊임없이 반복될 터인데 아무리 반복해도 약간의 변화조차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는 문학이 지나온 전성기의 향수에 기대어 출발할 수밖에 없다. 세계문학이 자본주의의 물결에 휘둘리는 동안 한국문학만이 내적 완전성을 지켜냈다는 식으로. 그건 낭만이 아니라 오만이다. 위기 책임을 바깥 현실에 전가하는 변명이다. 자본주의가 문학을 덮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이 인간의 유희적 관심을 독차지하던 영원처럼 긴 한 때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극장도 게임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문명이 문자 그대로 글 위에 세워진 찬란한 영화이던 시절 말이다. 문학이 왕과 같은 일방적인 권위로 인간의 정신을 다스리려 할 때 세상은 별 다른 불만 없이 책장을 넘겼다. 마땅히 다른 할 일이 없었기에. 그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한국 문학은 이제 세상의 넓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정신에 행사하던 독점적인 권력을 기꺼이 세상의 다른 것과 나눌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한다. 기성 작가들이 평생 쌓아온 눈높이와 세계관에 어울리지도 않는 시장에 굽신대는 통속화된 문법을 몸에 익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곳에 필요한 건 새로운 세대의 작가와 독자가 어떤 글이든 쓰고 읽을 수 있게 관용하는 건강하고 다양성 있는 문학 생태계다. 세계에 내놓을 한국 문학에 대한 의미 있는 논의는 그로부터 한참 뒤에나 이뤄질 것이라 전망한다. 올챙이와 소금쟁이를 부양할 풍요도 못 갖춘 개천 생태계에서 육식 괴룡의 승천을 염원하는 건 문인보다는 무당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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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손아람
1980년에 태어나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그룹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저서로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소수의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