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드라마 <파스타>가 끝났다. 이 드라마가 시작할 즈음 KBS에서는 <추노>를 했었는데, 처음에는 <추노>를 봤다. 추노 3인방의 초콜릿 복근, 박한위, 성동일, 안석환 같은 실력파 조연들이 차려주는 풍성한 연기, 등장인물들에게 모두 저만의 히스토리와 캐릭터를 부여하는 극작 솜씨 등 <추노>를 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경쟁사에서 하는 드라마 <파스타>에 대한 기대가 별반 없었던 것도 여기에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예쁘게 보이려고 예의만 차리며 지내다가 정작 주변에 남는 친구는 한 명도 없는 맹탕처럼, 겉보기엔 말쑥하고 매끈하지만 밋밋하고 무난한, 한마디로 시시한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요일 낮에 재방송을 하고 있는 <파스타>를 우연히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때 본 장면에서는 버럭 쉐프 최현욱(이선균 분)이 서유경(공효진 분)이 만든 파스타를 맛본 후의 풍경이었는데, 그 모습을 잠시 소개하면…
최현욱 쉐프 | 잘 만들었다. 활어 흰살생선 특유의 달큰하고 부드러운 맛이 잘 유지됐다. 빵가루와 계란을 최소로 사용한, 적절한 반죽 – 칭찬 받을 만하다.
서유경 | …
최현욱 쉐프 | 요리도, 살아있다. 살아서 포크와 나이프 쥔 자를 꼬신다. 니 요리는, 아직 꼬시는 기술이 부족하다.
서유경 | 꼬시는 기술이 뭔데요? 어떻게 하면 잘 꼬실 수 있는 건데요?
최현욱 쉐프 | 니 요리는 짝사랑이다. 니 요리를 사람들이 좋아하고 인정해 줄 거라는 확신과 자신감이 부족해. 요리 스스로 ‘확신'이 없는 요리는 살아있는 매력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꼬시지 못한다.
서유경 | …
최현욱 쉐프 | 짝사랑만 하지 말고, 꼬셔봐. 제대로.
이 장면이 내 마음에 들어온 이유는 거침없이 노련하게 이어지는 최현욱 쉐프의 요리 품평 때문이 아니라, 꼬시는 재주가 없는 라스페라 막내 요리사 서유경 때문이었다. 바보스럽게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을 해나가지만 자신감이 부족한 서유경이 어떻게 일과 남자를 모두 획득(!)해 가는지, 그 과정이 궁금해졌던 거다. 이후의 스토리는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대로, 난 <파스타> 폐인(짤방을 올리고, 시청자 게시판에 의견을 적을 정도는 아니지만 안 본 드라마 VOD로 다시 보고 ‘본방’ 사수하니, 이 정도면 폐인 자격이 되겠지요?)이 되었다.
파스타를 맛있게 만드는 요리사가 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였던 서유경에게 최현욱 쉐프는 둘도 없이 멋진, 반할 수밖에 없는 남자이다. 능력 있고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까지 좋은 라스페라 사장님 김산(알렉스 분)도 키다리 아저씨처럼 서유경을 뒤에서 말없이 응원하며 사랑하지만, 서유경의 마음은 흔들림 없이 오로지 쉐프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의 최쉐프도 서유경을 사랑하게 되는데, 예뻐서도 아니고 요리를 잘해서도 아니다. ‘미련해서’이다.
최현욱 | 여자가 쉐프 되기 힘든 이유가 뭔지 아냐?
서유경 | (표정)
최현욱 | 건 미련하지 않아서란다. 미련한 사람이 마른 땅에서 우물을 판다. 쉐프는 우물을 파는 것처럼 끝도 앞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
서유경 | (꼬옥 안는다.)
최현욱 | 이쁘다. 미련해서.
서유경 | (표정)
최현욱 | 돈 많은 남자도 싫대고. 힘없는 애인 내 손으로 사지에 밀어 넣었는데도 자알 버텨주고. 나 쉐프 노릇 폼 나게 할 수 있게도 해주고, 고맙다, 미련해서.
서유경이 얼만큼 미련한지 잠깐 언급하자면, 국내 최고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라고 평가받는 라스페라 입사 방법부터가 그렇다. 실력도 없고, 빽도 없었기에 서유경이 선택한 방법은 친구들과 함께 라스페라에서 기백만 원 어치의 음식을 먹고, 돈 없다고 으름장은 놓은 결과 주방 보조로 입사하여 음식값을 내라는 제안을 받는 데 성공한 것. 이탈리아 대사관의 연례 오찬은 어떠한가. 이탈리아 대사관이 어떤 음식을 시킬지 알아보기 위해 지금까지 그의 주문 이력을 확인 한 서유경은 틀림없이 봉골레 스파게티를 시킬 거라 확신한다. 더 맛있는 봉골레 스파게티를 만들기 위해 다른 주방 동료들은 놀고 있을 때 모시조개를 정성껏 해캄 시켜 준비한다.(이탈리아 대사관은 다행히도 봉골레 스파게티를 시켰고, 최쉐프는 서유경에게 봉골레 스파게티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다.) 최쉐프가 “활어 흰살생선 특유의 달큰하고 부드러운 맛”이 잘 살아있다고 칭찬한 그 파스타는 또 어떠한가. 아주 튼실한 쥐치를 구하기 위해 동해까지 달려가서 미련하게도 밤새워 쥐치를 잡아오는 어선을 기다려, 질 좋은 식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사회에서 3년 정도만 굴러 봐도 아마 대강 눈치챌 거다. 이리저리 눈치 보면서 영악하게 제 실속만 차리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믿고 있는 길을 가기 위해 재지 않고, 한발 두발 걷는 사람이 더 강하다는 것을. 그 사람이 이렇게 걸어오면서 봤던 것들, 무수히 만났던 사람들, 들은 이야기, 겪었던 일들은 오직 전적으로 이 사람만의 것이고, 그 경험은 그 사람을 성숙시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길러주고, 함께 살아가는 것의 가치를 알게 해준다는 것을. 또 이렇게 미련하게 길을 걷게 하는 힘은 다름 아닌 그 사람의 열정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이다(열정이 없는 사람은 결코 바보스럽게 일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 외모, 학벌, 줄타기 등의 위력으로 미련함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고 있다는 사실도, 씁쓸하지만 부인할 수는 없다.
<파스타>는 참 좋은 드라마다. 이것은 나의 결론인데, 이렇게 미련한 서유경이 더 많이 배우고 더 예쁘고 실력도 더 좋은 선배 요리사(실제로 <파스타>는 이러한 캐릭터를 가진 오세영이 등장한다. 미스코리아 출신의 이하늬가 연기했다)보다 남자에게 더 인기가 많다는 스토리 때문이다.
미련함의 가치를 격상시켜줄 더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이성에게 최고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는 아마 인간이 저마다 갖추기 위해서 최고로 노력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미련하기 때문에 인기남 두 명을 꿰찬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아, 나도 서유경처럼 미련하게 일하면서 내 꿈을 좇아야지’라고 생각할 여학생들을 생각하면, 슬쩍 웃음이 나온다. 아, 나도 앞으로 더 미련해져서 더 멋진 이성들을 꼬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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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정희
‘나비’ 편집위원. 인터넷서점 예스24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책을 만나고 즐길 수 있도록 궁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