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뀔 때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들 중 하나. ‘도사님’들이 사람을 읽고 삶을 내다보며 한 해의 길흉화복을 점쳐주는 곳. 얼마 전 한 모임에선 누군가 보고 온 운세가 화제에 올랐더랬다. 주위 사람들의 장난 섞인 논평까지 덧붙여지면서 분위기는 금방 화기애애해졌다. 믿건 아니 믿건, 운명의 말들만큼이나 누구나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것도 드물 터. 성격에서부터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날들의 흔적으로부터 다가올 날들의 부침(浮沈)에 이르기까지. 멀리는 유력 정치인들의 그것으로부터, 가까이는 가족의 안녕을 비는 모친이 얻어온 그것까지. 사주팔자공화국 신민들의 발걸음은 새해가 되면 유난히 분주해진다.
되짚어 보면 이 유서 깊은 인류의 습속에 진화가 찾아든 것도 오래된 일인 듯하다.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캐주얼한 사주카페가 생겨났고, 젊은이들 사이에 타로카드와 서양식 점성술이 유행하였으며, ‘무료’라 유혹하는 갖가지 사이트들이 웹상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불확실한 미래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공평하므로 미래를 읽는 업도 꽤 장사가 되는 ‘산업’이 된 모양이다. 1월호 잡지 끄트머리쯤서 낡아가고 있던 토정비결도 조금만 서핑하면 손아귀에 들어오니… 매월의 신수를 훑으며 ‘잘못 사귀면 구설이 많으니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말에 실망하기도 하고, ‘봄이 신록에 무르익으니 백 가지 꽃이 앞 다투어 피어난다’는 말에 기뻐하기도 하며, 운명의 염탐가들은 오늘도 웹 페이지를 이리저리 순례한다. “잘 나올 때까지!”
이 세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기에 나 역시 완전히 문외한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대학교 3학년 때였던가, 절친한 친구의 손에 이끌려 친구가 안내하는 대로 ‘신통방통할머니’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친구가 붙인 그 별칭이 우스워서, 신통방통, 신통방통, 가는 길 내내 호호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소일거리 삼아 친분이 있는 이들의 사주를 읽어 준다는 그 노부인이 일러준 것들 중에서,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몇 안 된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이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오리라고도 물론 예상하지 못했다.
대학원에 진학하자 한 선배가 어학연수 시절 ‘아랍왕자’에게 갈고 닦았다는 ‘믿거나말거나 아스트롤로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차트’라 불리는 낯선 그림을 띄어 놓은 후 선배는 대학원 친구들의 천궁도를 상냥하게 ‘읽어’ 주었다. 아,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정말로 재미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신이 나서 좋아했던 것이 별들의 좌표였는지, 아니면 그것들로부터 비롯하는 선배의 이야기였는지 헷갈리기만 한다. 아무튼 ‘믿거나말거나 아스트롤로지’에 의해, 흔히 말하는 별자리들은 태양이 위치한 자리일 뿐이고 누군가 태어나던 날의 우주에는 더 많은 행성들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호기심 많은 천성대로 더 알고 싶은 비밀들을 쫓아 도서관 서가의 한 귀퉁이를 서성이게 되었다.
… 커뮤니케이션을 주관하는 수성은 재치가 넘치고 말솜씨가 뛰어나지만 성급하고 변덕스럽다. …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금성은 예술과 평화를 사랑하지만 사치스럽고 나태하다. … 달은 황소자리에서 열광하고, 화성은 양자리에서 가장 활동적으로 처신하며, 토성은 사자자리를 맞지 않는 옷처럼 여긴다. … 1하우스는 자기 자신을, 반대편의 7하우스는 타인과의 관계를 뜻한다. … 별들이 이루는 각도가 연각이면 서로 편안하지만 경각이면 서로 불편하다… (믿거나 말거나 아스트롤로지의 목록 중에서)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다기보다는 차라리 너무나 뻔해서 지리멸렬한 청춘이 따분해서였을까. 짧은 순간 어깨너머로 본 별들의 세계에는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불가해 보이는 별의 자취들을 읽어 내고, 그것들을 분석하여 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하는 일. 하지만 그 오묘한 세계가 얼렁뚱땅 책 몇 권을 곁에 쌓아놓고 있다 한들 쉽게 열려질 리 없었다. 초보자에게 그것은 흥미로운 만큼이나 복잡했고 매혹적인 만큼이나 난해했다. 계속 인내하며 원리를 탐구할 지구력이 없었던 까닭으로, 다른 몇 가지 취미들이 그랬던 것처럼, 관심은 서서히 식어버렸다.
하지만 그 세계를 처음 접했던 당시에, 별들의 화음이 내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겠다. 얼마간의 독습에 쓸데없이 고무된 초보의 대담무쌍함으로, 나는 나름대로 ‘임상경험’을 쌓는다는 명분 아래 친한 친구들의 차트를 봐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무지 잘 모르겠는 별들이 있었고, 너무나 두드러져 바로 눈에 띈다 해도 말하기 어려운 심중이 있었다. 천궁도란 작은 도표 하나일 뿐이지만, 그것의 의미를 풀어서 말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행성 각각의 고유한 특성과, 그 행성들이 위치한 자리와, 행성들이 교환하는 빛의 어울림과, 그 모든 것이 말해주는 징험들을 종합적으로 읽어낸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읽어낼 때 누구 하나 같은 인간 없이 내 앞의 사람은 모두들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는 것. 나는 그 일이 문학텍스트를 읽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차트를 읽는 일은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다. ‘잘 모른다’며 사실대로 말하고 아무리 눙치며 차트를 읽기 시작해도, 타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의 무게가 다가왔던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와 친해지면 지나가는 말처럼, ‘언제 한번 차트 봐 줄게’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차트를 펼쳐 보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결국 아는 것이 딱히 풍부하지 않은 이 세계의 입문자에 만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재미로 하는 취미치곤 누군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야 하는, 그리고 그것을 그 누군가에게 유익하다고 판단되는 쪽으로 전달해야 하는, 그 과정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별들에게 살짝 매혹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단지 나뿐 만일까. 인류의 문명이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서, 미래에 대해 단 한 톨의 근심도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언젠가 온다 하더라도, 불가해한 운명과 그 운명의 신비에 이끌리는 자들은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 합리적인 눈으로 볼 때 온갖 오류로 점철된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자기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별들에게 제 갈 길을 묻게 되리라. 나약하고 어리석어서일까. 좋은 운을 찾아 오로지 그때가 오기만을 전전긍긍 기다리는 이들은 답이 궁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이미 주어진 별들의 길흉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들이냐에 있는 법. 자기도, 또 자기의 앞날도, 별이 아니라 별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무도 모르지는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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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차미령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 주요 평론으로 「네크로폴리스 견문기」, 「분열에 대하여」 등이 있다.