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이라는 환상을 가로질러
전성욱 (문학평론가, 계간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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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동아시아는 공동문어인 한자와 공동의 종교인 유교를 공유하면서 책봉체제로 맺어진 하나의 문명권으로 조화롭게 공존했다. 세계사의 차원에서 중세는 그렇게 거시적인 문명권의 단위로 분할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6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이른바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이행을 통해 공동의 문명권을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로 대체하면서 중세의 해체를 촉발했다. 제국주의의 확대와 함께 민족주의가 고양되면서 조화 속에서 공존하던 문명권은 드디어 근대에 이르러 각각의 국민국가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세계경제의 큰 체제 속에서 국가들은 더 큰 단위의 지역으로 이합집산하면서 생존과 번영을 모색하고 있다.
‘세계문학’이란 역설적이게도 근대적 민족주의가 고조되던 시기에 고안된 개념이다. 저 유명한 세계문학(Weltliteratur)에 대한 괴테의 언명은 민족이라는 자아에 눈뜨는 독일 낭만주의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먼 곳의 타자를 자아의 세계로 수렴하는 낭만주의적 동경은 타자의 아득함이 촉발시킨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의 민족이 타자로서의 다른 민족들을 의식할 때 세계는 비로소 유기적인 전체로 감지된다. 그러니까 세계문학이란 민족이라는 자아의 나르시시즘적인 열망이 만들어낸 유기체적인 동일성의 관념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자아화하는 서정적 감수성이야말로 세계문학의 본질에 육박한다.
세계문학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물적 토대는 자본주의다. 이윤의 극대화로 충족되는 자아의 이기적 행복은 세계를 자아화하는 서정적 충동처럼 폭력적으로 타자를 포섭한다. 자본주의의 확대 속에서 욕구들은 이제 더 이상 일국적인 차원의 규모로는 충족될 수 없을 만큼 탐욕스럽다. “국산품에 의해 충족되었던 낡은 욕구들 대신에 새로운 욕구들이 들어서는데, 이 새로운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먼 나라와 토양의 생산물들이 필요하다.”맑스·엥겔스, 『공산주의 선언』, 박종철출판사, 1998 마르크스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국민적 일면성과 제한성은 더욱 더 불가능하게 되고, 많은 국민적, 지방적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문학이 형성된다”위의 책고 했던 것이다.
세계문학은 나의 이기적 욕구를 위해서, 그러니까 자아의 낭만적 만족을 위하여 매개된 일종의 환상이다. 17세기 유럽의 국가 중에서 세계체제의 주변부로 굴욕을 감수해야만 했던 독일이, 그 원망(怨望)을 세계의 창조적 개변에 대한 열망으로 역전시킨 사정은, 한국의 민족문학론을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결국 “민족의 존엄성과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절박한 위기에 직면”백낙청, 「민족문학의 현단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 창작과비평사, 1985하여 그 위기의 초극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문학론은 민족이라는 자아의 방어기제로써 세계문학론을 호출하는 것이다. 민족의 문학은 그 외로운 고립을 넘어 세계문학이라는 유기적인 전체 속에서 비로소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나의 고독이 심각할수록 타자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것처럼, 분단의 상황 하에서 세계체제의 주변부로 고독한 한국은 언제나 ‘세계’라는 외부, 그 대타자의 인정에 애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벨문학상에 대한 전 국민적 열망은 바로 그 인정욕망의 한 유력한 증상이다. 미국의 시장에서 선전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언론과 대중들의 열광이란 역시 그 열악한 우리들의 비루한 자화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른바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우리들의 염원은 K-POP의 유럽 진출에 호들갑 떠는 언론의 노골적인 민족주의만큼이나 민망한 것이다. 이처럼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란 거울 속의 너와 나처럼 서로 마주하고 있는 하나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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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국문학, 그러니까 한국문학은 오랫동안 민족문학의 일국적 범주 안에 구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근대문학은 그 시작부터가 제국주의의 공세에 민족주의로 응대하는 애국계몽의 서사와 시가들로 이루어졌다. 거세게 밀려들어 오는 근대적 서구 문명에 대해 소년의 활달한 기상을 노래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나, 청일전쟁이라는 국제전의 와중에 일본과 미국으로 이산하는 한 가족의 사연을 담은 이인직의 「혈의누」(1906)에서 보듯 한국의 근대문학은 그 시작부터가 초국적(트랜스내셔널)이다. 나아가 코민테른의 직간접적인 영향 속에서 전개된 KAPF의 조직적인 활동에서부터, 오키나와, 만주, 타이완과 함께 일제의 식민지배와 총력전체제라는 배경에서 표출된 15년 전쟁기의 문학은 그 자체로 대단히 역동적인 국제정세의 결과물들이다. 그 초국성은 역시 세계대전의 종전과 냉전체제의 성립이라는 국제적인 지정학적 맥락 속에서 발단한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산업화 과정에서 나온 한국 문학사의 흐름 자체를 규정한다. 그럼에도 한국의 문학사는 언제나 일국사(National History)로 기술되어 왔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분단체제의 문학사는 일국사도 아닌 반국사였다. 이념으로서의 민족주의는 초국적인 창작에서의 성과들을 그렇게 봉합해 버렸다. 한국의 문학연구와 문학사 기술을 이처럼 옹졸한 배타주의로 일관하게 한 것은 제국주의와 냉전체제라는 강요된 외부의 정치다.
연구와 비평에 있어서의 민족주의는 외부로부터 강요된 정치에 대한 대항적 이념이었다. 공격적인 타자의 폭력은 자아를 배타적인 주체로 고착시킨다. 식민지배와 냉전체제는 민족주의라는 방어기제를 촉진시킨 폭력적인 타자다. ‘민족의 존엄성과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절박한 위기’ 속에서 민족이라는 에고는 그 위협의 강도만큼 타자에 대해 배타적이 된다. 타자의 폭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주체는 분열하거나 집착하게 되는데, 민족문학론은 결국 에고에 집착하는 편집증적 주체의 한 증상이다. 자국의 문학을 정전화하면서 민족문학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그 과정이란 타자의 위협 속에서 자기를 고양하는 자족적인 위안의 방략인 것이다.
민족문학론은 제3세계문학론으로 확대되고 드디어 세계문학이라는 환상으로 비약한다. 그러니까 세계문학이라는 이념은 민족문학론의 확장판이다. 타자의 위협이 자아를 자폐적인 탐닉 속에서 강고하게 만들 때, 그 주체는 타자를 자아로 동일화해 버릴 수 있다. 민족문학론이란 타자를 자아화하는 그 동일성의 주체다. 세계문학을 민족문학론의 동일성으로 환원함으로써 결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은 하나가 된다. 그러나 타자를 자아화할 때 그 타자의 마성은 그대로 자아를 감염시킨다. 제국주의와 냉전체제라는 타자는 세계문학이라는 환상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그 환상이란 기실 허상이며, 제국주의와 냉전체제의 마성은 민족문학론의 정치적 무의식으로 깊이 침잠한다. 그러므로 제국주의와 냉전체제라는 증상이 잠복해 있는 민족문학론은 우발적인 사건들 속에서 언제든 세계문학으로 발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낙청을 위시한 이른바 창비 진영의 민족문학론은 그것이 어떤 진보적 관념에 근거한 이념적인 운동의 담론이었음에도 문단 정치의 장 안에서 오래 그 힘을 떨쳤다. 그것은 내부 정치의 반동과 외부의 침략에 시달려온 원한의 역사를 상정하는 한민족이라는 취약한 주체의 집단적인 희생자의식(victimhood nationalism)으로 뒷받침된 것이었다. ‘민족의 존엄성과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절박한 위기’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과장된 전제임에는 틀림없다. 적대를 창안함으로써 연대를 요구하는 담론의 역학은 민족문학론의 근본 바탕이다. 민족문학론은 제3세계문학론 혹은 동아시아론을 매개로 세계문학이라는 거대서사로 간단히 도약하는데, 그 모든 담론은 결국 상처받은 민족의 구원이라는 목적론적 서사로 귀결된다. 분단문학을 넘어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포함하는 해원상생의 한민족문학이란 그 담론 기획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복잡성을 사상하고 현실의 균열을 봉합하는 허위적인 구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적분적인 논리로 자아를 확대해온 민족문학론은 ‘분단체제론’과 ‘이중과제론’을 보태 담론의 구조적 취약성을 보완하려 한다. 하지만 ‘근대’를 포기하지 않는 그 편집증적 자의식은 분명 창비적 담론의 몰락을 재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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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라는 장기지속의 세계체제는 커다란 전회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1968년의 세계혁명은 세계체제의 견고한 구조에 균열을 일으킴으로써 자유주의가 누려왔던 우월성의 시간을 끝장냈으며, 마침내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증가하는 생산비용과는 반대로 이윤율은 자꾸 하락했고, 드디어 자본가들은 생산의 현장을 떠나 금융투기의 위험한 영역에서 이윤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금융자본의 유동성은 모든 견고한 것들을 녹여버리는 자본의 속성 그대로 경계를 넘고 간극을 좁히며(Cross the Border-Close the Gap) 시공의 물리적 한계 너머로 우리를 쫓아온다. 일국주의는 초국주의로, 민족주의는 탈민족주의로 지양되었고, 이제 민족문학론을 포함한 일체의 근대문학은 종언의 추문 속에서 위태롭다.
냉전은 적과 아의 분별로 우리들의 삶을 안정적인 변증법의 구도(원근법적 구도) 속에서 조망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동구권의 몰락으로 냉전이 해소되자 세계를 조망하던 변증법의 구도도 끝장이 났다. 역사적 전망 상실의 그 상황을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속물과 동물의 두 가지 삶의 방식으로 풀이했다. 본질적 가치와는 무관한 형식적인 것으로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는 미국의 스노비즘과 타인의 인정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오로지 자기중심의 자폐적 세계로 치닫는 일본의 동물화(리스먼의 용어로는 관계지향형과 내부지향형).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자본주의의 흐름은 바로 저 양극단의 감수성으로 분열했던 것이다. 속물과 동물이라는 미분적인 주체들이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단절과 파국 없는 역사의 진보를 향해 적분적으로 진군하는 주체란 무엇인가? 현실이라는 견고한 대상이 추상화되고 진보라는 원근법의 구도가 사라진 시대에 이념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세계체제의 거대한 전환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에 의해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전회로 설명되기도 했다. 『제국』이 세계의 구조에 대한 탐구라면 『다중』은 제국 안에서 제국을 넘어서는 저항적 주체의 해명이다. 이들의 논의는 모든 것을 분열시키는 제국의 암울한 현실에 낙담하지 않는다. 네트워크화된 어떤 흐름의 떼 지성으로 존재하는 다중의 활력은 구조의 파열에 주체의 분열로 맞서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제국에 응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낙관론은 파열하는 구조의 폭력성을 과소평가하고 분열하는 주체의 가능성을 과대평가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들의 낙관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현실은 그런 근거를 초과하는 비참함으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전회’와 같은 세계체제의 지각변동이 가라타니 고진에게는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의 중심이동으로 독해 된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가라타니가 구상하는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세계공화국’이나 앞서 본 네그리의 낙관론은 역설적으로 지금의 이 상황이 얼마나 불확실한 혼돈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분명하게 예증한다. 다시 말해 거시적인 낙관의 전망을 필요로 할 만큼 현실은 비관적이다. 세계는 점점 더 미시적으로 파편화되어 그 총체성의 전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이제 전형성과 총체성으로 현실의 본질을 반영할 수 있다는 리얼리즘의 재현론은 철모르는 신념이 되고 말았다. 근대적 체제에서 탈근대적 체제로의 이행은,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의 발악이 투기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들의 삶을 예측 불가능한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혼란에 대하여 문학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세계문학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물음에 답할 수 있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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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체제의 거대한 전환은 근대적인 사유를 불모로 만든다. 문학 역시 이제는 새로운 감수성으로 변이해야 한다. 변태하지 못하는 문학은 진부한 기성의 문학으로 취급될 것이다. 괴테가 제안하고 마르크스가 예감했던 세계문학의 이상이란 근대의 기획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민족이라는 자아에의 충실함으로부터 비롯된 민족문학의 쌍생아였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의 세계문학은 근대의 틀 안에 갇힌 민족문학의 현존을 대리보충(supplément)하는 이념적 대상물이었던 것이다.
세계체제의 전환 속에서 탈구된 현실은 추상적인 형상으로 기괴하게 드러난다. 구시대의 문학이 구체적인 현실을 추상적인 이념으로 박제하려고 했다면, 이제 전환기의 문학은 추상적인 현실을 구체성의 감각으로 포착하려 할 것이다. 그것은 분열하는 차이들의 발작으로 표현될 것이며, 낯선 감수성으로 평온한 일상을 놀라운 충격으로 일깨울 것이다. 지역의 경계와 시간의 물리성을 초월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언어의 한계 너머로 비약할 수도 있다. 이렇게 문학은 세계 그 자체가 될 것이고, 이념으로서의 문학은 몰락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념 혹은 운동으로서의 세계문학이라는 구상은 망상에 가깝다.
세계체제의 전환이란 자본주의가 세계경제의 위기를 방어하기 위해 체제의 변혁을 시도하는 과정이다. 이윤율의 저하를 이윤의 확대로 역전시키려는 술수가 세계를 파국적인 분열로 몰아간다. 이른바 미래파 혹은 뉴웨이브라 불리는 새로운 시의 감성은 세계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전통 서정의 편집증적 집착(paranoia)에 반대해 주체와 세계 그리고 언어를 그 근본부터 해체해 버리는 분열증적 차이화(schizophrenia)의 충동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그 분열의 형상화는 파열하는 세계에 대한 수용인가 저항인가, 아니면 수용이면서 저항인가? 이념으로서의 세계문학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가 되어버린 문학이란 세계의 분열을 조롱하면서 유희하는 즐거운 언어들의 축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문학전집의 재구성을 통한 정전의 해체나 아시아 및 아프리카 각국의 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한 연대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자아 확대의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저항과 비유럽 문학과의 연대는 정의로운 신념에서 출발한 기획임에는 틀림없겠지만, 결국 민족의 취약성, 다시 말해 세계의 문학으로 인정받지 못한 민족문학의 열등감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유럽의 인정을 갈망했던 일본의 문학을 이식함으로써 성립한 한국의 근대문학이 가진 식민주의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문학이 출판 시장에서 도서 구매자들의 다양한 취미를 고려한 이국적인 것들의 상품화로 소비되는 것도, 문학 본래의 지역적 차이들이 생성하는 감각의 다양성을 시장의 이해관계라는 동일성으로 환수해 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니, 문제는 애초부터 지역성을 추상적으로 보편화해버린 ‘일반문학’의 등장이며, 이런 작품들이 세계의 도서 시장에서 선전하는 현상이다. 지역적 가치를 사상한 몰지역적 일반문학의 세계화는 국경을 넘어 소비되는 문학의 상품화를 단적으로 예증하는 것이다.
이념도 아니고 상품도 아닌 세계문학이란, 지극히 사적인 구체성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 보편성으로의 아찔한 도약으로 표현되는 모든 문학을 일컫는 이름이 아닐까. 파스칼 카자노바가 말했던 ‘문학의 그리니치 표준시’는 많은 오해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의 문학들이 갈등과 교섭, 경합과 화해의 과정을 거쳐 도달하는 유동의 보편성을 일컫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서구적 보편성으로 구축된 현대성(modernity)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라면, 프랑스의 근대문학을 표준시로 설정한 카자노바의 세계문학론은 유럽중심주의로 쉽게 타매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근대의 세계문학에 대한 논의로 한정된 것이라면 근대 이후의 문학에 있어 그 표준시는 분명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문학의 보편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경합 속에서 끝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문학이란 과정과 생성으로서의 보편성을 담지한 모든 훌륭한 문학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런 보편성의 문학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할 후기 근대의 대중들은 속물과 동물로 난무하고, 불확실성의 투기장으로 변해가는 세계는 확고한 신념을 조롱하고 구체적인 것을 추상화시키며 유기적인 전체상을 파열한다. 이렇게 세계체제의 전환기에 문학은, 더 이상 이전의 문학적 관습과 규준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연명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폐적인 사유 속에서 펼쳐지는 지극히 폐쇄적인 상상력의 유희를 찬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처방이 아니라 증상이고, 탈주하는 생성의 문학이 아니라 도피하는 은둔의 자학이다. 그렇다고 파열된 것을 이어붙이고 도주하는 것을 붙잡아 세우는 것이 처방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가능한 것이 없는 불가능성의 상황 속에서 문학으로 가능한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상품이 예술로 명품이 명작으로 둔갑하는 시대에 문학이 그 옛날의 명성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는 상황이 열악하다. 예술의 소외에 저항하면서 삶과 예술의 통일을 모색했던 플럭서스(Fluxus)처럼 예술적 아방가르드는 언제나 예술 그 자체의 소외에 반대하는 창조적 활력을 표출했다. 열악한 처지에 놓인 문학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삶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문학 자체의 자기 연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이 이념이 되고 아니면 오락이 되는 지금의 이 곤혹스런 상황에서 벗어나 유동하는 보편성을 표현할 수 있는 도주의 길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지금 당장 가능한 모색의 지점이다. 물론 그것은 어렵다. 아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할 수 없어도 해야만 하는 것을 기꺼이 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할 일이 아닌가. 대책 없고 할 말 없는 무책임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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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전성욱
문학평론가. 1977년 경남 합천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부산에서 살고 있다.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7년 봄 계간 『오늘의문예비평』을 통해 비평가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은 몇 개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바로 그 시간』, 『지역이라는 아포리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