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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도 먹고살기 힘든데, 시인은 무얼 먹고살까? 나비 ‘봄맞이’ 시 낭송회 “불어라, 봄바람”에 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잘 먹고 잘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건 누구나 고민하는 것이지만, 작년 겨울에 결혼한 초짜배기 소설가로서 먹고사는 문제의 고민은 점점 커져 가는 것 같다.
‘연희문학창작촌’에 한 번도 와본 적 없어서 미리 분위기를 파악할 겸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점심때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김형균 간사와 이번 행사의 아이디어를 낸(원래 아이디어를 낸 편집위원이 실행을 책임지는 것이 나비의 운영방식이다) 백가흠 소설가가 분주하게 무대 준비를 돕고 있었다. 연기자 오광록 선생님은 미리 낭송을 연습하는 열의를 보이며 목소리가 괜찮은지 연신 스태프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읽더라도 오광록 선생님의 목소리는 코믹했다. 소나무 숲 사이에 자리한 아담한 원형 무대는 야외 낭송회를 진행하기에 최적의 장소처럼 보였다. 밤이 되자 조금 쌀쌀해졌지만 정성스럽게 준비된 무릎담요 때문에 온기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웹진 나비의 독자분들, 편집위원들, 출연자들이 속속 도착했고 주위가 충분히 어둑해지자 시 낭송의 밤은 시작되었다.
신용목 시인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데다가 수줍음을 많이 타는 두 개의 핸디캡을 가지고도 사회를 잘 보는 신공을 지녔다. 아마추어 같지만 할 말은 다 하는 프로 진행자의 모습으로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시낭송회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어 주었다. 운치 있는 분위기를 연출한 허윤정 선생님의 거문고 공연을 시작으로 나비 공동편집인인 도정일 선생님의 여는 말씀이 있었고(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으셔도 멋지십니다), 원래 시인이 되고 싶었다는 소설가 박범신 선생님의 자작시 낭송, 시인 장석남 선생님의 ‘말린 고사리 한 뭉치/ 무게를 누군가 묻는다면/ 하여튼 묻는다면/ 내 봄날을 살아낸 보람 정도라/ 답으로 준비한다’는 자작시 「말린 고사리」의 낭송이 이어졌다. 시 낭송보다 짧은 스커트와 번쩍거리는 신발에 더 시선이 갔던 정혜윤 피디는 노벨상 수상작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감사」를 낭송했다.
정혜윤 선생님의 낭송이 끝나자 조금 늦게 도착한다던 아내가 전화를 걸어왔다. 연희동을 처음 와 보는 것인데다(우리는 부산 촌사람들이다) 택시기사도 이곳을 몰라서 엉뚱한 곳에 내렸다며 당황스러워 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모르는 내가 길을 설명할 수 없어서 무작정 큰길로 나가 아내를 기다렸다. 전화를 몇 번이고 한 끝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걸 알게 되었다. 아내가 마침내 도착했을 때는 몇 명의 낭송이 끝나고 재즈가수 말로와 기타리스트 박주원의 ‘막간 재즈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요즘 기타를 배우고 있는 나는 젊은 기타 반주자의 현란한 플레이를 넋 놓고 구경했다. 아, 나는 언제쯤 저만큼 칠 수 있을까?
이어진 제1회 나비 문학상 시상식에서는 사진에서부터 비범한 포스를 풍기던 시 부분 당선자 난파 선생님(여자인 줄 알았으나 씩씩한 남자)과 인상 깊은 단편소설 「귀」를 쓴 김재아 선생님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단편소설 「동거(同居)」를 쓴 또 한 명의 소설 부문 당선자 조미경 선생님은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이날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 글을 쓴 현재 조미경 선생님은 둘째를 출산한 후 산후조리 중이다. 앞으로도 멋진 글로 자주 만나길 바란다.
2부에는 불문학자 김화영 선생님, 나비 독자 이지혜 선생님, 성우 김상현 선생님, 소설가 윤대녕 선생님, 방송인 유정아 선생님, 문학전문기자 최재봉 선생님의 시 낭송이 이어졌다. 다들 자기가 좋아하는 시를 멋들어지게 읽었지만 뭐니뭐니해도 김화영 선생님의 ‘암송’을 잊을 수 없다. 24연이나 되는 폴 발레리의 시 「바닷가의 묘지」를 불어로 낭송하셨는데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성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음성에 도취되어 버렸다. 프랑스에서의 유학시절 힘들 때마다 산책하면서 이 시를 암송하셨다고 한다. 긴 시지만 낭송이 끝나자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중저음의 성우 김상현 선생님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었던 파블로 네루다의 「엉겅퀴」, 유정아 아나운서가 읽었던 귀여운 시 「질 나쁜 연애」, 최재봉 기자님의 ‘신문처럼/ 네가 나를 궁금해하며 기다린다면’으로 시작되는 「이를테면 너의 적막한 하루에」도 기억에 남는다.
낭송회가 끝나고 터벅터벅 길을 내려오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이곳에 올 때의 걱정이 어디론가 사라진 걸 알게 되었다. 아직도 쌀쌀한 이 봄밤에 이 세상 누군가가, 누군가의 시를 좋아해서, 누군가에게 읽어주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도 일단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먹고사는 걱정 따위는 쉽사리 잊게 해주는 감동이다.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사랑받게 되는 언어의 묶음이 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직접 듣기 위해 어렵게 한자리에 모여 그 감동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설은 이렇게 읽혀질 수 없고, 순식간에 감동을 줄 수도 없다. 그래서 문득, 가난하더라도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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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진
소설가. ‘나비’ 편집위원. 전자공학 박사과정을 중퇴하고 캘리포니아에서 유랑하던 중 돌연 소설을 쓰리라 결심한다. 2004년 첫 장편소설 『채리』를 자체 제작하여 온라인 판매를 했으나 400여 권이 남아 집에 차곡차곡 쌓아놓았고, 2005년 연작소설 『하트모텔』을 자체 출판하였으나 제목만 야하다는 주위의 원성을 듣고 『채리』와 함께 보관 중이다. 더 이상 책을 쌓아둘 장소를 찾지 못하던 중, 2006년 뉴욕에서 쓴 세 번째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를 문학상에 처음으로 투고, 제12회 한겨레문학상을 받는다. 인디 문화잡지 <보일라>(VoiLa)의 편집장을 지내며 30여 호의 잡지를 기획하였고, 2004년부터 지금까지 대안출판 프로젝트 ‘한페이지 단편소설’을 운영하면서 끊임없이 책을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