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낮 엄마의 택배가 배달되었다. 큼지막한 사과박스 하나를 택배기사가 끙끙대며 현관 앞에 내려놓았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두 번 배달되는 택배 박스는 정말이지 어렸을 적 받으면 설레서 밤잠을 설쳤던 종합과자선물세트와 같다. 그 안에는 엄마만이 가능한 일들이 박스에 들어 있기 마련이다. 때론 택배기사가 박스를 내려놓으며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 무게가 20kg을 훌쩍 넘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택배 기사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어서 나는 다른 날과는 달리 그의 앞에서 박스를 열었다.
오늘은 다른 때보단 가볍네요.
매번 같은 사람이 배달을 왔는데 지난번 안면을 텄던 터 동갑내기 택배기사가 친근하게 말했다. 그는 두 딸을 둔 가장이라고 했다.
박스를 열자 반찬통 사이로 틈 없이 빼곡하게 담겨 있는 한라봉이 눈에 들어왔다. 반찬통을 싼 비닐봉지 사이 선명한 노란색의 대비가 눈을 뜨이게 했다. 택배 기사가 허허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우리 엄마하고 똑같네요.
엄마들이 다 그렇죠? 먹을 거 싸줄 땐 빈틈이 없어요.
나는 한라봉을 몇 개 집어 그에게 내밀었지만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지 말고 드세요, 힘드셨을 텐데.
이걸 내가 뺏어 먹을 수 있나요.
택배기사는 급구 사양을 했지만 나는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가 기어이 손에 한라봉 세 개를 쥐여주었다.
형제 둘이 사는 집, 뭐 먹을 거 있겠나 싶어 엄마는 언제나 노심초사한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점심엔 뭘 먹었는지, 저녁에는 뭘 먹을 건지 묻기도 한다. 살림살이엔 영 취미가 없는 동생보다야 자취 역사가 근 십 년 구력에 가까운 내게 말해야 약발이 통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선 끊임없이 살림살이 법에 대한 자기의 노하우를 전수하기 바쁘다. 물론 나는 언제나 건성이다. 강의로, 글쓰기로 언제나 바빠서 집에서 밥을 먹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한참을 말한 엄마에게 전화로 말한다. ‘그런 거 누가 먹는다고 보내. 이제 보내지 마요, 내가 필요하면 전화할게.’ 엄마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엄마도 이런 말은 건성으로 듣는다.
그러나 그도 그럴 것이 엄마의 반찬을 극구 사양하는 이유는 냉장고에서 기한을 넘기지 못하고 음식 쓰레기로 버려지는 날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물론 귀찮아서 그런 것들을 정리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내가 주로 대는 핑계이고. 냉장고에서 썩어가는 반찬통을 보자면 화딱지가 나기도 한다. 극구 내가 어머니의 오랜 취미생활을 마다하는 하는 이유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먹지 못한 음식이 아까워서라기보다 그것이 더 귀찮아서 문득 짜증이 이는 것이다. 난 참, 못된 놈이다.
아침, 매번 일정한 시간에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는 수화기 너머 ‘어서 일어나서 밥 먹’으라고 성화다. 대부분은 밀린 원고나 인터넷하고 노느라 밤을 꼴딱 새고 난 후라, 내 짜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나는 소리친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사냐’고. 엄마는 그래도 ‘다 먹어야 살지.’ 하곤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도망간 잠 찾아올 길 없어 신경질이 인다. 엄마는 할 말을 다 했으니 성공적이다.
그런데 어찌 일곱 살 때나 서른일곱 살 때나 엄마와 나는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게 참으로 씁쓸하다. 엄마가 잘못한 게 무어가 있나 곰곰 신경질을 밀어내며 생각한다. 요즘 들어 엄마의 성화는 더 심해졌다. 내가 서른일곱이 되어서도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여기는 시골이라 장가를 그 나이 되어서도 가지 않는 게 마치 니가 무슨 험이 있는 줄 안당게.’ 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엄마가 유일하다, 정말. 나는 ‘험’ 투성이, 엄마만 모른다. 성질 괴팍한 글쟁이, 키는 170이 조금 넘는 애매한 루저도 아닌 완전 루저에 노총각, 나이에 걸맞게 배도 나왔고, 수입도 일정치 않은, 물론 집도 없고, 아파트 꼭대기 전셋집에서 멀리 보이는 북한산의 실루엣이나 감상하고 있는 아직도 한량인 것을 엄마만 모른다. 그게 모두 ‘험’이라는 것을 모른다.
언제인가 전화를 걸어서는 다짜고짜 내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고 아직도 반가운지 들뜬 목소리가 가라앉지 않은 채 엄마는 말했다. 시골집을 드나드는 택배기사가 내 동창이라는 얘기였다. 원래는 부칠 물건을 들고 가서 부쳐야 하는데, 이젠 전화만 하면 내 동창이라는 택배기사가 찾으러 오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수고를 덜 게 돼서 엄마는 여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근데 너 경식이라고 몰라? 너랑 친했다고 너 아주 잘 안다는디.’ 나는 경식이를 모른다. ‘몰라’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경식이가 너 유명한 작가 된 것 자기도 들었다고 잘 됐다고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근데 가도 애가 둘이라더라.’ 엄마가 또 자연스럽게 결혼문제를 꺼내려 하자. ‘누가 유명한 작가야, 끊어, 나 바빠.’ 하곤 전화를 매몰차게 끊어버렸다. 시골에서는 소설가라는 직업 자체가 신기한 것이니 그럴 수 있을 거란 걸 알지만 난 전혀 엄마에게 친절하지가 못하다.
반찬을 냉장고에 넣으며 곰곰 생각해보아도 경식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도 시골집에 들러 엄마의 택배를 받아들며 나를 떠올리겠지 생각하니 뭔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으레 그 귀찮음으로 반찬들을 대충 냉장고에 넣는다. 난 못된 놈이다, 참.
이번에는 엄마의 반찬들, 버리지 않고 다 먹어야 할 텐데, 다짐해보다가 집에서 밥 잘 안 먹는 동생 핑계 대며 혼자 구시렁구시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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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백가흠
소설가. ‘나비’ 편집위원.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광어」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우리 시대의 극단적인 정신세계와 불편한 현실을 아이러니와 판타지로 녹여내는 개성적인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소설집으로 『귀뚜라미가 온다』, 『조대리의 트렁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