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이 나선 길이었다. 순전히 값이 싸다는 이유로 일본항공 편을 택했다.
역시 있었다. 김포공항 2층 구석 만물매장에서는 필름을 팔고 있었다. 디지털 카메라 지배 시대에 필름 카메라는 왠지 낯설어 보이지만 난 똑딱이가 좋다. 앵글 속에서 몇 차례 각도를 바꾸고 호흡을 맞추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찍는 한 컷의 맛은 남다르다. 사진이 인화되어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어차피 사진에 맺힌 상은 피사체와 찍는 자 교감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저만치 흑백 톤의 서울이 있다. 그나마 산들이 드문드문 있기에 공간의 칙칙함이 덜하다. 드문드문 박힌 구름도 악센트 역할을 한다.
한 시간쯤 날았을까, 창밖으로 일본 해안이 눈에 들어온다. 시원해 보인다. 가끔 보이는 선박들도. 아마 비일상의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20년 직장 생활에 일주일 휴가를 내서 별 계획 없이 떠나기는 처음이니까.
입국심사대는 세계 어딜 가나 비슷하다. 내국인과 외국인의 입구 비율은 7 대 3이다. 내국인 입구는 가뭄에 콩 나듯 사람들이 들어서고 외국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서 있다. 그래도 동양인, 한국인은 좀 낫다. 아랍계이거나 아이 두셋 거느린 여성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기 일쑤다. 그날도 그랬다. 사연은 모르겠으나 인도계로 보이는 네 사내가 심사대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공항 직원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일본 관서지방 최대 규모의 간사이공항은 그 규모와 달리 소란스럽지 않다. 일단 입국을 하면 일본의 ‘친절’을 겪을 수 있다. 공항버스 화물칸에 짐을 실어주는 아저씨들 하며 티켓 자판기 앞에서 티케팅을 도와주는 여직원 하며 모두 극도로 친절하다. 아저씨라고 해도 실은 60대 분들이다. 며칠 뒤 교토의 어느 샛길에서 마주친 전신회사 직원들도 안전모 밑의 얼굴들은 하나같이 60을 훨씬 넘긴 모습이었다. 현장에서 뛰는 60대 분들이 생각보다 자주 눈에 띄었다.
어둑해질 무렵 현지에 사는 사람을 통해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진자(神社)가 보였다. 우리로 치면 예전에 마을마다 있었던 성황당(城隍堂)이라고나 할까. 일종의 마을신을 모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어딜 가나 진자가 눈에 띈다.
다음 날 아라시야마(嵐山)로 가는 기차를 탔다. 눈앞으로 건물들이 휙휙 다가온다. 일본의 기차들은 대개 운전석과 객차 사이에 투명한 유리문이 놓여 있다. 기차 맨 앞 차량에 타고 앞을 바라보면 차장의 시선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라시야마는 사방 몇 킬로미터 내에 일본의 유명 고찰 십여 개가 흩어져 있는 곳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이나,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일본의 시코쿠 길이 일종의 순례길이라면 아라시야마 길은 고찰 탐방 둘레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에서 나오니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우리 일행들은 그냥 걷기로 했다. 여름엔 뱃놀이도 하고 가마우지를 이용해 물고기잡이를 한다는 강을 건너니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념품 가게들이 길 양쪽에서 늘어서 있다. 대나무 숲이 유명하다 해서 죽세공품 가게에서 소품을 몇 개 샀다.
처음 들른 곳은 덴류지(天龍寺)다. 몽창(夢窓) 스님이 창건한 임제종(臨濟宗)의 사찰이다. 법당 천장에 지름이 9미터나 되는 용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마침 보수 중인 일부가 전시되어 있어 잠시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절에도 용 그림이나 용 조각들이 흔한데 절이 왕이나 왕가의 안녕을 기원하며 세워진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덴류지도 어느 천황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입장권을 끊으면 본당을 직접 둘러볼 수 있다. 슬리퍼를 신고 본당을 둘러보다가 잠깐씩 난간에 앉아 본당 밖에서 걸어가는 사람들을 한가로이 지켜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우리 일행을 보며 몇 마디씩 하고 간다. ‘어떻게 저 사람들은 본당 쪽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거지?’ 대략 이런 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마루와 마루를 통해 몇 동의 건물을 그 옛날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처럼 둘러보았다. 그리고 얼마 뒤 내가 그랬듯 쪽마루에 걸터앉은 사람들을 지나쳐 대나무 숲길로 향했다. 그 기세며 빛깔이 담양 소쇄원의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산행 때 그러듯 심호흡을 했다. 고즈넉한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야 하는 조자코지(常寂光寺)에서는 앞사람들의 흉내를 내며 사천왕문 앞에 달린 왕방울을 흔들어 소리를 내고 ‘내가 왔다’는 신호를 보내고 절을 둘러보았다. 사찰 몇 곳을 스치듯 지나치고 가는 길이었는데, 뭔가 검은 물체가 우리 머리 위로 휙 지나가고 얼마 뒤 우당탕 소리가 들린다. 얼핏 노루의 뒤꽁무니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꼭 가봐야 한다는 곳이 있어 걸음을 재촉하는데, 재미있는 게 눈에 띄었다. 무인 야채 판매대이다. 100엔, 150엔 가격표가 붙어 있는데 물건함은 많이 비어 있었다. 누군가가 벌써 사간 모양이다. 우리는 돈통에 값을 치르고 야채 두 개를 샀다. 기념이라며.
헐레벌떡 도착한 곳이 다이가쿠지(大覺寺)다. 뭐 그리 대단한 곳이라고, 하며 안으로 들어서는데 이곳도 슬리퍼를 신고 쪽마루를 걸어 건물들을 다 돌아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불교 진언종(眞言宗)의 본산으로 불경을 사경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사경 강습회 등을 열고 있다고 했다. 한때 천황의 거처로 사용했던 곳이고 황족이 주지를 맡았던 절이어서 그런지 절 규모가 예사롭지 않다. 특히 눈에 띈 것은 침전(寢殿)이었다. 열두 개의 방은 벽이며 문이며 할 것 없이 모란, 매화 같은 꽃과 토끼 등의 동물들이 빼어난 솜씨로 그려져 있었다. 천황가의 번영을 기원하며 일본 최고의 화공들이 그렸다고 한다. 침전 앞마당은 온통 하얀 모래가 뒤덮고 있었고 침전 바로 앞 왼쪽에는 매화 한 그루, 오른쪽에는 유자나무 한 그루만 서 있는 것도 특이했다.
다이가쿠지 옆에는 석양이 유명하다는 호수가 있다.
웬 사내가 오리 떼에게 먹이를 던져주고 있는데 한참 전부터 머리 위로 빙빙 돌던 솔개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오더니 허공을 날던 빵조각을 툭 채서 저만치 날아간다. 오리가 아니라 식빵 쪼가리라니, 몹시 배가 고팠나 보다. 그런데 이런 큰 절 옆에도 진자가 있었다. 다이가쿠지가 천황 가의 안녕을 기원했다면 진자는 이곳에 사는 백성의 안녕을 보살피는 역할을 했으리라. 이곳 진자는 당산나무의 신을 모신 것 같았다.
버스투어는 일본과 일본인들을 다르게 볼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우리로 치면 홍도 투어, 섬진강 벚꽃길 여행 뭐 이런 것과 비슷하다. 시내 어느 건물 뒤 깃발 아래 모였다. 목적지는 가이게 온천이다. 일본 서부 해안(우리나라 동남부 해안)에 위치한 곳이다. 온천에 가기까지 한 네 곳을 거쳐 가는데 참 신기하게도 거치는 곳마다 모두들 내려서 차에 오를 때는 두 손 가득 뭔가를 사오는 게 아닌가. 오미야게다. 일본인들은 어디를 다녀오면 작은 것일망정 주위 가족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꼭 사간단다. 줘서 좋고 받아서 좋고 팔아서 좋고. 모두 좋다. 일본이 자국민의 저축 때문에 살고, 내수시장만으로도 버틸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힘을 직접 본 것 같다. 게다가 들르는 곳마다 버스 승객 숫자에 맞춰 선물을 하나씩 주는 게 아닌가. 우유 마켓에서는 치즈 빵을, 옥 전문 취급소에서는 행운의 실타래를, 수산물 시장에서는 해산물을, 와인전문점에서는 와인캔디를, 뭐 이런 식이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받는 사람들은 공짜라서 싱글벙글한다. 버스가 떠날 때는 꼭 직원 두세 명이 나와서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인사하고 손을 흔들어준다. 또 들르고 싶게 만든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일본해 5km 직진이라는 이정표지가 눈에 띄었다. 일본인들에게는 아무 느낌도 없었을 그 표지판을 보니 언젠가 읽은 글귀가 떠올랐다. ‘방향이란 극히 상대적이다. 누구를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정반대가 된다. 극동이니, 중동이니 하는 말도 유럽(서구) 중심의 세계관이다. 우리에겐 동쪽에 있는 바다이니 동해라고 하겠지만, 일본인들 처지에서는 서쪽이나 북쪽에 있으니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온양온천처럼 온천은 소박했다. 역시 사방이 바다라 저녁 정식으로 나온 해산물들은 참 신선했다. 다음날 아침 투어 일행들이 일본 최고의 정원이 있다는 족립미술관(足立美術館)으로 몰려간 사이 혼자서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여기에도 진자가 있었다. 이곳에 온천을 만든 이를 기리는 곳이다. 우리로 얘기하면 조상신이라 할 만한데 일본인들은 이렇게도 진자를 만드나 보다.
진자인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에 들러서야 이 투어에 20대 여성들 10여 명이 함께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원래 일본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는 이곳은 인연을 맺어주는 곳으로 유명하단다. 본당은 낡아서 수리 중이어서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고 카루라덴(神樂殿)을 찾았는데 본당 좌우를 가로질러 걸어놓은 거대한 짚을 꼬아 만든 밧줄(‘시메나와’라고 한다)이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은 조용히 기도를 하더니 그 인연줄에 동전을 던져서 꽂고 있는 게 아닌가. 재미있어 보여 우리 일행도 따라 했다.
이곳은 인연을 맺어주는 진자이면서도 전국의 모든 신들이 날을 정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본당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몇 층 난간이 있는 건물들이 있었다. 신들은 그곳 난간에 정해진 자리가 있다고 한다.
돌아가는 저녁 길 갑자기 여행 안내원이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잔다. 모두들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가위바위보를 한다. 처음 몇 번은 이긴 사람에게 선물을 주더니 나중에는 진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 눈치로 보니 게임선물들은 이번 투어 길에 들른 곳에서 손님 모시고 와 고맙다며 이 안내원한테 준 것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아낌없이 주었던 것이다.
기타노텐만구(北野天滿宮)도 진자다. 그것도 학문의 신을 모신 곳이란다. 봄마다 매화축제를 한다는데 마침 날짜가 맞아 겸사겸사 교토로 갔다. 오사카 성에도 매림(梅林)이 있다. 말 그대로 매화의 숲이라 할 만하다. 몇천 평에 이르는 곳에 백매화며, 홍매화며 온갖 매화들로 가득하고 저마다 사진에 담으려고 인산인해를 이뤘던 기억이 난다. 기타노텐만구도 매화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표를 사니 축제날이라고 오차를 곁들인 과자 교환권을 준다. 천막 안에서 삼삼오오 모여 간식을 먹는 재미도 괜찮다. 꽃들을 일별하고 텐만구 안으로 들어가니 본당 앞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많은 일본인들이 해마다 입시철과 졸업생들의 구직철이 되면(일본은 우리보다 한 달이 느려 2,3월이 입시철이다) 이곳을 찾아와 자식과 친구들의 성공을 기원한다고 한다. 긴 줄로 늘어선 일본인들과 사이사이에 호기심 어린 얼굴로 끼어 있는 외국인들이 저마다 차례가 돌아오면 방울을 흔들어 신을 부르고 소원을 빌었다.
진자든 절이든 이렇게 기도하는 곳 앞에는 우리나라 절에도 법당 안에 불전함이 있듯, 그리고 유럽의 박물관 앞에 도네이션 함이 있듯 보시함이 놓여 있다. 사람들은 으레 얼마가 됐든 보시를 한다. 신을 믿는 안 믿든 그렇게 하는 습관이 몸에 밴 듯하다.
정말 신들의 나라다. 사람들도 일상처럼 신과 만나 소통한다.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는 정말 나를 놀라게 했다. 언젠가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에 갔을 때 놀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신라의 스님이 절을 창건할 때 관여했다는 도다이지 금당은 그 규모로 사람을 압도한다. 높이가 거의 50미터에 이르니까. 게다가 내부로 들어가면 쇠로 만든 대불상(大佛像)이 금당 한가운데 좌정하고 있다. 이 대불도 높이가 15미터에 이른다. 둘 다 일본 국보로, 제작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볼 때 아마 당시 신라에도 그와 비슷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았다.
그런데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였던 산주산겐도(정식 명칭은 천체관음당千?觀音堂이고 국보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33칸에 이르는 건물은 입구부터 저 끝까지 십일면천수관음보살상이 빽빽하게 도열해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다섯 계단을 채우며. 한가운데 거상(巨像) 보살상이 있고 좌우로 무려 500개의 보살 입상이 서 있었다. 모두 1,001개이다.
엉뚱한 생각을 해봤다.
비슷한 문화적 길을 걸어왔던 우리에 비해 일본은 왜 이리 전통 유산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일까. 나름 결론 내리기를 몽골과의 전쟁, 두 번의 왜란,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등을 경험하며 목조물은 불타 없어지고, 흙 조성물은 허물어지고, 쇠는 녹아 없어졌으며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은 민간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이미 형체를 잃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중건 또는 재건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 벌인 새마을운동은 대미를 장식한다. 그나마 남아 있던 민간 유산을 부수고, 매장하고 정신마저 매도한다. 미신이라며 성황당이 헐리고, 장승이 베어지고, 당집이 사라지고… 그러면서 뭇 신들에 대한 생각마저 봉인된 것이라고 하면 너무 지나칠까.
일본의 문화재들도 숱한 내전을 치르며 분명 불타거나 무너졌을 텐데 지금 저렇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와는 다른 역사, 다른 세계관, 다른 문화 정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 일본의 문화유산을 보러 가면 어린이들이 작은 수첩에 열심히 스탬프 찍는 것을 볼 수 있다. 웬만한 곳에는 그렇게 찍도록 특색 있는 스탬프를 비치해 두었다. 재미 삼아 들른 곳의 스탬프를 찍는 것도 덤으로 얻는 작은 즐거움이다. 한번 해보시기를. (*)
---------------------
필자 소개
김수영
한겨레출판 주간. ‘나비’ 편집위원. 책읽기, 산이나 공간 걷기, 사물과 교감하기, 사람들 사이를 기웃거리기를 좋아한다. 그때그때 감정에 따라 모둠 독서를 즐기는 편이라 어떤 날들은 시집만 줄곧 파고, 또 다른 날은 사랑을 주제로 한 책들을 장르 가리지 않고 몇 주 내내 코 박고 본다. 아니면 한 저자의 책들만 모아서 교감하든가. 문자나 영상을 압도하는 소재들과 인간미 물씬 풍기는 역사를 만나는 즐거움이 여간 아니다. 가끔 농담처럼 얘기하지만, 이렇게 하나씩 주운 이야기 파편들로 언젠가 소설 한 권 써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